제 13 단원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내가 본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1 회 : 기회의 땅을 찾아 아메리카로 ..
내가 미국에 이민을 온 이유는 미국이 ”기회의 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할 곳은 얼마든지 있었고 노동의 가치가 보장되고, 신앙과 언론의 자유, 질서와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라 생각했다. 내가 미국에 도착하기 정확히 200년전 1775년 대에 유럽에서 내가 생각했던 비슷한 이유로 많은 이민자들이 아메리카로 몰려 들었다. 당시 인구는 250만명 정도가 뉴 잉글랜드 13개주에 흩어져 살았고 땅은 영국의 식민지 였으며 프랑스, 네델란드 등도 정치적인 이유 또는 무역, 은행 등의 상업적 이유로 세력을 넘보며 대치하는 양상이었다.
이보다 훨씬 전인 1620년 101명의 남여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메사츄세스 프리머스항에 도착 했다. 이들은 영국 성공회에 실망한 퓨리탄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찾은 초창기 이민선이었는데 척박한 땅과 예상치 못한 기후, 질병등의 악조건과의 싸움으로 고전을 면치 못 했다. 그럼에도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이민자들은 계속 유입되고 스코트랜드, 아일랜드, 독일 등의 국가에서도 가난한 이민자들이 몰려들었다. 정치적으로도 기회의 땅을 엿보던 프랑스, 네델란드 등이 식민지를 탐하지만 영국군의 강권으로 사라지고 뉴잉글랜드는 명실공히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처음 토착인 인디안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 했지만 점차 이민사회가 커지면서 지역의 안전을 위한 경찰, 군대가 좋은 무기로 무장을 하고 더 넓은 지역으로 팽창하면서 인디안과의 갈등은 피 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강자 만이 살아남는 사회에 미국의 성장 속도만큼 인디안들의 비극은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초기 이민자들은 금과 은을 찾았는데 실제로 찾지 못하고 버지니아 식민지에서는 담배 재배가 이땅에 적합한 것을 발견하고 토양에 맞는 담배종자를 찾아 재배에 성공해 영국으로 수출하는 기회를 잡는다.
담배제배에 인력이 필요하니 처음 영국에 계약직 일꾼들을 데려왔으나 한 네델란드선박은 카리브해에서 식량과 선박을 수리한 댓가로 흑인20명을 받아 와 제임스 타운에 내려 놓았다. 이들 같은 경우 고용인과 노예의 애매한 신분을 유지하다가 결국 1661년 메릴랜드 식민지는 노예 제도를 인정한다. 가장 인권적인 나라를 세워야 할 미국에서 인디안의 불이익과 노예제도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오욕으로 남는다. 이 시기에 식민지 최초의 대학인 하바드, 예일, 프린스턴 대학이 생기며 언론, 교육, 우편제도, 도로건설 등으로 영국의 복사판이 아메리카에서 시행되며 한 강대국을 태동시키는 정체성이 만들어 지기 시작한다. (4.14.2020)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2 회 : 미국 건국의 아버지 죠지 워싱톤
영국과 프랑스는 과거 영원한 적수였다.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공교롭게도 멀리 떨어진 식민지에서도 양편의 전쟁이 벌어지곤했다. 유럽에서 당시 7년전쟁이라 부르는 영국,프랑스 사이의 전쟁중 식민지인 아메리카에서도 프랑스-인디안 동맹으로 오대호 주변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영국군과 싸웠다. 결국승리는 영국으로 돌아가고 1763년 파리조약을 통해 프랑스가 일찍부터 식민지로 개척했던 퀘백지역을 포함한 오늘날 캐나다 동북부지역을 영국에 돌려 주어야 했다. 그러나 영국의 승리는 상쳐뿐인 영광이 되었다.
영국은 오랜동안 전쟁을 치르느라 국가적으로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영국국민도 더 이상 세금을 낼 수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때 영국 정부가 생각해 낸것이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세금 부과 였다. 먼져 설탕과 직물, 차 등에 세금을 부과하고 지폐사용을 금지하며 금화, 은화만을 사용하게 하는데 주민들은 크게 반발 했다. 유리, 종이, 납, 페인트 수입품의 세금확대에 반발해 시위대가 생기고 13개주 대표들은 영국의 식민지 탄압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보스톤에서는 차의 수입세에 항의하는 목적으로 항구에 정박된 배에 실려있는 차를 모두 강물에 버리는 사건이 일어 났다. 영국상품 불매운동이 벌어지며 조직적인 시위대가 지역마다 등장했다.
영국은 식민지의 불법적인 행동에 강력히 대쳐하고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더 많은 군대를 보냈다. 1775년 4월19일 영국군과 메사츄세스 민병대는 보스턴 근쳐 랙싱톤과 콩코드에서 첫 총성이 울리며 전투를 벌렸다. 첫 전투이후 모인 제2회 대표들은 임시정부수립을 선포하고 군수품을 마련하기 위해 화폐를 발행하고 메사추세스 민병대를 토대로 대륙군을 창설하고 사령관으로는 만장일치로 죠지 와싱톤을 임명했다. 이제 독립에 대한 확신이 서게 된 대륙회의 대표들은 토마스 제퍼슨에게 독립 선언서를 준비하게하고 수정을 거쳐 1776년 7월4일 세계에 공표하게 된다.
근대 세계사에 큰 영향을 끼친 문서중 하나인 독립선언서는 인간의평등, 기본적 인권, 인민의 동의에 입각한 정부조직, 혁명권 등을 분명하게 밝힌다. 와싱톤이 이끄는 정규군은 수적인 면에 보잘 것 없지만 지역마다 지원한 민병대의 힘을 얻어 뉴욕주 북부 세라토가에서 대승을 거둠으로 양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탁월한 워싱톤의 지략과 함께 프랑스군의 도움까지 받아 영국군은 결국 1781년10월19일 요크타운에서 항복하고 말았다. 2년후 파리조약을 통해 무조건적 독립을 승인받았고 캐나다 국경아래, 미시시피강 경계를 미국의 영토로 인정받았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3회 : 영토를 2배로 늘린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
독립선언을 먼져하고 영국과 전쟁을 치루고 얻은 미국의 초기 정부는 13개 정부가 단합해야하고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구성하는데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연방정부가 구성되고 지역 인구 수에 맞는 하원과 각주에 동일하게 2명의 상원의원제가 채택 되었다. 헌법에 기초해 대통령제가 시작되며 초대 대통령에 “죠지 워싱톤”이 선택된다. “ 워싱톤”장군은 전쟁후 시골로 돌아 갈 생각이었는데 국민의 부름에 응해 임시 수도인 뉴욕에서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자신이 하는일이 앞으로의 국사에 중대한 영향력이 있게 됨을 의식하며 매우 침착하고 소신있게 원칙에 입각해 행동했다.
초대 국무장관 재퍼슨은 농장주의 아들로 부유한 배경의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미국의 산업적 미래를 농업에 두어야하고 민중에 기반을 둔 민주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화파). 한편 재무장관을 맏은 헤밀턴은 영국령 서인도제도의 한 적은 섬 출신으로 미국의 장래는 상공업에 토대를 둔 사회를 만들어야 하며 정치적으로는 질서, 권위, 규율을 강조하고 보통사람들이 정치 참여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연방파). 헤밀턴은 전쟁으로 인한 빚을 국가채권을 발행함으로 충당하고 은행을 설립하며 제조업을 발전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두세력이 대립하는 정치적 파당이 행정부 안에 일찍부터 존재하게 되었다.
두번의 임기를 잘 마친 죠지 워싱턴은 세번째 출마를 사양하고 양당 그룹의 극한대립을 피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시골로 돌아갔다. 두번째 대통령엔 “죤 아담스”가 당선되고 세번째 대통령은 “토마스 제퍼슨”이 새로이 정한 워싱톤시에서 취임한다. 당시는 프랑스 나폴레옹이 영국과 전쟁을 벌리고 있는 시기였는데 미국은 이들의 전쟁에 중립을 지켰다. 미국은 두 나라를 상대로 무역으로 재미를 잘 보았는데 영국은 가끔 미국의 상선을 나포해 선원들을 영국군함에 일하게 하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 미국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이런 일을 막기위해 외국으로의 출항금지법도 만들었지만 효과가 적었고 이런 이유들이 나중 영국과 미국이 다시 충돌하는 원인이 되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온”은 알프스 산맥에서 뛰어난 용장이지만 세계를 보는 눈은 없었나 보다. 당시 루이지아나 땅은 현재의 루이지아나주와 미시시피강 서쪽의 방대한 땅을 말하며 프랑스가 주인이었다. 미국은 늘어나는 인구와 정치적 안목으로 루이지아나 땅을 매입 할 수있을지 알기위해 프랑스에 사신을 보냈는데 프랑스는 아예 플로리다까지 합해 단돈 1500만 달러에 사가라는 놀라운 오퍼를 제시했다. 나폴레온이 미국에 와 보지 않은 실책(?) 이었다. (용맹스런 나폴레옹이 미국을 일찍 알았다면 유럽의 프랑스를 포기 하더라도 아메리카는 뉴 프랑스라는 이름으로 지켰을 것이다. 그러나 겨우 지킨 건 뉴 올리언스 적은 땅이다. 엘바 섬에서 쓸쓸히 사라지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미국은 당장 구매조약에 서명하고 한순간에 헐값으로 영토가 2배나 넓어짐을 축하했다. 이제는 유럽에 신경을 쓸 필요없이 광활한 땅을 즐기면 되는 시대가 왔다. 제퍼슨 대통령은 비밀리에 40명의 탐험대를 보내 미주리주에서 태평양으로 이르는 지역을 탐사하도록 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4회 : 진정한 민주주의의 기초를 다진 앤드루 잭슨 대통령
1812년 무모한 군사적 모험이었던 미영전쟁의 원인은 해상에서 미국에 대한 중립권 침해였다. 미국의 독립과 명예를 지키고 영국의 카나다땅까지 미국이 차지해야 된다는 호전주의자들의 주장으로 싸웠지만 전쟁을 반대하는 북부 5개주는 연방 탈퇴까지 주장하며 반대했다. 전쟁은 양국의 합의로 조약이 체결 됫는데도 더딘 통신수단의 결과 이미 종전이 서약으로 됬는데도 마지막 전투는 뉴 올리언스에서 치뤄 졌는데 앤드루 잭슨 장군의 지휘아래 미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몬로 대통령 재직시에는 남미의 스페인 식민지가 하나하나 독립하게 되면서 유럽의 열강들은 신생 독립국을 간섭 하지 말 것과 미국은 유럽이 보유하고 있는 기존 식민지나 신생 독립국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골자로 한 “몬로 주의”를 제창한다. 당시에는 미국이 강력한 군사력이 없어서 이런 선언이 그져 말에 그쳤지만 1차 대전까지 미국의 대외정책이 되었다. 평범하고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가기를 원했던 앤드루 잭슨 대통령 (20불 화폐 얼굴) 은 독점을 반대하고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변화가 정부가 임명하는 관직이 줄고 주민이 직접 뽑는 선출직 관리가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1830년대 미국인이 미시시피강을 넘어 서부로 개척을 시작할 때 큰 걸림돌은 인디언이었다. 하지만 백인들은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우세한 무기를 앞세워 그들의 땅을 침범하고 몰아냈다. 무력으로 때로는 감언이설로 불평등 조약에 서명시키고 는 토지를 잃게 만들었다. 동부에서는 구하기 힘든 모피 사냥꾼들이 먼져 서부로 오는 길을 닦았다. 오레곤 통로, 캔사스 통로, 뉴멕시코 통로 등으로 서부개척을 갈구하는 개척민들이 포장마차에 가족을 실고 줄지어 갔다. 때 맞추어 새크라멘토 인근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노다지를 찾는 황금열풍으로 샌프란시코 도시가 형성 되었다.
서부개척자들이 남쪽 산타페 통로로 이동하다가 남쪽으로 더 내려가 당시 멕시코땅인 택사스에 정착해 1836년 공화국을 세우고 독립을 선포했다. 이에 멕시코의 산타아나 대통령이 직접 출정해 알라모 전투에서 미국인을 전멸 시켰다. 이에 미국인들은 샘 휴스턴 장군의 지휘하에 맥시코군을
맞아 승리를 거두어 리오 그란데강 넘어로 국경을 정하게 되었다. 택사스 공화국을 미국에 합병 시키고 이 소식이 멕시코에 전해져 전쟁이 시작되었으나 1848년 과달루페 조약을 통해 오늘날의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에리조나, 뉴 맥시코, 콜로라도, 와이오밍에 해당하는 방대한 땅은 미국영토로 확보하게 된다. 괜시리 건드려 있는것 까지 빼앗기니 감히 미국을 넘 보는 자는 없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5 회 : 산업 혁명의 북부 11주와 노예제도의 남부 11개주
드넓은 평원을 가르는 신설도로와 조건에 맞는 운하건설로 크고 작은 도시들이 형성 되는 시대에 철도건설은 앞날에 산업화를 예상해 너무도 필요했다. 교통혁명은 동부의 상공업 지대와 서부의 농업지대를 긴밀하게 연결하는 시대가 요구하는 대장정이었다. 1850년대 산업은 가정이나 적은 수공업시대에서 산업화 와 함께 공장운영의 시대와 주식회사 시대가 열렸다. 연방정부의 주도로 병기, 기계부품제작, 선반, 절착기 등의 산업화에 필요한 제품들의 다양한 기술 제품들이 줄을 이어 생산되었다. 이시대의 대표적 아이팀은 재봉틀이었다.
북부와 마찬가지로 남부에서도 19세기 중반에 남부농업의 생산성이 높아졌다. 사탕수수, 쌀, 담배, 면화 등의 황금작물을 재배함으로 국제무역의 주요세력으로 등장했다. 영국의 산업화로 면방직 산업이 활발해지자 면화의 수요가 엄청나 노예제 폐지는 커녕 더 많은 노예가 필요했다. 사실 아무집이나 노예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남부의 농장주들이 정치, 경제, 사회를 지배했기 때문에 이들이 거느린 노예제도가 남부에 만연했고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문제로 대두 되었다. 노예는 재산소유나 학업이 법적으로 금지되고 인격의 대접을 받을 수 없고 단지 가격으로 사고 파는 매물에 불과했다.
노예제의 비참한 현실을 노예제가 없던 인도주의적인 북부인들에게는 분노의 대상이었다. 노예제는 미국 독립이념에도 어긋나는 비인도적인 일이므로 북부에서는 노예를 사서 풀어주거나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운동도 벌어졌다. 북부에는 약 25만명의 자유흑인이 있었다. 이들의 사회적인 지위나 경제력은 없었지만 같은 흑인으로 이 제도를 없애자는 운동에 간접적으로 동참했다. 새로 생겨나는 중부의 캔사스, 네브라스카 주들이 연방 가입을 준비할때 노예제 찬, 반으로 치열한 논쟁을 벌리는등, 남부와 북부의 노예제에 관한 문제는 후에 전쟁을 가져 올 만큼 극심한 대립을 가져왔다.
남부의 노예들도 지나친 농장주들의 혹사에 반발하여 그룹으로 저항한 사례가 많다. 그럴때마다 지방정부는 농장주편에서서 시위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하고 이후 더욱 가혹한 형벌이 농장주 들에 의해 가해져 악순환이 계속되며 문제는 커져만 갔다. 북부인들을 중심으로 노예를 구출하기 위한 그룹들이 활동하게 되고 노예가 도망을 가더라도 지방의 지리를 잘 모르고 신분증도 없어 곧바로 잡히는 어려움에 도움이 되는 사례도 많아졌다. 밤을 이용해 길을 안내해 북부 도시까지 구출해 주는 인원이 1810년에서 1850년까지 비공식 통계가 3만에서 10만을 헤아렸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6 회 :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과 미국의 남북전쟁
남부의 노예제로 민감한 시기에 1860년 대통령선거에 노예제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은 링컨이 당선되자 남부인들은 이제 올 것이 왔다며 연방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연합국가를 만드는데 힘을 뫃았다. 그해 12월 사우스 캐로라이나주를 시작으로 미시시피, 푸로리다, 앨라바마, 죠지아, 루이지아나, 택사스 등 7개주가 연방에서 탈퇴했다. 이들은 미시시피 출신 제퍼슨 데이비스를 새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연방정부의 무기고, 요세등을 접수했다. 그러나 사우스 캐로리나주의 찰스턴 항구인근의 섬터요세(Fort Sumter)가 항복을 거부하고 반항하자 남부 연합군은 포격을 가했고 미국은 동족간의 피비린내나는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버지니아, 알칸소, 테네시, 노스 캐로리나가 합류해 11개주가 남부연합이 되었고 노예주이면서도 남부에 동조하지 않고 연방에 그대로 남은 주도 4개나 되었다. 전쟁초 북부는 물질적인 자원면에서나 인구면에서 우세했다. 철도망도 잘되어 물자보급에도 우위였다. 그러나 남부는 우수한 장교단과 고향을 지키려는 굳은 의지로 무장한 병사들이 있었다. 전쟁은 주로 남부에서 치루어져 지형지물에 익숙했고 지역주민들의 도움도 남부군에게 이점이 되었다.
신앙의 자유와 가난을 면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 이민대열로 만들어진 미국은 건국 100년만에 이민자의 후손들은 땅 욕심도 , 이념대립도 아닌 자존심 세우기위한 동족상쟁의 비극은 시작되고 있었다. 전쟁은 4년간이나 지속되었고 소규모 전투에서 밀고 당기는 1진 1패의 전투가 지속되었다. 서부전선에서 여러번의 남부 승리도 있었지만 남북전쟁의 분수령이 된 게티스버그에서 3일동안 맞붙어 싸웠다. 수많은 전사자를 속출하며 여기서 북군의 승리로 남군은 퇴각했다. 게티스버그에 국립묘지를 만들고 추모연설이 바로 유명한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정부”라는 링컨의 개티즈버그 연설이다. 얼마후 리치몬드, 와 피터즈버그에서 다시 붙은 전투에서 남부의 로버트 리 장군이 북군의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할 당시 까지 전사자는 61만명에 달했다.
처참하게 무너진 남부의 재건과 전쟁이 할퀴고 간 남북의 정신적 상처를 회복하는 힘든 시기를 맞이했다. 링컨은 남부인들의 잘못을 너그럽게 다루기를 원 했고 노예는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돈도 기술도 없는 흑인들의 신분은 해방이 되었지만 예전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흑인 단속법, 신분증, 통금제도 등의 제도적 장치를 북부는 지지하지 않았다. 전후 재건에 힘써야 할 중요한 시기에 링컨의 2차임기 42일째 되는 날 워싱톤에 있는 포드 극장에서 연극을 보던중 남부연합의 한 지지자로 부터 총격을 받고 링컨 대통령은 사망한다. 따라서 재건 당시의 정책은 고스란히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앤드루 죤슨으로 넘어가며 대부분 링컨이 하려고 했던 방향으로 추진된다. 세계인의 가슴에 세계진 큰 이름 “링컨”은 워싱톤의 링컨 기념관, Rushmore 큰 바위얼굴의 4번째 석상을 비롯해 수많은 도시이름, 거리이름의 링컨을 기억하며 미국의 자유와 인권을 지키는 후대의 이정표가 되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7 회 : 남부 재건과 흔들리는 흑인들의 지위
해방된 흑인들에게 처음부터 그들이 노예시절 했던 노동에 대한 보상은 주어지지 않았다. 독립된 땅에서 농사 짓길 원 했지만 그들은 땅을 살 돈이 없었다. 백인 농장주들은 그들에게 따로의 소작농도 주지 않았다. 결국 흑인들은 백인 농장주의 소작농이 되어 복잡한 계약 조건 아래 이전의 노예상태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백인 우월주의 KKK 단의 활동도 이때 부터 서서히 고개를 들고 흑백간의 차별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 짐 크로 법” 시대가 열린다.
남부 흑인들은 백인들이 생각해낸 교묘한 방법에 의해 투표권을 빼았겼다. 투표권을 갖기 위해 문자 해득능력이나 이해력 테스트를 한다거나 하는 흑인에게 불리한 조건들이었다. 남부에는 백인도 무식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남북전쟁 전 투표권이 있으면 자손도 자연 투표권을 인정받는 좀 야비한 방법들도 등장했다. 아무튼 당시 흑인의 투표권을 빼앗음은 물론 흑인과 백인은 차도 같이 탈 수없고 극장, 여관, 식당, 화장실도 흑백으로 분리 되었으며 흑인들은 해변, 공원, 소풍 장소등에 들어 갈 수 없었다. 1896년 연방 대법원은 각종시설을 분리하되 평등하면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분리하되 평등하면 된다.” 기막힌 판결이다.
1876년 치룬 선거에서 민주당의 틸튼 후보는 25만표을 앞질렀으나 대의원표에서 1표차이로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상대 헤이즈 후보는 당선을 인정하는 대신 공화당으로 부터 남부의 철도건설, 내륙개발에 연방정부자금을 투입해 줄 것을 약속 받았다. 또한 그때까지 루이지아나, 플로리다, 사우스 캘로라이나 의 3개주에 남아있는 연방군을 철수 하고 적극적으로 남부를 개발해 남북전쟁 전 만큼의 회복을 가져왔다. 특히 두드러지게 발달한 분야는 방직공업, 답배제조, 제철 산업, 철도 건설이었다. 그러나 농업위주의 남부 산업은 제조, 은행, 무역 등 자본면에서 북부를 따라 갈 수 없었다.
남북전쟁 당시의 애정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흑백사회를 잘 조명하고 크락 케이블, 비비안리 등의 연기는 영원히 잊지 못할 장면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아틀란타에 가면 이 영화 원작자 마가렛 미첼의 집은 관광코스가 되어있다. 영화 “글로리(Glory)”는 미국 최초의 흑인 부대를 영화화 한 것이다. 남북 전쟁 발발전 북부 메사추세스 자유흑인으로 구성된 흑인부대가 있었다. 제54 지원병 보병연대 였는데 지휘관은 백인이었지만 노예페지를 주장하는 북부 편에 서서 1863년 7월18일 사우스 캐로라이나 촬스톤 인근 남부군 요새 “와그너”에 용맹스런 공격을 감행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투에 참전한 600명의 병사중 지휘관 을 포함한 116명이 전사했고 156명이 부상당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8 회 : 19세기 후반 산업의 발전과 해외팽창
19세기 중반에 중서부의 광활한 땅에 철도를 놓고 국유지를 개발자들에게 매각하는 사업으로 인구의 분산은 물론 산업발전에 크게 기여 했다. 네브라스카 오마하에서 출발한 유니온 퍼시픽 철도회사가 새크라멘토에서 반대 쪽으로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의 공사와 1869년 봄 유타의 프로멘테리 포인트에서 만나므로 서부개척의 첨병이 되는 꿈의 대륙횡단 철도가 연결되었다. 정부는 좋은 조건의 국유지 매입을 권유하며 서부로의 진출을 장려하고 광산개발에도 박차를 가해 황금러시의 서부개척 시대를 열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10년동안 5억5000만달러의 금을 캐낸뒤 막을 내렸고 그 뒤 코로라도, 다코다주에서 조금씩 금이 발견되었지만 노다지의 열풍은 더 이상 가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에 많은 백인들이 대서부에 정착했지만 그곳이 빈땅은 아니었다. 남북전쟁당시 30만에 달했던 인디안들중 20만은 중서부에 둥지를 틀고 들소 사냥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정부는 인디안들과 마찰을 피하려 지역을 정해 옮겨 농사를 권유하지만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는 인디안들은 자주 불만을 토로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인디언 보호구역 정책에 항의해 미네소타주에서는 반란으로 700명의 백인이 살해 당하는 일이 생기므로 정부의 인디안 대응책이 강력해 지기 시작했다. 코로라도에서도 인디안 200명이 학살 당하는 일도 벌어졌고 다코타에서 전쟁만큼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결과는 결국 대 학살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뒤 그들의 문화와 풍습을 살리려는 입법움직임이 있었으나 그것은 너무 늦은 계획이 되었다.
19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에 이룩한 미국의 산업발전은 20세기 초에 미국을 이미 세계 최고의 산업국가로 탈바꿈 시켰다. 그것은 풍부한 원료, 충분한 노동력, 놀라운 기술혁신, 창조적인 기업가들, 그리고 기업성장에 저극적인 연방정부, 거대한 시장이 작용했다. 특히 생활에 편리함을 가져다 주는 발명의 탁월한 재능이 도처에서 이루어졌다. 그래함 벨이 발명한 전화, 타자기, 금전 등록기, 계산기, 등은 생활을 바꿔 놓았다. 토마스 에디슨의 전기 발명, 강철, 석유, 비행기, 자동차 등이 개발되었다.
20세기 들어서 거리를 달리는 전차, 고층빌딩의 에레베이터 등이 발명되어 건축물들도 다양하고 크게 지어졌다. 미네소타, 앨라바마 주의 풍부한 철광석 생산지가 많아 철강산업이 활발하게 발달 했다. 사람들은 처음 냇가나 샘물에 스며나오는 검고 미끄러운 액체가 무었인지 알지 못했다. 19세기 중반에 그것이 석유라는 에너지의 원료인것이 밝혀지며 내연기관, 자동차 원료로 사용 되기 시작 했다. 미국 전역에 유전이 개발되고 최초의 휴발유 자동차가 나오면서 차동차왕 포드는 일관 작업공정 즉 “어샘불리 라인”을 이용해 많은 생산품들이 시간을 단축 하고 일시에 같은 생산품을 다량으로 저렴하게 생산하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예로 1895년 경 4대가 고작이던 자동차가 1917년엔 거의 500만대로 증가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9 회 : 과학적 경영의 독점 기업과 노동조합의 탄생
포드가 고안한 대량생산 기법에 맞춰 기술 혁신 산업이 발달하면서 분야별로 주식회사가 설립되고 재벌기업들이 탄생하며 부의 독과점이 시작되었다. 철도, 철강, 석유 산업분야가 두드러졌는데 철도기업 연합엔 밴더빌드, 제임스 힐등의 거물이 주도하고 철강에는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가 광산에서 부터 생산 판매까지 전과정을 지배했다. 석유 산업 분야의 죤 록펠러는 스텐다드 정유 회사를 운영하면서 관련산업을 주식회사로 묶어 전국적으로 40여개 회사를 거느리는 석유왕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20세기 초 전체 인구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국가 부의 88%를 차지하면서 빈부의 격차가 심해 졌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 미국 노동자들은 조합을 만들고 파업을 비롯한 개선 운동도 했지만 정부는 기업가들의 편을 들어 실질적인 소득은 없었다. 농사를 짓던 저소득 시민들은 대도시로의 이동이 이어지고 대도시는 빈부가 공존하는 면모를 보여주게 된다. 노동자 계급을 벗어난 사무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증가로 중간계급의 “블루칼라” 층이 두텁게 만들어진다. 기업의 대량생산, 새로운 판매 방식으로 집에서 옷을 만들 필요가 없어지고 백화점 등장, 깡통의 발명으로 식사류도 대량생산 소비 형태가 되고 냉장, 철도, 화물이 아이스박스 포장품을 멀리 운송해 미국인의 식단은 다양하고 풍성해졌다.
19세기 말, 생산기술의 발달과 소득상승에 따른 여가 시간의 증대는 또 다른 여유로운 시간들을 즐기는 문화가 탄생한다. 운동경기 관람 문화는 야구, 미식축구, 농구 경기가 시작되어 많은 인기를 누리는 시대가 찾아왔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기술과 많은 과학적 지식이 필요로 했다. 많은 대학, 직업학교가 탄생하고 무상 초등 및 중등 교육이 제도화 되었다. 산업 제벌들도 대학에 돈을 기부하거나 자신의 이름으로 사학을 만들어 교육에 힘을 더 했다. “죤 홉킨스” “코넬” “스탠포드”, 같은 명문 사립대학 이 생겼고 “웰스리” “스미스 “ 등 의 전문 사립여자 대학도 세워졌다.
미국은 건국 초 부터 팽창주의 국가였다. 땅을 사거나 전쟁으로 빼앗아 영토를 넓이는 일은 미국의 운명으로 생각했다. 19세기 후반 알라스카를 사들여 오늘날 정치적 경제적 요지를 확보했다. 1896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겨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전쟁중 하와이도 원주민 여왕을 퇴위 시키고 미국 정부에 합병되었다. 거대한 시장인 중국에도 눈독을 드려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동등한 조건으로 무역을 하자고 제안했다. 중남미 국가에는 질서를 유지 한다는 명목아래 해병대 파견, 민병대교육, 선거과정 운영 등을 통해 깊숙히 관여했다. 이것은 미국의 안보와 번영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10 회 :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개혁과 자연보호 정책
42세의 젊은 나이로 26대 대통령을 지낸 테드 루스벨트는 어릴때 몸이 많이 약했다. 그래도 아버지의 노력으로 건강을 찾고 하버드 재학시절 운동부에서 뛰기도 했는데 지도교사가 “ 테드는 심장이 약하니 무리한 운동이나 스트레스 받는 일은 하지 않아야 오래 산다” 고 얘기하자 태드는 “ 전 조심조심 살 생각이 없읍니다. 무의미하게 장수해서 뭐 합니까, 죽을때 후회 없도록 하고 싶은 일 하다가 죽게 되면 죽는거죠, 뭐!”라고 대답했다. 학생때의 대답처럼 일생을 정계에서 정의로운 일과 개혁하는 일에 메달리고 산림보호 국립공원 지정 등 자연을 사랑하는 일로 열심을 다해 생애를 보낸 인물이다. 러시모어 산 큰바위 얼굴의 세번째 조각인물로 세겨져 있다.
뉴욕주 경찰청장, 주지사를 지내면서 인맥과 연줄로 채용된 공직자들의 비리를 척결하고 공무원 공개채용 등으로 제도개혁을 추진했다. 부통령에 당선된 후엔 부통령의 실권이 별로 없음을 달가워 하지 않다가 메켄리 대통령 암살사건으로 대통령직을 맡는다. 소수기업의 독과점의 규제, 철도 등의 통제, 수입관세의 삭감 등으로 정적을 많이 만들었으나 관여치 않고 하고자 한 일은 소신있게 개선해 나갔다. 이후 7년동안 미국 국내산업 분야를 독과점 하던 43개 기업을 제소했다. 유럽열강들의 아메리카 개입을 차단하고 콜롬비아 령이었던 파나마와 운하건설로 갈등 하던 중 파나마의 독립을 유도해 좋은 조건의 파나마운하를 건설한다.
국내적으로 어려운 경제, 노동문제 해결에 힘썼으며 외교에는 중남미 적극진출, 베네쥬엘라 카리브해 문제해결, 러일전쟁의 종식으로 강화조약 주선, 모르코 문제 해결을 알선하여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산림청 권한을 강화해 전 지역 2천여개의 댐 건설사업을 전면 백지화 하기도 했다. 상하원 양당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정한 식품의약 규제법은 후일 소고기 검사 법령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급격한 산림개발로 자연이 훼손하는 것을 막기위해 국유림으로 전환 시키는 법의 근거를 만들었다.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를 만들고 캘리포니아 요세밑 공원 자연 보호에도 힘썻다.
임기를 마치고 친구인 하워드 태프트를 대통령에 당선 시켰으나 그의 정책과 방향에 실망이생겨 야인생활을 마치고 다음번 태프트와 공화당내 경선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공화당을 탈당하고 진보당을 창당해 조직하고 대통령 경선에 나섰으나 우드로 윌슨에게 패한다. 선거운동중 저격도 당했지만 연설문 종이뭉치때문에 생명을 구했고 1차세계 대전에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지원병 사단을 이끌고 참전하겠다고 했으나 윌슨에 의해 거절 당했고 실제 그의 아들은 대전에 참전해 목숨을 잃었다. 다음 대통령선거에도 도전 할 계획을 가지고 집필활동 등에 메달렸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하고 퇴원하면서 60세에 파란 많고 불꽂같은 생애를 마감한다. 뉴욕주의 루즈벨트 기념관안에 영면해 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11 회 : 제 1 차 세계대전 발발과 미국의 개입
1914년 유럽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페르디난도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암살 당한 것을 계기로 독일, 오스트-항가리, 내중에 터키, 불가리아 가 가세한 동맹국 측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나중 일본, 이탈리아가 포함된 연합국 측 사이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아직도 미국은 개혁 후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를 위협하고 경제도 침체국면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이 전쟁에 대해 중립을 선언했다. 윌슨 행정부는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하고 모든 나라는 세계평화를 위해 서로 간섭 않는 자유시장, 자본주의, 입헌주의를 취 할 것을 구상했다.
미국은 영국, 프랑스 등과 무역관계가 원활했고 독일과는 소원했기 때문에 독일은 미국을 중립국으로 보지 않았다. 영국, 프랑스는 미국이 참여해 줄 것을 은근히 바랬다. 이때 미국에서 영국으로 출발한 여객선은 1200명의 승객과 다량의 탄약과 식량을 실었는데 독일은 잠수함 작전으로 아일랜드 해안을 지날때 격침 시켜 버렸다. 더욱 미국의 참전을 부축인 것은 독일이 멕시코공사에게 보내는 비밀전문을 가로채 번역한 결과” 멕시코가 독일과 군사동맹을 맺으면 미국에게 빼앗긴 땅을 찾게 하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미국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젊은이의 징집이 시작되고 480만명이 군복무를 했고 이중 200만명이 프랑스 전선에서 싸웠다. 남부의 정치가들은 흑인이 군인이 되는것을 우려 했지만 인적자원이 필요해 관계없이 모집했다. 군에서도 흑백 차별은 여전 했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들은 흑인에게 맡겨 졌다. 19개월동안 지속된 전쟁에 5만1000명이 전사하고 23만명이 부상 당했다. 더 심각한 피해는 1918년 당시 창궐한 인플루엔자로 사망한 미국인이 55만명에 달했고 그중 미군 피해자 만도 6만2000명이었다.
그럼에도 세계대전 승패의 결정은 미국의 군대와 물자였다. 미국의 뒤늦은 참전은 연합국측에 인적, 물적자원에 새로운 활력을 넣어 1918년 11월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윌슨대통령은 14개 항을 교전양측에 평화협정으로 받을 것을 촉구하고 모든민족이 민족 자결주의에 의해 유럽이나 강대국에 속해 있는 나라들이 영토수정을 하기를 촉구했다. 항구적인 평화를 지키기 위해 국제 연맹기구를 창설 할 것도 주장했다. 당시 미국은 전체 생산량의 4분의 1을 전쟁에 소비되었으며 농민들도 호경기를 맞아 농경지 확대 생산양을 늘리고 산업부문에서도 같은 결과로 국민 총생산은 급격히 증가 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12 회: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도덕주의와 이상주의
전쟁이 연합국측 승리로 끝난 후 윌슨 (민주당)은 파리평화 회담에 참석해 자신의 이상주의를 실현하기로 마음먹고 미국 대통령으로 서는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파리에 가서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당시 의회는 상하의원을 공화당이 모두 차지해 어떤 조약도 의회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미국을 제외한 승전국들은 회담에 패전국 독일의 참석도 막고 가혹한 보복조치를 취 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시점에 평화적 제의를 하러가는 꼴이 되었다. 결국 미국을 제외한 승전국들은 독일에 막대한 금액의 배상금을 요구했다.
윌슨은 파리회담에서 식민지의 독립과 민족자결의 원칙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것도 패전국의 그늘에 있는 나라들의 이야기이지 승전국의 입장에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 항가리, 유고, 체코로 독립했고 폴란드도 러시아로 부터 독립했다. 핀란드, 라투비아 등의 완충국들도 독립했다. 윌슨은 회담에서 국제연맹의 창설을 주장해 설득력을 얻고 돌아 왔으나 의회 양당의 반대에 부딛쳤다. 국제연맹이 가맹국의 내정에 간섭 할 수 있다는게 반대 이유 였다. 그래도 이 안을 상원에 제출하고 국민을 설득하기위해 유세에 나섰다가 코로라도주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좌반신 마비가 된다.
국제적 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세계평화를 위해 창안해 낸 윌슨의 국제연맹 계획은 아이러니칼 하게도 주창자의 나라에서 비준이 거부되고 말았다. 결국 독일과의 공식적인 전쟁종결은 1921년 하딩 대통령 시절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이루어졌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많은 약소국 식민지들에게 한가닥 희망을 주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유학시절 윌슨가정에 초대를 받은 일화도 있다. 인도차이나에서는 호지민이, 인도에서는 마하드마 간디가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수용해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독일은 승전국의 가혹한 요구에 분개했고 관련국들 모두 전쟁채무, 배상금 문제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전의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바뀌고 세계의 주도적인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13 회 : 번영의 1920년대 그리고 대 공황의 시작
종전후 일시적인 경제불황이 있었지만 1922년부터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한 경제는 대부분의 경제분야에서 번영의 20년대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미국의 산업생산은 거의 2배로 증가했다. 여기엔 전기 모터가 크게 기여했다. 전기 동력과 일관작업 공정에 힘입어 공장에서는 생산을 다양하게 증대 시켰고 제조업과 써비스업의 확대는 더 많은 이윤과 더 많은 임금을 보장해 주었다. 임금을 받게 된 노동자는 기업들이 새로이 도입한 외상 할부 판매계획에 매료되어 새로운 소비주의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많은 기업들이 생산, 판매, 배송 심지어 금융까지 지배했다.
자동차는 75년전 철도가 끼친 영향만큼 미국의 경제생활 전역에 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 자동차 등록 대수는 800만대에서 2300만대로 증가했고 대량생산의 결과 갸격이 하락해 노동계층에도 자동차를 소유 할 수 있게 되어 자동차는 사회적 평등화를 가져다 주었다. 공장 노동자의 년 수입이 1200불, 사무직이 2300불 이었을때 포드 자동차의 모델 T는 300불이었다. 자동차와 관련해 고속도로 건설과 전국도로망이 개선 되어지고 석유 산업이 크게 발전했다. 고무와 강철 산업도 더불어 발전했다.
상품 써비스의 발전과 함께 광고 산업이 등장하고 광고로 인해 소비자들은 이전보다 상품소비에 큰 매력을 갖게 되었다. 일간 신문이 전국적인 보급망을 가진 체인으로 흡수되면서 대량 유통되는 잡지로 미국 전역의 독자들은 문화 충격으로 닦아 왔다. 때맞추어 통신과 대중매체의 총아가 탄생 한 것은 “라디오”의 출현이다. 1922년 전국 508개의 상업적 방송국이 산재해 있었으나 1927년 기존 라디오 방송국을 네트워크로 한데뫃아 설립한 NBC 라디오 방송국의 한시간 짜리 쇼 프로그램의 광고료는 1만달러를 호가 했다.
1920년대 미국인들은 레크레이션에 탐욕 스럽다고 할 정도로 갈증을 느꼈고 사업가들은 발빠르게 반응을 보였다. 영화 산업이 시작되면서 국민들은 환호했고 유성영화, 스펙타클한 영화, 천연색 영화가 인기 절정에 올랐다. “십계” , “왕중왕” 등의 대작들이 선 보이고 코미디 영화는 인생이나 사회의 날카로운 풍자로 관객의 호기심을 사로 잡았다. 운동경기도 매년 수천만명이 경기를 보기 위해 경기장에 몰려들었다. 야구는 그중 인기 종목 이었고 이미 아메리칸 리그와 네셔날 리그가 나눠 경기를 펼치는데 홈런이 관중을 매료 시키다는 것을 알고 홈런이 잘 날 수있는 공을 새로 디자인 하기도 했다. 스포츠계의 스타, 은박의 스타들이 대중들의 영웅이 되기 시작하는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14 회 : 31대 후버 대통령과 최악의 대 공황
1928년 치뤄진 선거에 후버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곧 닥칠 대 공황을 예견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1920년대 번영은 경제적 기초라는 실질적인 면에서 그다지 건실 하지는 못했다. 농업, 섬유, 탄광은 주기적 경기 침체를 겪어왔고 기업의 성장과 주식가격 상승은 전체 인구에 비해 일부 계층이 누리는 부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번영이 계속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믿음은 푸로리다 등지의 도시에 광적인 부동산 투기를 불러 왔으며 주식은 실제 가격보다 높게 평가 되어 거래되고 있었다.
1929년 여름에 이르러 극소수의 사람들은 미국 경제의 건전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너무 많은 돈이 주식 투기에 몰려들고 건축 붐은 쇠퇴하고 있으며 농업분야와 같이 산업 분야에도 과잉 생산이 이루어 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돈을 빌려 투기하는 것을 막기위해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는 이자율을 올렸다. 10월에는 영국도 미국의 주식시장에 투자된 자본을 끌어 들이기 위해 이자율을 높였다. 이러한 조치는 뉴욕 증권 거래소의 주식의 투매를 불러 일으켰고 그해 10월24일 “암흑의 목요일”이라 불리는 주가 하락이 시작 되었다. 일군의 금융인들이 모여 2000만 달러를 투입해 US Steel 주식을 사들였으나 다음주 화요일 주가는 37%나 곤두 박질 쳤다.
후버 대통령은 미국의 경제가 건실하니 주가하락은 일시적 현상일 것이라고 했지만 곧이어 모든 상품과 부동산 시장이 공황의 직격탄을 맞았다. 1930년 가을에 수백만명의 실업자가 발생하고 개선의 기미는 시간이 갈 수록 보이지 않았다. 3년동안 수많은 회사가 문을 닫았고 기업의 이윤은 100억 달러에서 10억 달러로 격감했다. 국민 총 생산은 반으로 줄어들고 중소규모 은행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은행의 도산은 은행에 예금했던 사람들의 저축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1933년초 실직자 수는 전체 노동력의 4분의 1수준인 1300만명에 달했다. 가장 먼져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흑인과 미숙련 노동자였다. 수많은 실직자들이 한 조각의 빵과 스프를 얻기위해 급식소 앞에 줄을 길게 서야 했다.
1930년대의 이 암담한 시기를 소설화 한 죤 스타인 백의 “분노의 포도”는 미국 현대문학의 대표작이 되었고 플리쳐 상과 노벨 문학상을 안겨 주었다. 비참한 노동자의 삶이 잔뜩 묻어나는 이 소설은 한 가족이 살 길을 찾아 오클라호마 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겪는 이야기다. 대 지주들의 횡포로 노동의 정당한 댓가를 찾지 못하고 이농장에서 저 농장으로 방황하면서 삶에 대한 저주가 포도 송이처럼 분노로 변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에덴의 동쪽”등 수많은 작품으로 미국을 빛낸 작가 “죤 스타인백”의 문학관이 자신의 생가가 있는 캘리포니아 몬트레이 반도 “살리나스”에 서 다시 한번 당시의 작품 배경을 찾아 볼 수 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15 회 : 구제의 희망 프랭크 루스벨트 대통령
32대 프랭크 루스벨트 대통령은 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한 혈통이다. 더욱이 사촌인 남편을 가족모임에서 만나 결혼한 부인” 엘리나 루스벨트”의 본래 성도 루스벨트였다. 콜롬비아 법대 출신인 프랭크는 정계에 진출한 후 우연한 수영장 사고로 소아마비가 왔고 재활 치료에 어느정도 회복을 가져왔을때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영부인 엘리나는 유일무이하게 남편이 4번의 대통령 당선으로 12년 백악관을 지키는 동안 남편의 손과 발이 되 줌은 물론 정기적 여기자들과의 정치 브리핑 “My Day”라는 정치 칼럼을 300여개의 신문에 정기 기고하고 2차대전 동안 전투지 방문 등 미국의 “Firsy Lady”로써 내조를 넘는 지도자로 이름을 남긴다.
루스벨트대통령의 첫 과제는 경제 살리기에 메달렸다. 대학교수와 법률가로 구성된 “브레인 트러스트”를 통해서 뉴딜정책을 만들었다. 이 플랜은 구제, 부흥, 개혁을 통한 것이었고 이 일은 연방정부가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 것을 역설했다. 쓰러진 은행들을 구제를 통해 살리고 농업 부흥을 위해 과잉 생산을 억제하는 법을 만들었다. 많은 농지가 휴지기를 맞고 사육하는 가축 수를 줄이는데 보상금을 주었다. 보상금은 농산물 가공업자들에게 대한 세금으로 충당했다. 농산물 가격이 예상대로 조금씩 상승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으나 대법원은 이 농업 조정법이 위헌이라고 판결 했다. 가공 업자에게서 세금부과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실업자들을 위한 구제 방안을 마련하고 정부 사업을 확대하여 일자리를 늘렸다. 뉴딜정책은 긴축제정, 지나친 세금부과, 규제의 확대, 공공사업을 통한 적자재정 등으로 순탄치도 않았고 보수와 우파 간의 자신들의 유리한 정책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제2차 뉴딜정책에는 미국내 미개발지인 지역에 댐을 건설하여 홍수방지의 기능 뿐 아니라 전력 생산, 개간과 식목, 운하 건설등의 효과가 있으므로 비숫한 사업들이 추진 되었다. 실업자, 가난한 은퇴자들을 부축이는 무리들이 있는 것을 알고 정부가 먼져 65세 이상 은퇴자 들의 사회보장 제도, 보험가입, 실직자의 수당지급 등을 프로그램을 처음 만들어 실시했다.
미국사회에 큰 변화를 초래한 뉴딜 정책에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반대자들은 “나라 빛이 커지고 노동계로 하여금 과도한 요구를 하도록 한다” 등 이었다. 그러나 실업자 수가 조금씩 감소하고 다른 대안이 없는상태에서 루스벨트는 재선에 성공한다. 1937년 경기회복의 기미가 보이자 행정부는 정부지출의 급격한 삭감을 지시했다. 은행에 돈줄을 다시 죄기 시작하니 실업율이 또다시 올라 지표가 좋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시작하는 또다시 감도는 전운으로 국내문제에서 눈을 국외로 돌려야 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은 후세에 크게 감명을 주진 못했지만 정책에 담긴 실험주의와 실용주의로 어려운 때를 지나면서 국가 비상시에 유럽의 파시즘이나 볼세비즘 같은 극단주의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긴다. 뉴딜은 한마디로 자본주의 에 사회주의를 가미한 혼합경제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전개 되었던 것이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16 회 : 2차 대전의 발발과 독일과 일본의 세계정복 야욕
1차대전의 패전과 베르사유조약으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 하게된 독일은 유럽의 대 공황의 도래로 경제가 말이 아니었다. 이때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는 개인에 대한 국가의 우위, 독제, 권위주의, 군국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파시즘을 바탕으로 베르사이유 조약 파기와 위대한 독일 재건을 외치며 1933년 집권에 성공했다.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 라인라트”를 재점령하고, 이태리와 동맹,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여기까지 미국과 유럽이 보고 만 있자 자신이 생겨 체코에 “주데텐란트” 지역을 독일에 양보하라고 압박 했다. 영국, 프랑스 가 달랬지만 1939년 3월 체코를 점령해 버렸다. 다음 순서는 폴란드 침공이 확실 해졌다. 9월 쏘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침공 하므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 포고를 했고 그렇게 2차대전은 불붓게 되었다.
1910년 일본은 한일합방으로 대륙진출 교두보를 마련한 후 1931년 만주를 침공해 침략전쟁을 개시했다. 이때까지 만 해도 미국은 중국의 문호개방, 중국의 영토와 주권을 보장하는 9개국 조약을 국가 정책으로 삼고 일본의 행위를 비난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이 미국무기 구입이 가능하도록 중국의 전쟁선포를 발표하지 않았다. 1939년 미국은 일본과 맺은 무역조약을 파기하면서, 일본은 미국에 의존하던 석유와 전쟁에 필요한 고철같은 물자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전쟁으로 고통겪는 중국인들에게 군수물자와 대여금이 흘러 들어가면서도 미국은 일본에게 석유, 기계등의 수출을 완전 차단하지는 않았다. 유럽의 전운이 태평양으로 확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루스벨드의 뉴딜정책중 공공사업에는 새로운 함선의 건조가 포함되어있었다. 전운을 직감한 미국은 역사상 많은 국방예산을 국회에 요청했고 공군창설 예산도 포함되었다. 프랑스에 폭격기를 판매하는 것도 승인되었다. 독일은 폴란드를 점령한 후 잠시 조용한 듯 했으나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점령하며 전쟁은 확산되고 네델란드, 벨기에, 룩셈브르그, 프랑스가 독일군에 함락 되었다. 히들러는 또한 발칸 반도를 점령했으며 41년 6월에는 쏘련에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루스벨트는 위기에 처한 영국을 구하기 위해 상당한 대외원조 계획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병기고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영국을 비롯한 모든 우방이 전쟁이 끝나면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무기를 빌려 줄 수있는 무기대여법을 고안해서 의회를 통과시켰다.
히들러가 쏘련을 공격하기 직전 루스벨트는 “뉴펀들랜드” 해안의 선상에서 영국의 윈스톤 처칠 수상을 만나 대서양 헌장이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침략자들의 무장해제, 민족자결, 경제협력, 공해상에서의 자유를 지키는 것으로 당시 26개국이 서명해 국제연합 선언서를 만들었다. 그러나 침략자들에게 선언서는 휴지에 불과했다. 수억달러의 군수물자가 영국으로 수송되었고 해로를 확보하기위해 미국은 그린랜드와 아이슬랜드도 접수 했다. 독일은 영국으로 가는 수송선을 잠수함을 통해 공격하기 시작했고 미국은 독일 잠수함의 격침을 명령해 독일과의 피할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17 회 : 일본의 진주만 공격과 결국 백기를 든 두나라
미국과 독일이 해전에 돌입하기전 일본은 1940년 9월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는 다음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자 미국은 미국내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석유의 무역 단절을 결정했다. 일본은 고위회담을 제안하는 제스쳐를 취했으나 미국이 거절하자 41년 12월7일 일요일 181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하와이 제도 진주만을 기습공격했다. 불과 2시간만에 8척의 전함, 21척의 군함, 188대의 항공기를 잃고 2400명의 병사가 사망했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과 더불어 동시에 괌, 필리핀, 홍콩, 말레이 반도에 대한 공격도 감행했다.
미국은 의회의 동의를 얻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 일본의 동맹인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해서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로 연결된 세계대전의 막을 올렸다. 일본은 승승장구해 홍콩, 괌, 버마, 싱가포르, 네델란드령 동인도까지 수중으로 들어왔다. 미국은 참전 1년이 될 때까지 유럽으로 진격 할 만한 병력을 갖추지 못했다. 북 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을 도와 독일의 명장 롬멜과 싸웠고 독일의 항복을 받았다. 곧 이탈리아로 이동했으나 무소리니는 이미 처형되고 이탈리아는 연합국에 항복한다.
독일의 히들러는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했던 실수를 그대로 답습했다. 영국을 만만히 보았지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고 겨울이 오는데 소련을 공격해 많은 군력이 기후의 악조건으로 9만명이 피해를 보고 항복 했다. 전쟁이 길어 질 수록 애꿋은 유대인만 각지에서 몰살되었다. 1944년 6월6일 연합국 사령관 아이젠하워 지휘아래 프랑스의 노르만디 해안에 사상최대의 상륙작전울 감행한다. 상륙부대는 물밀듯이 프랑스로 밀고 들어가 파리를 해방 시킨다. 이 장면을 영화화 한 노르만디 상륙작전의 영화에서 그레고리 팩의 냉정한 연기가 감동이다. 연합군은 벨기에서 전투를 벌리고 승리했다. 오스트리아와 체코로 진격하고 거기서 돌아서 온 소련군과 조우하고 베르린에 들어가기 전 히틀러는 자신의 벙커에서 자살로 생애를 마감했다.
미국은 진주만 공격으로 잠시 전력을 가다듬은 다음 도쿄공격과 태평양에 퍼져있는 길고 큰 전선을 두개로 나눠 공격을 계속했다. 보급이 어려워진 일본의 잔병들은 이름도 알 수 없는 섬 깊숙히 고립되기 시작했다. 맥아더 장군은 44년10월 필리핀 상륙해 루손섬을 탈환했다. 다음해 6월에는 오키나와를 점령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항모 4척이 부서지는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의 저항은 가미가제식을 동원 하는등 만만치 않았다. 양측의 희생을 최소화 할 방법을 찾은것이 가공할 핵무기 공격이었다. 45년 8월6일 히로시마, 나카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일본은 지루한 전쟁에 무조건 항복으로 손을 들었다. 피해자만 20만명이 넘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18 회 : 미국역사상 유일무이하게 4선에 성공한 F. Roosevelt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개혁과 자연보호의 대통령으로 기억하며 24년 차이의 프랭크 루스벨트는 20년대 대 공황시대를 이끌었고 2차대전을 성공리에 수행한 대통령으로 기억한다. 게르만 민족의 영광스런 제3국 건설을 목표로 시작한 2차대전은 6년동안 60개국이 관여했고 5000만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3년8개월을 끈 태평양 전쟁도 방사능 으로 민간인 인명피해가 예상되는대도 원자폭탄 투하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전쟁의 참화는 아이러니 하게도 미국의 경제적인 공황을 잊고 슬며시 생산과 소비가 증가하는 경제강국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전을 눈앞에 둔 45년2월 미, 영, 소의 3거두 루스벨트, 처칠, 스타린은 소련의 크림반도 얄타에 뫃여 전후 문제를 협의했다. 독일에 대해서는 공동 점령관리, 무장해재, 전범처리, 배상, 영토 처리 등에 합의 했다. 아시아에 관련해서는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할 것, 사할린섬과 쿠릴열도를 소련에 양도할 것, 만주에 소련의 지배권을 인정할 것 등에 합의했다. 국제연합 창립도 합의했다. 그러나 의견 차이를 보인 것은 폴란드정부에 대해 미국은 망명중인 친서방측이 집권하기를 바랐으나 소련은 이미 폴란드를 점령한 공산정권을 옹호했다. 독일도 미국은 독일의 통일을 바랐으나 소련은 영구분단을 구상하고 있었다. 일본 패망후의 한국과 대만의 문제는 내 놓치도 못했다. 얄타회담에 참석후 돌아와 두달만에 루스벨트대통령은 뇌일혈로 갑자기 서거하고 트루먼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전후문제를 계속 처리해야 되는 연합국 입장에서 대통령의 서거는 공산세력을 배제해야 하는 숙제를 이행하는데 힘겨운 시간들이 되었다. 루스벨드 대통령의 12년 백악관 생활동안 First Lady 인 Elena Roosevelt 의 행적이 돋 보인다. 자녀를 6명이나 둔 내조자로써 정책에 깊히 관여해 루스벨드 대통령을 도와 난국에 힘이 되어준 영부인은 역사상 유일무이하다. 대통령의 시선이 소홀한 분야 또는 결정이 난해 할 때 마다 “엘리나 “부인은 남편을 도왔다. 남편의 사후 가정으로 돌아온 엘리나 영부인은 트루멘 대통령의 부름으로 국제연합에서 수년 일을 했고 이후 케네디 시대에도 같은 일을 하다가 78세로 영면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19 회 : 전후 경제적, 군사적으로 소련 봉쇄하는 미국
2차대전이 끝나면서 독일과 일본의 패망으로 생긴 힘의 공백을 미국과 소련이 경쟁하면서 두나라는 국제적 갈등관계로 변모해 갔다. 전후 생긴 식민지들이 독립하면서 이념이 다른 두 나라는 서로 자기쪽으로 끌어 드리기 위해 경제 원조등으로 우호국으로 민들려고 했다. 미국은 공산주의의 세력확장이 싫었고 소련은 자본주위의 포위를 두려워 했다. 미국은 트루멘 독트린, 당시 국무장관의 이름으로 만든 마샬플랜 등으로 1951년까지 3년 넘게 서유럽 16개국에 12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므로 서유럽 경제부흥에 도움을 주었다.
냉전시대에 가장 긴장된 순간은 48년 6월에 발생한 서독과 서베를린 사이의 교통로를 소련이 전면 차단하고 서 베를린에 대한 봉쇄를 단행한 일이었다. 투르먼은 이에 맞서 수송기를 동원한 대대적인 공수작전을 감행해 시민에 필요한 식량, 연료, 생필품을 약 200만명의 시민에게 10개월동안 250만톤 이상을 지속적으로 공급했다. 이에 소련은 봉쇄가 효과가 없다는 걸 알고 봉쇄를 풀었다. 베르린위기는 서독의 성립을 가져왔고 소련은 점령지인 동독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므로 독일은 영구 분단 국가가 되었다. 이후 미국은 유럽의 소련 견제를 위해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를 설치하고 소련역시 이에 대응해 동유럽 위성국가들과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해 맞섰다.
일본의 패전후 일본이 지배했던 한국은 소련과 미국이 분할 점령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대만은 중국에 반환되었다 (사실 대만은 중국땅은 아닌데도, 50년전 청나라 지배에 근거). 일본자체는 미국이 전후 재건을 도왔다. 미국은 일본이 중국세력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위해 산업발전을 제한하는 정책을 폐지하고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일본과 평화조약을 맺어 점령을 종식하고 오키나와 등에 군사적 기지를 확보해 미군을 주둔시키고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 어제의 적은 오늘 동맹이 되었다. 2차대전 이후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미국이 당혹해 진 건 장개석의 국민당정부가 모택동한테 밀린 일이었다. 45년-49년 사이 미국은 국민당에게 30억 달러원조를 해주어 중국 공산당을 견제하길 바랬으나 정부의 무능과 부패 탓에 대만으로 쫒겨가는 신세가 됬기 때문이다. 대륙을 차지한 모택동은 중화인민 공화국 설치로 중국은 공산화가 되었고 미국은 중공을 1979년 국교수립때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20회: 분단으로 시작해 분단으로 끝난 한국전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은 소련제 무기로 무장하고 남침을 감행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를 방치할 경우 제3차 대전이 일어날 걸 염려해 일본 주둔 맥아더 사령부에 남한을 방어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에 이문제를 상정했다. 소련은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미국의 결의안에 따라 만장일치로 북한의 남침을 침력행위로 인정 남한에 군사적 지원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맥아더 장군은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 총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부산을 제외한 남한 대부분 지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9월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해 전세가 역전이 되어 9월28일에는 서울이 수복되었다. 트루먼의 명령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을 북한에서 몰아내기위해 북진이 시작되고 북한의 2/3정도의 지역을 장악했을때 중국은 유엔군이 자국의 국경으로 접근해 오는것을 우려해 “의용군”을 구성해 중공군을 압록강건너 한반도로 진격하게 했다.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맥아더장군은 중국영내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허가를 요청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애초에 한국이 통일되고, 독립적이며 민주적인 한반도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중국연안 봉쇄, 만주 폭격, 대만정부의 본토 수복작전등을 제안하자 전쟁이 번지는 것을 크게 염려한 트루먼은 맥아더장군을 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본국으로 소환했다. 맥아더의 의회 증언에서 미국의회는 한국전쟁의 확전을 걱정해 한 해임이 잘한 일로 치부되었다. 그러는 사이 유엔군은 38선 이남으로 후퇴했고 서울도 탈취 당하기도 했지만 3월 서울을 재 탈환 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전선은 38선 이북에서 교착상태에 빠지고 서울을 두번이나 빼앗기면서 한민족은 큰 불행과 천만 이산가족이 영원히 재회 할 수없는 비극을 안고 분단국가로 승자와 패자가 없는 휴전상태에 놓이게 된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21 회 : 미국에서의 반공체제 강화
미소 냉전이 심화되면서 미국내에서는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민주당이 오랫동안 정권을 잡고 있을때 이기 때문에 주로 공화당이 주동이 되서 공산주위자 색출 또는 소련에 정보를 제공하는 스파이 행위자를 찾는 “반미활동 조사 위원회” 같은 것이 생겨 공개적인 조사에 나섰다. 할리우드가 첫번째 표적이 되어 수많은 영화계 인사들이 소환되어 증언대에 섰다. 1949년에는 소련이 원폭실험에 성공하고 중국에 공산정부가 세워지는 것을 보고 공산주의의 세력이 세계를 위협 할 것 임을 예상했다.
그 와중에 전직 국무부 고급 간부였던 “엘져 히스”가 소련에 비밀문서를 넘겨 주었다는 협의로 고발당해 미국인들을 경악 시켰다. 캘리 출신 공화당 초선의원인 “ 리차드 닉슨은 “ 이일을 집요하게 추궁해 위증죄로 감옥에 보내는데 성공해 일약 유명해졌다. 이럴 즈음 발생한 한국전쟁은 공산 주의의 위협을 미국인들이 실제로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의회는 국내보안법 등을 상정해 국내 공산주의자는 등록 하도록 하고 추방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소련의 원폭개발에 미국의 정보가 세어 나갔을 것이라 믿는 미국인이 많아졌다.
무명의 공산당원이었던 한 부부는 원폭에 관한 비밀을 소련정보원에게 넘겨 주었다는 혐의로 기소되고 51년 4월 법원은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 했고 53년 6월 처형되었다. 위스콘신주 무명 초선 공화당의원인 “조지 메카시” 의원은 국무부에서 암약하고 있는 공산주의자 205명의 명단이 있다고 주장했다. 나중 57명이라 했다가 81명이라고 오락 가락했지만 국민들은 놀래움을 금치 못했다.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조사를 했지만 별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딴 “메카시즘”이라 할 만큼 반응이 컸던 마녀사냥도 시간이 흐르며 유야무야 지나갔다.
메카시즘의 피해자도 많은데 대표적인 사람이 유명한 배우 “찰리 채프린”이다. 메카시즘이 한창일때 그는 고발 당했고 FBI는 그가 영국 국적을 포기 하지 않은 것을 알고 영국에 나가 있는 동안 그의 재입국을 불허했다. 결국 채플린은 죽을때까지 스위스에 거주했고 아카데미상 수상식에도 2개월 단수비자로 입국했다. 1952년 한국전이 교착상태 일 때 대통령 선거가 치뤄지고 이런 저런 이유로 24년만에 공화당이 정권을 잡는데 전쟁 영웅 출신 “아이젠하워”가 당선된다. 2차대전 영웅이며 NATO사령관, 콜롬비아 대학 총장을 역임한 아이크는 공산주의자 색출로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은 “리차드 니슨”을 러닝메이트로 선택했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2 2회 : 중동에서의 미, 소 세력 다툼
정치초년생인 아이젠하워는 경제발전을 위해 정부예산 삭감, 정부의 경제규제 최소화, 복지 향상에도 힘썼다. 가장 의미 있는 일 중 하나는 1956년에 제정 된 연방 고속도로 법이었다. 310억 달러를 들여 6만 7000KM에 달하는 주 정부간 고속 도로 건설로 미국의 거리는 서로 가까워 졌다. 원주민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항상 원주민에게 해악을 가져 왔지만 “아이크” 시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53년 원주민 보호정책 철회로 인디안 보호지역도 인정 되지 않았다. 이 결과 인디안 주민 20%는 지역을 떠나 도시빈민으로 전락 했다. 1960년 늦게 이법의 페단을 알고 시행을 중단했지만 이미 인디안에게 많은 비극이 휩쓸고 지나간 후였다.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흑백논리 법적 싸움이 이때 또 있었다. “분리하되 평등하면 된다”는 어제까지의 법이 모순이며 위법이라고 대법원 판결이 나자 북부에서는 별로 문제가 없었는데 남부 에서는 여전히 흑백 차별을 두려했다. 알칸사스주에서 흑인학생 9명을 백인학교에 입학 시키려 하자 백인들이 반대에 나섰고 정부는 1100명의 공수부대를 파견해 학생들의 안전과 통학을 보장 해 주었다. 엘라바마에서는 시내뻐스에서 백인용 의자에 한 흑인 여학생이 앉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 되었다. 침례교 약관 27세에 불과한 흑인목사” 마르틴 루터 킹 2세”는 흑인 분리정책에 맞서 민권운동을 거세게 불러 일으켜 전국으로 번지며 점차 공공 시설에서 흑백 분리는 줄어 들게 되었다.
아이크 대통령은 대외 정책에서 소련이나 공산중국이 미국의 동맹국을 공격할 경우 핵무기를 이용한 대량보복을 한다는 새로운 정책을 내 놓았다. 아이크는 53년 한국을 방문해 미국이 한국전쟁이 끝내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리고 스타린의 죽음과 중국과의 전면전이 발생 할 것을 두려워 해 서둘러 7월에 한국측 불참 한 가운데 휴전이 성립되고 이는 오늘까지 영구분단을 가져왔다. 스타린 사후 소련이 유화적인 자세를 보이자 55년 7월 제네바 에서 미, 영, 프, 소 네나라는 뫃여 군비 감축을 논의 하고 56년 2월 소련의 새 서기장 “ 후르시초프” 는 스타린을 격하 시키고 동서간에 평화공존을 역설해 냉전이 완화 될 기미가 보였다. 이에 힘입어 폴란드, 항가리 가 민족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소련은 중동지역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 하고자 했지만 미국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중동지역의 신생 아랍국가들은 자국에 유리한 강대국과 손을 잡으려 계산 중이었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아랍 민족주의자인 “나세르” 장군이 집권해 영국이 소유한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 해 버렸다. 그는 또한 파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을 몰아내려는 정책을 썼다. 미국은 난감해 졌다. 미국의 석유회사들이 중동에 많은 투자를 해 놓고 있어 아랍인들을 화나게 할 수도 없고 이스라엘을 포기 할 수도 없었다. 당시 서유럽 석유소비의 75%를 충당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을 부추겨 56년10월 스에스를 침공하게하고 나중 가세한다. 미국은 3차전쟁을 염려해 세나라에게 철수 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이집트는 영국에게 수에즈양도로 8100만달러를 지불한다. 이후 이집트는 미국에 우호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23회: 다시 빛나기 시작하는 미국의 경제
1952년 미국이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한지 1년도 안되어 역시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한 소련은 57년 최초의 인공위성을 우주괘도에 쏘아 올려 미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미국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 발사를 성공 시키며 인공위성도 우주괘도에 올렸다. 서로 경쟁을 하면서도 양국은 서 베르린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회담을 제안해 먼져 “후르시 초프”가 미국을 방문해 큰 대접을 받았다. 파리에서 정상회담도 하고 잘 되면 “아이크”의 소련 방문도 예정되어 있었는데 미국의 첩보 정찰기가 소련 영공에서 추락하는 사건이 발생해 이후 회담이 결렬 되 버렸다.
1959년 쿠바에서는 친미정권이 무너지고 제국주의 타도를 부르짓는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고 미국인들의 쿠바투자를 몰수했다. 쿠바는 소련의 원조를 받아드리기 시작해 아이크 대통령은 중남미의 공산화를 막기위해 이들을 지원할 수 있는 마살플랜을 세우고 5억불 예산을 의회에 청구했다. 미국은 2차대전이후 25년간 역사에 가장 길고 꾸준한 성장과 번영의 시간을 가져왔다. 전후 경제 성장 요인중의 하나는 1950년- 1957사이의 베이비 붐이었다. 1940년 한해 250만명의 신생아 출산이 1950년 한해에 350만명이 출산되고 이로인해 인구 증가를 가져 왔다.
좋은 경제여건에 가족이 많아지니 자동차, 주택, 학교건설, 위성도시 건설이 빠르게 진행되고 소비 지출도 늘어났다. 기업들도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 시키기 위해 세탁기, 식기 건조기, 텔레비전, 하이파이 전축 등 가전제품의 소비가 늘어났다. 중산층이 두텁게 늘어나고 노동시간 단축과 긴 휴가로 인한 여행과 각종 스포츠가 붐을 이루었다. 전후 경기 회복을 맞으며 인구는 한층 풍요로운 지역으로 이주가 많아지며” 선 벨트” 지역이 형성되었다. 따뜻한 플로리다, 태양의 캘리포니아, 괘적한 택사스는 러시를 이루었다. 2차대전 이후 군부대의 적소배치로 조선 항공사업의 샌디에고, 영화산업, 무역항의 로스앤젤리스 발전도 눈부셨다.
1957년에 이미 상업용텔레비전이 4000만대의 수상기가 보급되고 문화산업이 향상되었다. 극장이 사양길을 만나고 음반산업이 활기를 띠었다. 엘비스 프레스리는 청소년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선 벨트지역 위주로 방위산업, 기업농가, 우주항공, 석유, 부동산개발, 리크레이션 산업의 발전으로 경제는 향상되었다. 1964년 이후 선출된 미국 대통령은 모두 선벨트 출신들이다. 존슨(택사스), 닉슨(캘리), 카터(조지아), 레이건(캘리), 부시(택사스), 클린턴(아칸소), 이후 오바마는 시카고 출신이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2 4회: 흑인 민권을 위해 노력한 존 에프 케네기 대통령
1960년의 대선에서 아이크는 닉슨을 밀었지만 주류에서 벗어난 아일랜드계 43세의 젊은 나이 민주당 “존 에프 케네디”가 35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케네디는 “뉴 프론티어”정책을 걸고 경기 회복, 성장, 흑인 인권 신장, 농민과 교육에 연방금 지원, 사회 보장제도의 지원을 야심차게 공약했다. 법무장관에 동생 로버트를 임명해 흑인 민권문제를 주관토록했다. 흑백분규가 있는곳엔 정부군을 파견해 강력 단속하고 의회에 민권법 제정을 두차례나 요청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암살로 뜻을 이루지 못한걸 이후 존슨 대통령이 민권법을 관철시켰다.
63년 11월 다음해에 있을 선거에 대비해 남부 민주당의 지지를 위해 달라스를 방문해 부인 재키여사와 함께 오픈카를 타고 거리를 천천히 달리는 중 오스왈드의 총 한방으로 미국은 경악에 빠진다. 오스왈드는 루비의 총에 사라지고 미국처럼 젊고 핸섬한 캐네디는 그렇게 가고 음모는 흑막속에 영원히 파묻혀 버렸다. 케네디 대통령 시절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응징하기위해 61년 4월 무장한 쿠바인 망명자 2000명이 쿠바의 피그스만에 상륙했으나 잘 훈련된 카스트로 군대에 의해 전멸하고 말았다. 전투가 시작되면 쿠바인들이 봉기를 일으킬 것으로 예상을 했지만 계획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냉전기간 중 쿠바위기 사태로 3차전쟁의 증후가 있었지만 케네디대통령은 잘 막았다. 미국은 첩보활동을 통해 소련의 기술자와 장비가 쿠바에 모종의 군사시설을 설치하고 있다는 것을 탐지한다. 공중사진을 통해 소련은 쿠바에 중거리미사일 기지를 건설 한다는 것을 알고는 쿠바에 해상봉쇄를 단행했다.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소련에 미국의 단호한 입장을 밝히고 소련의 철수를 요구했다. 동시에 핵무기를 탑재한 폭격기를 발진 시켰으며 전세계 주둔 미국에게 경계령을 내렸다. 결국 후르시초프는 쿠바의 주권인정을 요구하고 미사일기지 준비를 철수하므로 핵전쟁의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25회: 의료 보장 제도를 도입한 “존슨”의 위대한 사회
존슨대통령은 케네디가 끝내지 못한 민권법을 통과시키고 빈곤과의 전쟁으로 개혁프로그램을 실시했다. 1965년 의료보장제를 도입해 65세이상의 의료비를 정부가 지원 하도록 했다. 또한 당시까지 국가별 할당제인 이민법을 없애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누구나 교육, 숙련공이면 이민을 올 수 있도록 만들어 이후 아시아계 이민이 미국사회 성격을 변화시켰다. 존슨의 정책으로 복지예산이 많이 지출되고 국민 총생산도 늘었고 빈곤층도 적어젔다. 존슨의 정책은 성공했고 커다란 업적을 남겼으나 베트남전과 그에 따른 저항운동으로 그의 인기는 시들해졌다.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게 된 계기는 2차대전 기간중 인도차이나 반도 지역을 식민지로 갖고 있던 프랑스가 일본에 잠시 밀려나면서 부터다. 미국은 이 지역에서 일본을 몰아내기위해 민족주의자 호지민과 제휴하기도 했는데 전후 프랑스가 다시식민지 지배를 하려하자 호지민은 1945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프랑스의 지배에 저항했다. 호지민 군대는 프랑스의 군대를 대패시키고 제네바 회의로 이어져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잠정 분단이 되었다.
베트남의 남쪽에는 캐도릭 교도인 “고 딘 디엠”을 대통령으로 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남베트남이 공산화 될 경우 인도차이나 인접 국가가 도미노 현상으로 다 넘어 갈 것을 염려해 61년부터 매년 2억달러의 경제, 군사적 원조를 해 주었다. 호지민은 민족해방 전선(베트공)을 조직 그들의 게릴라 작전을 도왔다. 이것이 베트남 전쟁의 시작이다. 1961년 케네디 정부는 남 베트남과 우호조약을 맺고 점차 군사요원을 파견한 것이 63년 15000명까지 늘어났다.
케네디의 뒤를 이은 존슨대통령은 군사 고문단을 5000명 더 증가 시켜 개입을 확대 시키는 인상을 줄 즈음 64년 8월 통킹만의 공해상에서 남베트남의 작전을 지휘하던 미 구축함이 북베트남의 어뢰정 공격을 받는 일이 일어 나면서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다. 의회에 북베트남의 공격 결의안을 받아내고 미군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북베트남도 정규군을 보내 베트공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확대 되었다. 미국은 전쟁이 끝 날때까지 320만톤의 폭탄을 퍼부어 이양은 미국이 세계 대전과 한국전에 사용한 양의 합보다 많았다.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고 한국의 파병도 승리의 희망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반전 시위가 확대되고 국무장관 “키신져”는 서둘러 종전계획을 북쯕과 타협하고 군병력을 감소 시키기 시작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26회: 잃기 만 한 베트남 전쟁과 “리쳐드 닉슨”의 등장
1964년 민권법 제정으로 흑인의 법적 권리는 향상 되었으나 미국은 역시 백인 중심사회였다. 남부흑인들이 백인의 테러에 직접 노출되어 있었다면 북부흑인들은 여전히 빈민굴에 살면서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에 시달리고 있었다. 흑인의 평균수입은 백인의 절반에 지나지않았고 실업율 또한 백인의 2배였다. 이런 상황에서 급기야 65년 8월 로스앤젤리스 흑인가에 왓츠 폭동이 일어났다. 34명의 사망자와 90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면서 인종폭동의 길고 긴 여름이 시작 되었다. 폭동은 뉴욕, 로체스터, 필라, 시카고,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로 번지며 분노를 백인 상점에 대한 약탈과 방화로 폭팔 시켰다.
흑인사회도 약간 분열 반응을 보여 흑백이 동등하게 있어도 동등대우를 못 받으니 백인으로 부터의 억압에 자유로우려면 흑인만의 기업, 정치, 학교같은 제도 및 기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도대체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 혹자는 흑인들에게 인종적 자부심을 갖도록 하자는 운동도 벌렸다. 끝없고 대책없는 갈등속에 비폭력을 주장 하던 마틴 루터 킹은 68년 4월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백인 암살자의 총에 살해 당하고 만다. 이에 분노한 흑인 폭동이 168개 대도시로 번져 34명의 흑인이 사망하는 결과를 낳는다.
1968년 대통령선거는 60년의 격동을 상징하듯이 혼전속에 치뤄졌다. 우선 민주당의 유력 후보예정자 였던 로버트 케네디가 로스앤젤리스 호텔 연회에 참석 했다가 암살 당했다. 암살이유는 그가 친이스라엘계 발언을 했기 때문이라며 범인은 친 아랍계 민족주의자였다. 선거 에는 공화당의 닉슨이 재선되었다. 닉슨은 골치아픈 베트남전을 어떻게든 끝내야 하는 부담을 가졌다. 닉슨은 미군이 철수하고 남베트남군을 훈련 시키고 장비제공으로 떠 맡겨 명예로운 평화를 이루고자 했다. 닉슨 독트린은 우방 국가들이 스스로 자립방어에 목적을 두었다.
“헨리 키신져” 닉슨 보좌관은 베트공의 은신쳐를 찾기위해 옆나라 캄보디아를 공격해야 한다고 직언하고 실제 닉슨은 캄보디아 공격을 허락했다. 그러자 미국내 반전 여론에 불을 끼었는 결과가 되어 번전 여론이 확산되고 의회는 전쟁예산 지출을 금지 시켰다. 73년 키신져는 파리에서 북 베트남 과의 종전 협정에 서명하고 미군병력을 철수 할 것을 약속했다. 미군 포로들도 곧 풀려났다. 종전협정이 있었어도 산발적인 전투는 계속 있었고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에도 불구하고 75년 3월부터 시작된 북의 대규모 공격에 4월말 남베트남은 붕괴 되었다. 20년간에 걸친 베트남 개입은 치욕으로 물러섰고 미군은 이 전쟁에서 5만7000명이 생명을 잃었다. 부상은 30만명, 월남인 도 120만 명이 죽고 민주를 갈망하는 국민들은 확실성 없는 보트에 운명을 걸어야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27회: 미, 중 관계 개선과 미, 소 데탕트
베트전쟁의 종결과 더블어 닉슨과 키신져는 제3세계에서 혁명과 급진주의를 완화 시키기 위해 먼져 중국에 눈길을 돌렸다. 중국산 상품 금지법을 완화 시키고 탁구선수를 베징에 초대케 해 미, 중 관계 개선을 타진했다. 1971년 7월 비밀특사로 키신져를 보내 중국 수상 주은래와 비밀회동을 가졌다. 회담에서 돌아온 후 닉슨은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중국을 방문하겠다고 발표했다. 71년 11월 공산중국은 타이완 자유중국 정부를 대신해 국제연합에 가입하고 다음 해 2월 닉슨은 중국을 방문해 미, 중 관계 정상화를 위해 노력 하기로 약속한다. 한개의 중국을 주장하는 공산 중국의 정책으로 미국은 1979년 1월 공산중국과 국교 정상화와 함께 오랜 친구 자유중국에 대한 승인을 취소했다.
닉슨은 소련과의 관계에서 긴장완화를 우선적으로 생각했다. 주요목적은 소련의 팽창을 견제하고 군비경쟁을 규제하는데 있었다. 이를 위해 69년부터 논의 되어온 전략무기제한 협정을 마무리 짓기위해 72년 모스코바를 방문해 협정에 서명했다. 탄도 미사일을 서로 줄이자는 협정을 마무리하고 10억 달러 상당의 미국산 곡물을 소련에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므로 소련과의 통상관계를 확대했다. 닉슨 행정부하에 미국은 실업자와 인플레이션으로 이중고를 겪었지만 임금, 물가 통제, 이자율 통제 등으로 균형을 이루어 나갔다.
1970년대까지 값싼 에네지를 사용했지만 73년경에는 너무 많은 에너지 사용으로 국내소비 1/3은 수입에 의존 해야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 제 4 차 중동전쟁의 와중에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국가들에게 석유를 수출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석유가격이 배럴당 3달라에서 15달러로 350% 올랐다. 석유가격 급등은 인플레이션을 가져오고 자동차 산업이 직격탄을 맞았다. GM은 8000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고 관련 산업은 철강, 유리, 고무, 각종 부품회사까지 영향을 받았다. 미국의 제조업이 서서히 쇄퇴하기 시작했다. 중공업이 붕괴되자 해고된 노동자들은 음식점, 주유소, 편의점에서 저임금의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닉슨 대통령의 재선이 확정된 다음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다. 민주당 전국 위원회 사무실에 친입한 5명의 남자가 체포 되면서 이들은 정부의 비자금을 받고 사무실에 도청 장치를 설치해 녹음하고 있었다고 증언해 일파 만파로 번져갔다. 닉슨은 처음 결백을 주장했으나 녹음태이프 제출을 요청 받고 테이프를 제출 한뒤 사임을 발표했다. 부통령 제럴드 포드가 남은 임기를 채우는데 닉슨에 관한 모든 범죄 사실을 사면하고 베트남 전쟁의 장병기피자 탈영병등에게도 사면의 기회를 주었다. 실추된 미국의 악몽을 다 털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행한 일이지만 국민에게 호감을 얻지 못해 1976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에게 정권을 넘겨야 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28회: 인권을 강조한 지미 카터와 이란 인질 사태
카터는 취임초 세계 인류의 인권을 보호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소련을 포함한 쿠바, 우간다, 아르헨티나 등의 독재정부에 개혁을 촉구했다. 이런일로 소련, 한국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카터정부의 대외 정책중 큰 성과는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의 평화조약을 체결 시킨 것이다. 캠프 대비드에서 11일간의 협의 끝에 이스라엘은 67년부터 지배해 온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돌려주고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안전을 보장해 주기로 약속했다.
79년 타이완과 국교 단절하고 정식으로 베이징에 대사관을 설치했다. 또한 소련과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 잠수함 발사 미사일 수를 2250기로 제한 하는데 합의했다. 카터는 1979년 11월 이란에서 일어난 인질 사건으로 시련을 겪게 되는데 본래 이란에는 친미 “팔레비” 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권위, 독재로 인해 이란인의 분노가 촉발된 혁명으로 권좌에서 축출되고 이슬람 근본주의자 “호메이니”가 정권을 잡았다. 그는 투철한 반미 주의자로 미국은 호메이니 시절 석유 공급원이자 군사적 우방이었는데 더 이상 친구가 아니었다.
79년 10월 팔레비가 신병 치료차 미국에 입국하자 이에 분노한 과격파 이란인들이 미국 대사관에 친입해 63명을 인질로 잡고 교환 조건으로 팔레비의 귀환을 요구했다. 미국은 국제연합을 통해 인질석방을 호소하고 미국내 이란재산 동결, 우방에 대해 이란 과의 교역중단도 시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더욱 미국을 곤혹 스럽게 한것은 인질 구출을 위한 비밀 군사작전을 승인해 사막에서 작전 도중 헬리콥터 사고로 8명의 사망자만 내고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카터 행정부는 인질 사태를 해결 하지 못하고 다음 대선에도 이기지 못해 공화당의 레이건 시대의 막을 열어 주었다. 444일간 인질로 잡혀 있던 대사관 직원들은 로날드 레이건 취임식날 에야 풀려났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29회: 레이건과 신 보수주의 그리고 레이거노믹스
제40대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은 영화배우 출신으로 캘리 주지사를 역임했다. 취임초 부터 경제문제 해결을 위해 작은 정부를 지양하고 세금 삭감, 연방지출을 줄이는 이른바 “레거노믹스” 정책을 내 세웠다. 그는 저축과 투자를 유도하려면 부유층 기업의 소득세 삭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3년에 걸쳐 30%의 소득세 삭감을 의회에 제출해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후에 이 계획으로 부유층만 혜택을 받는다는 비난도 받았다.
레이건은 소련에 대해 근본적으로 불신을 갖고 있었기에 강경 노선을 취했다. 국방력을 향상 시키고 100대의 폭격기생산과 탄도 미사일 배치를 위해 군비지출 증액을 지지했다. 1983년 소련의 전투기가 캄차카 반도 인근 해상에서 한국의 대한항공 민간여객기를 격추시켜 269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미국은 소련에 제제를 가 하기도 했다. 82년 6월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몰아내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하자 미국은 유엔 평화군으로 해병대를 베이루트에 파견했다. 다음해 83년 한 자살 테러리스트가 폭탄 실은차로 돌진해 241명의 해병대원이 죽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레이건은 레바논 사태에 대한 미국의 중재가 효과가 없다고 판단 84년 레바논 미군을 철수 시켰다.
레이건 행정부는 라틴 아메리카 정책에 민주국가든 독재국가든 공산주의에 반대만 하면 지원해 주었다. 예로 엘살바도르는 독재정권이었는데 공산주의 지원을 받는 게릴라들이 두아르테 정부를 위협했다. 미국은 인권 유린하는 독재에 아랑곳 하지 않고 엘살바도르 정부를 지원했다. 카리브 해에는 인구 10만명의 “그래나다” 섬나라가 있다. 이 적은 나라에 쿠바 공산당 마르크스 주의자 들이 정부 전복 쿠테타를 이르켰다. 레이건 정부는 4600명의 미군을 파병해 쿠테타를 진압하고 그라나다에 민주정부를 회복 시켰다. 침공 명목은 1000명의 미국학생 (미국의 의과대학) 을 보호 한다는 목적이었다. 이 일은 베이루트 폭파사건 3일 후 일어나 해병대원 손실로 인한 좌절을 만회하는 효과도 있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30회: 레이건 정부의 국방강화와 소련 공산주의의 몰락
1984년 레이건 정부가 국내문제, 대외문제 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강력 하면서도 매력적인 지도자라고 열정적인 지지를 받느니 대선에 내 세울 민주당 후보가 마땅히 없어 혼란에 빠졌다. “먼데일”후보를 정했고 최초의 여성 부통령 런닝메이트로 선거에 임했으나 큰 표차로 레이건-부시 공화당이 재선에 성공했다. 레이건의 감세정책과 치솟는 국방예산으로 재정적자가 계속 발생했다. 국방예산의 증액은 후에 소련의 붕괴를 가져오는 원인이 됬지만 균형예산을 맞추지 못해 고전했다. 80년도 미국사회는 점차 부의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하위 20%는 소득이 13%줄고 상위20% 가구당 소득은 27% 증가했다.
레이건 행정부 시작부터 마약과의 전쟁을 벌렸으나 중남미 로부터 들어오는 코카인밀수는 수백억 달러규모의 산업이 됬고 1987년 한해에 만 로스앤젤리스 마약관련 총격으로 387명이 죽었다. 마약과 관련하여 다른 재앙이 발생했는데 81년 최초로 보고 된 후천성 면력 결핍증(AIDS)이 마약 사용자, 동성연애자들을 중심으로 전염되어 81년 부터 88년 사이에 3만2000명이 사망했다. 소련에서는 85년 “고르바초프” 등장으로 서방과의 긴장완화 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1986년 레이건과 “고르바”는 아이슬랜드 레이캬비크에서 만나 소련은양측의 핵무기를 50% 줄이자고 했는데 결렬됬다. 그러나 87년 와싱톤에서 다시만나 양측이 단거리 미사일 2500기 이상을 폐기하기로 합의했다.
레이건 행정부를 위기로 몰고간 이란-콘트라 사건은 하마터면 탄핵의 결과를 가져올 뻔했다. 85년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판매가 승인되었는데 이스라엘에 판매한 무기가 이란에도 판매되고 CIA는 이란에 판매한 대금이 니카라과 의 반미정부에 대항해 싸우는 친미 게릴라 “콘트라”를 지원 하는데 사용 된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상원 청문회를 통해 정보국 책임자인 오리버 노스 해병 중령이 관련됨을 밝히고 레이건 정부까지 관련을 밝히려 했으나 레이건 대통령이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없어 관련자 기소로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레이건 행정부 마지막 2년을 마비시켰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31회: 걸프 전쟁과 조지 부시 대통령
1988년 민주당은 국가 채무증대, 경제불황, 이란 콘트라 사건등의 행정부 실패로 정권창출의 기회로 알고 “듀카키스” 후보로 선거를 치뤘으나 부통령을 8년 역임한” 조지 부시” 당선으로 공화당이 정권을 지켰다. 부시는 정부의 규모를 축소하는 레이건 정책을 답습하려 했지만 민주당이 지배하는 의회의 반대에 부딛쳤다. 의회는 복지예산 증가 같은 진보적인 입법을 추진해 부시정책과 자주 충돌했다. 37개의 법안을 거부권 행사로 막았다.
레이건 행정부 시절 냉전이 해빙기를 맞이했다면 부시 행정부 첫 2년 동안 냉전은 종말을 고했다. 소련의 고르바 초프는 경제를 재건하고 현대화를 시작했고 개방, 권위주의 정치를 해체하려 했다. 중요한 것은 동유럽 위성 국가들이 정치적 독립을 추구하는 것도 허용했다. ( 나 돈없다, 다들 알아서 살어! ) .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은 서기장 “호네키”가 물러난 지 한달 뒤인 89년 10월 붕괴되었다. 이는 바로 다음해 90년 10월 독일의 통일로 이어졌다. 그 사이 소련의 위성국가 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에서는 시위가 발생해 폴란드에는 “바웬샤”가 대통령이 되고 루마니아 공산 독재자 “차우 세스쿠”가 처형 되었다.
유고 연방은 해체되어 다양한 인종간의 극심한 내전 상태로 돌입했다. 이 무렵 지구상에는 쿠바, 북한, 중국, 베트남만이 공산주의로 남아 변화의 물결에 저항하고 있었다. 중국은 89년 천안문 광장의 민주화 시위를 제압하고 사회주의를 유지했다. 소련은 공산주위를 지키기 위해 강경파들이 “고르바” 를 연금하고 쿠테타를 시도 했으나 “엘친”과 더불어 시민의 저항으로 좌절되고 “ 엘친” 이 집권 하면서 소련은 해체되고 러시아 공화국 중심으로 심플해졌다. 엘친과 부시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두 나라의 국제적 협력을 다짐했다.
1990년 8월 이라크의 후세인은 쿠웨이트에 지고있는 엄청난 채무를 줄여주지 않는다고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했다. 체무자가 체권자에 날린 주먹으로 쿠웨이트 국왕이 축출되고 거대한 석유 산업을 독차지 했다. 이 침략행위는 국제적 석유 안정공급을 위협하는 행위로 전세계의 지탄을 받고 쿠에이트 철수를 요구하는 유엔 결의 안이 채택되었다. 미국의 이라크 재산 동결, 이라크 공중과 해상 봉쇄에도 유엔결의를 이행 하지 않자 미국은 유엔 다국적 군과 함께 60만 대군을 접경에 배치했다. 91년 1월 의회의 동의를 얻은 부시 행정부는 대규모 이라크 공격으로 “사막의 폭풍” 작전은 개시 되었다. 6주동안 계속된 공습과 폭격, 지상군 이동으로 2월 연합군은 승리했다. 그러나 후세인은 권좌를 유지했고 반란을 일으킨 쿠르드족 을 탄압했다. 완전히 끝내지 못한 전쟁은 이후 아들 부시몫이 되어 10년후 재차 방문(?)을 불러오게 된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32회: 아버지 조지 부시와 중미 “파나마 “ 의 실권자 “마뉴엘 노리에가”
“노리에가”는 파나마 시티에서 태어나 군인이 되었으며 1983년 파나마의 최고 사령관으로 군림했다. 그는 한때 “부시” 행정부 때부터 CIA(미 정보국) 을 도와 마약의 미국운반을 통제하고 카스트로 쿠바정부와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등 중남미 카리브해 좌파 정권들의 교란에도 협력했다. 이런 업적으로 78년부터 87년까지 매년 미국 마약국(DEA)으로 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미국을 위해 일 한 그가 파나마의 실권자가 되면서 84년, 85년 직선제로 당선된 대통령 위에 군림 하면서 독재자가 되었다. 마약운반을 눈감아 주고 대외적으로는 반 제국주의, 안으로는 군부 독재체제로 국민들을 탄압했다.
88년 미국 법무부가 그를 마약 밀매혐의로 기소하자 대통령 “델바에”는 노리에가를 해임했다. 그러자 그를 지지하는 의회는 오히려 대통령을 축출하고 노리에가를 국가 수반으로 추대하면서 찬반간에 대결이 심화되자 89년 미국은 전면적인 파나마 침공을 단행 노리에가를 체포하고 파마마 군부정권을 전복시키고 “엔데라” 민간 정부를 승인했다. 노리에가는 미군의 침공시 바타칸 대사관으로 피신 했는데 기상천외한 방법이 등장한다. 미국은 바티칸 대사관 옆 부지에 헬리콥터 장을 만들고 고성능 확성기를 이용해 헤비메탈, 록 음악을 24시간 틀어 견디지 못한 바티칸의 중재로 미군에 투항했다.
미국이 노리에가의 제거에 나섰던 것은 CIA의 하수인이었던 그의 마약 거래자금이 미국의 니카라과 우익 반군 지원사업 (소위 이란 콘트라 사건) 과 연관되어, 이를 빌미로 노리에가가 미국의 약점을 잡아 조지 부시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란 콘츠라 사건은 레이건 탄핵 직전까지 몰고 갔으니 당시 부통령이었던 아버지 부시도 사전에 알고 있었을 것이란 추론이다. 노리에가는 미국 법정에서 마약 밀거래, 돈세탁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아 19년을 복역했다.
2007년 수감이 끝난뒤 2010년 프랑스로 송환되어 프랑스은행 통해 마약자금 세탁혐의로 7년을 언도받고 수감중 2011년 조건부 석방되어 고국으로 송환되었다. 파나마 정부는 따로 정적 살해죄 세 건으로 최소 20년 최대60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복역중 1년쯤 후 건강악화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2017년 가택연금 상태에서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미국이 버린 파나마의 독재자, 범죄자 “노리에가”는 미국과의 2중 스파이 노릇과 최고 권력을 한몸에 받다가 불명예의 상처를 안고 남의 나라 법에 의해 떠돌며 수감생활로 치욕적인 삶을 산 20세기 중남미사의 어두운 페이지를 장식하고 사라진 인생이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33회: 클린턴의 스캔달과 탄핵 모면
부시정부는 걸프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지만 감세정책의 약속을 못지켜 민주당의 클린턴에게 권좌를 내 주어야했다. 1993년 46세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젊음과 패기에 차있고 마치 케네디가 못다한 일을 곧 끝낼 듯 골치덩이 의료보험 개선부터 영부인 힐러리에게 맏겼다. 세금인상, 정부지출 삭감, 북미 자유무역 협정, 세계 무역기구 창설에도 힘을 뫃았다. 20세기가 끝나가면서 두가지 변화가 왔다. 이름하여 그로발리즘(Globalism), 국경의 장벽이 점차 열리고 경제, 투자, 엔터터인멘드 등이 급속히 연결 되고 저렴한 항공료, 세계여행, 인터넷은 세계를 새로운 방법으로 묶어주었다. 또하나의 변화는 초강대국의 갈등이 종식되자 민족주의와 소수민족의 부활이었다. 10년동안 유엔 가입국이 156개국에서 185개로 늘고 소수민족간의 폭력사태가 분출되었다.
클린턴이 직면한 첫번째 대외정책의 과제는 91년 유고연방 붕괴 이후 닥친 보스니아 사태였다. 유고연방때 그리스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은 36%, 카도릭인 크로아티아인은 19% 이슬람 교도들도 다수 있었다. 유고 연방국가들이 하나씩 독립을 선포하자 이는 곧 분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스니아 지방에서 두 인종그룹은 격렬하게 싸웠다. 95년 NATO는 싸움을 말리기 위해 폭격을 가하고 미국은 평화군을 보냈다. 조건은 보스니아를 3그룹이 각각 지배하는 것이었다. 99년에는 또 다른지역인 코소보에서 인구의 90%인 알바나아계가 자치권을 획득하는 운동을 벌리자 세르비아계 “밀로세비치” 가 잔인하게 이들을 억압했다. NATO는 또 이곳에 폭격을 감행해 “밀로세비치”를 축출했다.
이 난국에 북한까지 핵확산 금지 조약을 탈퇴하겠다고 미국을 협박했다. 미국은 중유50만톤 무상제공, 경제협력, 한, 미, 일 공동의 경수로 핵발전 건설을 제공 받는 조건으로 달랬다. 97년 홍수로 식량 사정이 악화되자 미국은 식량원조를 제공했다. 북한은 이에 대한 대답으로 98년 대포동 미사일 발사 시험으로 미국과의 긴장상태를 조성했다. 미국은 클린턴이 북한 방문을 계획 하기 전 “울브라이트” 국무장관을 먼져 보내 봤지만 빈손으로 돌아와 북한과의 정상 대화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클린턴은 민주당 출신 대통령으로 루스벨트이후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해 자신감을 가지고 임기를 시작했으나 불거진 스캔달로 고통을 겪게된다. 크린턴은 알칸소 주지사 시절부터 “화이트워터 “ 개발회사의 토지 부정거래에 관련된 스캔달로 시달려 왔으나 잘 넘겼다. 1998년 24세의 백악관 인턴이었던 “모니카 루인스키”의 변호사로 부터 그녀가 대통령과 성적관계를 했는지에 관한 성희롱 소송에서 거짓말을 하도록 종용했다는 혐의로 고소당하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이 사건은 이전에 화이트사건을 맏은 케네스 스타가 담당하면서 조사에 활기를 띄었다. 처음 몇달 그 사실을 부인했으나 나중 루인스키가 검사에게 관계를 증언하면서 결국 대통령은 국민에게 사과했다. 하원은 탄핵을 가결했으나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탄핵은 면 했지만 미국의 자존심이 추락하는 사건이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34회: 로스앤젤리스 한인사회와 흑인폭동, 그리고 지진
20세기 말 미국은 인종차별 문제로 L.A. 폭동을 겪고 연방건물 에 폭탄 터러가 발생하는등 사회적 문제로 위기가 고조 되었다. 1991년 가을 로스앤젤리스 경찰은 로드니 킹을 과속, 음주 운전으로 체포하는 과정에서 과잉진압 비디오가 유출되 흑인 폭동이 일어나고 92년 4월 가해경관이 무죄 방면되자 분노의 표시로 약탈과 방화로 피해 규모는 사망51명, 부상 2000명, 방화 4500건, 재산피해 10억 달러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다. 한인 타운을 위시한 L.A. 근교 교민이 경영하는 2000개의 소규모 상점들도 피해를 입어 인종차별을 개선하라는 운동을 벌리기도 했다.
1994년 1월17일 새벽 4시31분 L.A.북서쪽 20마일 지점 노스릿지에서 시작된 규모 6.7 지진으로 반경 85마일 내 건물 4만채가 무너지고 60여명이 숨지고 5000여명이 다쳤다. 변압기 들이 터지며 전력공급도 중단되고 10, 14, 210번 후리웨이가 끊어지고 희생자가 발생했다. L.A.Time지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 재앙의 도시가 되었다고 보도했다. 한인 밀집 거주지라서 한인 희생자도 있었고 한인주택 200여채가 무너졌다.
1995년 4월 오클라호마 시에있는 연방건물 앞에 주차되어 있던 노란색 렌터카가 폭발했다. 이 트럭에는 2 톤가량의 수제폭약이 실려 있었는데 폭발로 9층짜리 연방건물이 붕괴되었고 건물내 유아원에 있던 어린이를 포함해 168명의 사망자와 8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미국민들은 이 사건이 중동의 테러리스트 소행으로 생각 했지만 걸프전 참전 용사이자 미국태생인 티모시 맥베이였다. 멕베이는 연방정부를 극도로 증오하는 인물이었다. 이 보다 2년전 택사스 웨이코에서 일어난 크리스트교 공동체 교도의 농성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7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FBI의 고의적 학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01년 처형 될때까지 정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35회: 아버지를 이은 43대 대통령 죠지 W. 부시
2000년은 일찍부터 예수님이 오시고 인류에 큰 변화를 예고해 걱정반, 희망반으로 새해를 맞이 했는데 별 이상은 없이 밀레니움 세대를 맞이했다. 콤퓨터에 낮선 2000년을 표기하는 문제도 큰일은 아니었다. 선거의 해를 맞아 공화의 조지 W 부시와 민주당의 엘 고어가 대결해 공화당이 이겼다. 엘 고어는 전체 득표수는 많았으나 선거인단 수로 결정하는 선거제도에 의해 500여개 선거인단 수에 5표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죠지 W.부시 대통령은 41대 죠지 부시대통령의 아들이다. 역사상 부자가 대통령을 역임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부시 대통령은 1990년 최고조에 달했던 경제가 하강 국면을 보여 역사상 가장 큰 세금 감면안을 통과 시키고 아동 낙오 방지법으로 교육을 개선해 모든 학생이 좋은 성적을 내기를 기대했다.
2001년 9월11일 미국을 경악 시킬 일이 벌어졌다. 중동의 터러리스트들은 보스톤과 뉴욕을 출발한 4대의 여객기를 납치해 그중 2대는 뉴욕시 맨하탄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으로 돌진해 두 건물이 거대한 화염에 휩싸였다. 그리고 잠시후 이 두 건물은 모두 붕괴되어 구조대원을 합해 2829명의 인명 피해를 내고 말았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잠시후 세번째 여객기는 워싱톤 근교 국방부 펜타곤 건물에 충돌하고 네번째 비행기는 아마도 백악관이나 국회의사당을 겨냥 했는지 비행하다가 승객들의 저항으로 펜실바니아 시골 농가에 추락했다. 불타는 건물이 전세계에 방영되 미국인과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사건은 응급전화 번호와 동일한 숫자 911을 상징하는 9월 11일에 일어났다.
“자유를 갈망하는 자는 다 이리로 오라” 는 자유의 여신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자유를 시기한 그룹에 의해 무역센터 두 건물은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사우디 출신의 19명 이슬렘 극단 주의자들이 빚어낸 참극에 3000명이 넘는시민이 죽어갔고 뉴욕은 분노와 치욕의 도시가 되었다. “빈 라덴”이 이끄는 테러조직 알 카에다는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중동정책에 반감을 갖고 자신들의 종교적 가치에 상반되는 미국의 풍요를 증오했다. 미국은 이들의 근거지인 아프카니스탄 탈레반 정부에 테러조직원들을 넘겨 달라 했지만 이에 응하지 않자 지상군 파병으로 정권을 바꿔 버렸다. 이슬램 의 복잡한 분파때문에 미국의 우호정권을 유지 시키기가 쉬운일이 아니었다.
9.11 터레직후 탄져균 우편우편물이 정계 인사들에게 배달 되 5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또한번 미국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어느날 갑작기 배달사건은 중지되고 이 사건이 수수께기 미제 사건으로 남을려나 했는데 2008년 FBI가 메릴랜드 전염병 연구소 요원 한명을 지목하자 기소 되기 전 자살을 해버려 모든 책임을 한몸에 안고 사라진 결과가 되었다. 미국은 차후 발생 할 수있는 터러에 대치하기위해 시민의 수색,압수, 구금 권한을 갖는 얘국법도 만들고 국경출입 관리 등 22개 부서를 통합해 “국토 안보국”이라는 거대한 부서를 창립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36회: 대량 살상 무기를 찾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
미국에서 테러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아지자 부시는 테러를 감행 할 국가를 선제 공격 할 전략을 세웠다. 그러면서 해당 나라들은 이라크, 이란, 북한을 꼽고 이들은 다 “악의 축”이라고 비난했다. 사담 후세인이 통치하는 이라크는 유엔의 무기 사찰에 비 협조, 대량 살상무기 개발 및 은닉설, 알 카에다 테러 조직과 관련설 등으로 의혹의 눈길과 비난을 받고 있었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국의 이라크 무력 개입의 완전 지지를 받지 못한채 이라크에 최후 통첩을 보내고 대답이 없자 2003년 3월20일 미국은 영국군과 함께 이라크를 침공했다. 마침내 4월 9일 수도 바그다드가 함락 되었다. 5월1일 부시대통령은 종전을 선언했다. 수년 전 아버지가 혼낸 나라를 아들이 끝장을 낸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이라크의 전쟁은 예상대로 흘러 가지 않았다. 후세인이 생포 되었는데도 미군을 비롯한 이라크 과도 정부 요인들에 대한 테러가 그치지 않았다. 개전부터 종전까지 전사한 미군 병사는 138명에 불과 했는데 2006년 말까지 저항세력에 의한 미군 전사자 수는 3000명이 넘었다. 전쟁 이 끝났는데도 정복국가 지키는데 미국의 전비와 병력희생은 마치 수렁으로 빠지는 듯했다. 오히려 2007년에는 이라크에 2만명의 증원군 파병과 이라크 재건 사업 예산을 의회에 신청했다. 미국은 이슬램 국가들의 수니파, 시아파, 쿠르드족 등 수많은 계파들의 갈등을 계산하지 못한 이유로 정복국의 테러와 폭력으로 예상못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부시행정부로 부터 악의 축이라는 비난을 들은 북한은 국제 원자력기구 시찰단을 추방하고 핵무기 개발을 위한 핵원료 푸로토늄을 추출하겠다고 발표했다. 2003년 초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나라의 회담이 여러번 진행되었지만 지지부진 했고 그런 가운데 2006년 핵실험을 강행했다. 이런 어수선한 정국에 미국에는 또 선거가 닥아왔다.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전쟁을 겪고 있는 미국은 대통령 바꾸기를 꺼려 했는지 부시는 재선에 성공했다. 부시 부통령 8년, 부시대통령 4년, 아들 부시 대통령 8년으로 부시 가문은 미국의 최고직에 20년을 기여한 전무후무한 가문이 되었다.
부시의 두번째 임기는 국내 경제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주가가 25% 다운하고, 실업율도 7.2%까지 치솟았다. 미국의 국가 채무는 11조 3000억 달러에 달했다. 5년만에 2배로 늘었다. 2007년 12월 미국은 2차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경기 침체국면에 접어 들었다. 주택시장 거품 붕괴 현상이 나타났고 치솟는 유가와 내리막길의 달러가치 하락도 침체를 부축였다. 서브 푸라임 몰기지 사태는 신용도가 좋았을때 집값의 90%까지 용자를 해 주던 몰기지 업체들이 집값이 떨어지니 돈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덩달아 몰게지 업체들의 파산이 줄을 지었다. 몰기지 업체에 투자한 은행들이 줄줄히 파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유명은행 메릴린치가 다른은행으로 넘어가고 2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리먼 브러더스도 파산해 역사상 최대규모의 기업파산을 기록했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전세계로 확산되어 아이슬랜드, 헝가리, 파키스탄, 등 많은 나라들이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신청 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미국도 자국의 금융기관을 살리기 위해 사상 최대 규모인 7000억 달러에 달하는 구제금융안을 마련했다. 은행빚이 주택값보다 많은 소유주는 주택을 버리는 일도 많아졌다. 2008년말 미국에서는 26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2005년8월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루이지아나를 강타해 미국역사상 최악의 자연재해가 발생했다. 뉴올리언스 지역은 지면이 호수의 수면보다 낮아 둑을 쌓아놓은 제방이 태풍에 무너져 도시의 80%가 물에 잠겼다. 인명피해는 사망자 1836명, 실종자 135명으로 루이지아나, 미시시피주에 큰 피해를 가져왔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37회: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탄생
2008년 치뤄진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는 공화당의 메케인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최초의흑인 대통령을 뽑은 미국을 내 친구는 “위대한 미국”이라고 칭찬했다. 이제 소수민족의 차별이나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어졌다. 오바마는 미국인 어머니와 흑인 유학생 사이에서 태어났고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인도네시아 에서 어릴적 자랐고 모슬램의 배경이 있다. 하바드 법대를 졸업하고 시카고에서 일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경제, 실업, 부동산하락, 금융파산, 전쟁 지지부진 등 최악의 국면에서 정권을 인수해 잘 하라는 뜻인지, 곧 바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매우 수긍하기 힘든 수상이었다.
44대의 오바마정부는 곧바로 경기 부양책을 마련하고 향후 수년간 보건 복지, 인푸라, 교육, 다양한 세금 감면책으로 듶에 빠진 경제를 돌보기 시작했다. 부동산 시장 해결책, 자동차 산업 구하기, 노후 차량 현금보상책 등 전문가들의 일 손이 바빠졌다. 그래도 안되는 집은 놓치고, 안되는 자동차 회사는 다른 나라기업에 팔려 나갔다. General Motors 같은 기업은 정부의 도움에 힘입어 기사회생 했다. 부시정부에서 엉성하게 시작한 건강보험도 수많은 이해관계 그룹의 진통속에 전 국민 커버 “오바마 케어”를 선 보였다. 내중 알고 보면 전혀 국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정부 기금만 축내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2010년 4월 루이지아나 인근 멕시코 만에서 영국최대 정유회사가 만든 석유시추 시설이 폭팔해 바다를 오염시키는 역사상 최악의 해져 기름 유출 사고가 일어났다. 시추선 작업자 11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을 입었다. 21세기의 재앙은 발전된 기술과 시설에서 나오기 때문에 재앙의 규모가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것이 많다. 엄청난 양의 원유가 분출되 멕시코만의 해양 생태계를 파괴하고 주변의 어장, 산업, 관광, 등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7월 15일 해져 유정 입구를 봉쇄 할때까지 분출된 기름의 환경재앙은 천문학 적인 숫자의 피해를 인류에게 안겨 주었다.
오바마정부는 미국에 적대감정을 갖는 모슬렘 국가들에게 닦아가기를 원했다. 이스라엘의 아랍계 주거지에 유대인촌 건설계획에 반대도 표시하고 이집트를방문해 대학에서 강연을 통해 이슬람 국가와의 정책에 변화를 예고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직도 미정인 이라크와의 전쟁을 어떻해서든 끝을 맺어야했다. 공식적으로는 2010년 8월31일로 이라크전쟁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7년 5개월의 긴 시간 동안 전쟁에 숨진 이라크인은 10만명, 난민은 200만여명, 미군은 4400명의 희생과 엄청난 전비가 퍼 부어졌다. 아무도 전쟁에 승리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임무완성을 외쳤다. 승자와 패자가 없고 희생만이 남는 이라크 전쟁은 미국을 또 한번 후회토록 만들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38회: 공영 언론의 방해에도 주류충이 선택한 트럼프 대통령
2016년 선거에 오바마 정부의 국무장관을 지낸 힐러리 크린턴과 공화당 주자 10명도 넘는 기라성들을 하나하나 물리치며 마지막 남은 테드 크루스의 감정적인 공격에도 이겨낸 도날드 트럼프의 45대 선거의 승리는 진실과 거짓의 대결이었고 결국 선한 싸움에 진리가 이긴다는 공의를 남기고 선거는 끝났다. 정치신인 트대통령은 민주당의 선거후까지 계속된 부질없는 공격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오바마의 흔적 지우기에 한걸 한걸음을 옮겨갔다. 신인이었지만 준비된 지도자처럼 필요한 곳을 수술 할때마다 공격적이고 속된 말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걸르지 않았다. 같은 당이지만 부시 부자, 메캐인, 테드 크루스 같은 거물 공화당 인물들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본인은 이 나라를 너무 망가진 미국의 얼굴이라 생각하고 이들은 미국을 위해 너무 망가진 트럼의 입이라 생각했다.
민주당은 끈질기게 러시아 스캔달을 조사하게 해서 수많은 시간과 정력, 경비를 낭비해 무혐의가 인정되었고 트대통령은 국경봉쇄, 이민제한, 이스라엘 우선, NATO를 비롯한 동맹국들의 미군 유지 비용을 올렸다. 일본과의 유대를 최대 강화하고 중국을 시작초부터 관세로 묶기 시작했다. 타이완 정부를 인정하고 통상부의 지위를 올려 양국의 관계를 거의 정상화 수준으로 올려 중국을 압박했다. 가장 어려운 문제가 한국정부의 비협조였다. 한국은 북한 중국과 가까히 하고 일본 미국을 멀리하는 정책을 써 달래보고 방위비를 올려봐도 요지부동이었다. 할 수 없이 한국을 방문해 국회에서 한국과 미국의 오랜 우방임을 알리는 어쩌면 한국인도 확실히 알지 못 할 수 있는 역사연설을 해 애국 국민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북한의 김정을 싱가포르에서 만나 대화 채널을 구축하고 자유세계와 고전을 답습하는 둘중 선택을 요구했다. 만일 미국을 포용하면(핵포기 선언) 경제재건, 자유보장, 외자의 투자로 북한의 존재는 달라진다고 설득했다. 북한은 먼져 원조를 원했지만 미국의 안을 수용할 때까지 경제제제와 다른 나라와의 교역도 중단되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난항에 봉착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핵을 포기 할 의사를 보이지 않고 미사일 발사 로 우방을 놀래케하며 재협상을 시도해 베트남에서 다시 만났지만 협상은 무의로 끝나고 말았다. 트대통령은 일본방문의 시기에 틈을 내 계획에도 없는 북한 과의 즉석 만남을 성취시켜 판문점 방문과 트와 김이 세번째 만나는 장면이 세계에 중계되었다. 과거 푸에브르호 납치, 도끼만행으로 휴전 상태에서도 미국에게 악행을 저질렀던 그 자리에 자유의 그림자를 심기위해 트대통령과 김정의 북쪽 남쪽 발걸음이 자유의 씨앗이 되기를 세계인은 바라고 기원하는 시간들이 되었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39회: 2020 선거해 에 벌어지는 역사적인 역병의 위기
2020년은 년말에 다시 선거를 하는 해이다. 지난 4년간 트럼프 대통령은 실로 여느 대통령이 하는 일의 다섯배는 한 것 같다. 그것도 다른 정부는 감히 시도조차 못할 중국을 압박 한다거나, 팔레스타인 인 들의 문제를 과감하게 결정했다. 이란의 시리아 테러조직의 대장도 한방에 날렸다. 감히 마음대로 못한 것은 민주당과의 협상이다. 트대통령의 년두교서에서 연설을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민주당 펠로시의장은 원고를 갈기갈기 찢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트대통령의 무엇이 그리 못 마땅한지, 통과가 결코 되지 않을 탄핵안도 하원에서 통과시켜 상원에서 부결, 시간만 낭비했다. 민주당의 대표들, 민주당을 지지하는 공영언론 들은 한결같이 반대를 위한 반대로 미국의 앞날을 어둡게 한다.
공화당은 일찍 트럼프를 다음 선거후보로 정한데 비해 민주당은 인물 부족, 정책부족, 신뢰부족 등으로 대의원선거가 지지부진하면서 아직도 후보결정이 미진하다. 그런 가운데 100년만에 찾아온 전연병 확산으로 미국은 물론 전세계가 긴장 국면에 빠졌다.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을 덥칠때만 해도 남의 일처럼 보고 있다가 1월이 지나자 한국, 일본, 이태리로 옮겨 처음 크루스 선에서 환자 발생이 보고 되다가 여러 나라로 번져갔다.
미국은 처음 크게 번질 걸 예상 못한듯 의료장비, 테스트기, 중환자 사용 호홉기, 마스크 등의 장비가 모두 중국에서 제조되어 오고 있는것을 늦게야 깨달았다. 한번에 많이 필요하는 양의 준비는 제조업을 이미 중국등 저 개발국에 넘긴 미국으로서는 발등을 찍는 일이 되었다. 1-2개월 만에 사망자는 6만명이 넘었다. 100년전 스페니쉬 독감으로 55만명이 희생 된 것에 비하면 너무나 큰 손실이며 자가격리 이외 별로 방법이 없는 예방법에 앞으로도 얼마를 더 갈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직장이 문을 닫고 정부는 1차 보상액을 지불했다. 시민들은 쥐띄해를 만나 쥐처럼 음식을 뫃으고 숨어서 사람들을 피하는 습관이 일상화 되었다.
트정부는 역병의 조절에 힘쓰면서도 중국의 도전을 손보려 벼르고 이란, 북한 등 적대국 들의 동향을 면밀 분석하며 코로나 이후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일본, 타이완, 이스라엘을 통한 미국의 안보를 재 점검하고 있다. 인도와 의 교류를 확대하고 특히 북한에 협조적인 한국정부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 코로나 이전의 미국이 전반전이라면 코로나 이후의 세계가 후반전이 될 것이다. 게임을 유지 시키는 자리에 트대통령이 서있다. 아군과 적군이 밖에만 있는것이 아니고 끝없이 헐뜯는 민주당과의 다툼도 후반전에 어떻게 전개 될지 기대된다.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제 40회: 앞으로의 미국의 방향과 세계의 전망
45명의 지도자가 이끌었고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은 오랜동안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와 인권을 존중하면서 번영의 길을 걸어왔다. 여러시대를 지나면서 영광의 시절도 있었지만 대 공황의 시련과 치욕의 뼈아픈 기억도 다 가지고 있으면서 발전해 왔다. 무엇보다도 청교도 정신에 입각해 공의로운 편에 서기위해 노력했고 하나님의 가호를 항상 기원했다. 오늘날 미국의 번영은 하나님을 공경한 결과임을 많은 국민들이 인정한다. 혹자는 부정이 난무해 로마의 끝날 처럼 보인다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미국은 도도히 흐르는 정서가 먼지같은 부패를 청소하고 깨끗함을 추구하는 세계의 리더국으로 계속 도약 할 것으로 믿는다.
전쟁을 치루고 부서진 도시를 고쳐주고 식량을 공급해 주는 일을 아군쪽에나 적군쪽에 똑같이 시행 했다. 이렇게 모범적인 생각을 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미국을 미워하면서도 자식을 미국에 유학시키는 이중적인 모습은 미국에 없다. 미국은 전세계가 평화 롭기를 추구한다. 그리고 인간이 서로 사랑하기를 추구한다. 올바른 인권이 지켜 지기를 추구한다. 악의 축들을 과감히 청소하는 일에 성원을 보
내며 제 3국이 다 같이 자유와 풍요를 누릴 것을 원하는 미국의 국민으로 자부심을 같는다. 우리는 미국을 해롭게 하는 어떤 요소에도 과감히 도전하고 미국의 가치를 (American Value) 추구하는 시민이 되어 다가오는 세대들에게 이 정신을 계승하고 우리의 풍요를 세계인들과 나누는 미국의 장래가 되기를 기원한다.
(코로나 펜데믹 기간에 돌이켜 보는 미국의 역사 와 장래 를 정리하며 5.5.2020)
세계의 강대국 미국의 역사 (못다한 이야기)
제 41회 : 미 국무장관 William Seward 의 알라스카 매입
1867년 10월18일은 알라스카의 날이며 이날은 Seward 국무장관이 러시아로 부터 알라스카
를 매입한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엄청난 전략적 가치와 지하자원, 수산자원이 풍부한 그 넓은 땅을 러시아는 왜 헐값에 미국에 팔았을까 하는 의문이 남지만 당시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절대 봉건, 농노제를 답습하던 제정 러시아는 19세기 중반 유럽의 여러 강대국들과 치른 크리미아 전쟁 이후 재정적, 군사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재정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나중 분쟁이라도 발생하면 방어하기 어려운 알라스카를 영국 해군(당시 카나다는 영국령) 이 쉽게 점령 할 경우 아무 보상도 못받고 잃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러시아 본토의 광활한 영토의 지배도 고민이었다.
따라서 러시아 차르 알렉산더 2세는 미국의 남북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끝난 미국에게 이 영토를 팔기위해 주미 러시아 공사에게 이 문제를 국무장관과 협상에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드디어 3월30일 미화 720만 달러에 매매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 당시 알라스카 매입은 스워드의 어리석은 짓, 스워드의 얼음통이라고 불렸는데 멀리 떨어진 쓸모없는 땅을 무모하게 매입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뉴욕 트리분지는 이렇게 논평했다. “ 이미 미국은 인구로 채울 수 없는 영토의 부담을 안고 있고 원주민 다스리기에도 힘이 벅찬데 그런 사람들을 더늘리고 매년 행정비용, 민간과 군사비용이 들어 갈 것이다. 할양된 영토는 국가 영토에 인접해 있지 않다. 불편하고 위험한 거리에 그 영토는 떨어져있다. 오후4시 서명되고 억지 합의 되었다. 그날밤에 악행이 일어났다.”
그 조약은 오랫동안 영토 확장을 바랐던 “스워드” 국무장관과 상원의장 “찰스 섬너”가 승인하였다. 러시아는 남북전쟁 내내 귀중한 동맹국이었지만 영국은 거의 공공연한 적이었다. 러시아를 도와 영국을 꺽는 일이 현명하다. 그 땅은 영국령(카나다땅) 옆에있고 영국이 관리할 수 없다. 언젠가는 미국이 사게 될 것이다. 이 차에 영국과 프랑스에게 이 대륙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말라는 경고성 메시지도 된다고 스워드와 섬너는 생각했다. 1867년 스워드가 “알라스카 매입법안”을 제출하자 상원은 난리가 났다. “그렇게 큰 얼음통을 어데 쓸려고 ?, 얼음이 필요하면 미시시피 강의 얼음을 깨다 당신집을 채우시요.” 상원에서는 승인되었으나 하원의 반대로 1년이상 지연 된 끝에 결국 하원도 승인했다.
미운 오리세끼가 백조로 변신 하기 까지는 30년이 걸렸다. 1897년 유콘강 기슭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골드러시가 일어났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체제가 개막되자 이 땅은 미국의 방패가 되었다. 공격 및 방어용 미사일이 북부지역에 집중 배치되었다. 소련 정부는 이를 갈았다. 1950년대 시작된 석유탐사 붐으로 1968년 프루드호 만에서 대형유전이 발견되면서 대박이 터졌다. 당시의 눈으로 볼때 바보 짓이 세월이 흐른후 돈으로 환산 할 수 없는 미국의 힘이 되었다. 알라스카에 가면 길 이름, 건물이름, 학교이름 등 지금도 수없이 많은 스워드(Seward)의 이름을 볼 수 있다. 그리고 3월 마지막 월요일을 스워드의 날로 정해 알라스카의 매입을 기리고 있다. 스워드는 오늘 날 전미국인에게 기억 될 이름이 되었다.
제 42 회 : 100 불 짜리 지폐의 얼굴 “벤자민 프랭크린”
미국의 정치가요 과학자며, 저술가인 벤자민 프랭크린은 미국의 역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겨 건국의 아버지 라고도 부른다. 비누와 양초를 만드는 집안의 17남매중 15번째로 태어난 벤자민은 10살때 집안 형편으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형의 인쇄소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의 열정적인 노력 덕분에 인쇄기술도 배우고 글쓰는 솜씨도 늘려갔다. 17세때 혼자 보스턴을 떠나 필라델피아에 도착해 빠른시간에 인쇄업자로 성공했고 24살의 나이에 인쇄소를 소유하기도 했다.
1731년 에는 팬실바니아 대학에 도서관을 설립하여 도서관 발달에 기여했고 1736년에는 펜실바니아 하원의원으로 임명되어 임무를 수행했다. 시 체신부장관 대리로 일하며 우편업무를 개선 시켰다. 그의 사업이 번창 하면서 과학에 뜻을 두고 월급을 받으며 과학탐구에 몰입했다. “프랭크 스토브” 는 그후 수년동안 브랜드로 유명세를 날렸고 복 초점 렌스 발견, 세가지 신호의 신호등도 발명해서 오늘까지 사용되고 있다. 번개가 전기 일거라는 생각에 연날리기에 가는 철사를 연결해 전기를 유도하다 피뢰침을 발명했다.
1757년 영국에 파견되어 자주 과세권, 인지세 철폐등 식민지의 권익을 위해 노력했다. 후에 독립선언 기초위원이 되었고 프랑스에 건너가 아메리카-프랑스 동맹을 성립시키고 83년 파리조약의 미국 대표의 일원이 되었다. 미국의 건국에 토마스 제퍼슨과 함께 만든 독립 선언문은 역사에 남을 업적이다. 벤자민은 저서활동에도 심혈을 기울였는데 특히 그의 자서전을 통해 청교도 정신을 표방한 계몽주의 정신의 표상이 되었다.
자서전의 특징은 벤자민의 인생 지침으로 살았던 13가지 덕목을 제시했다. 그의 철학은 “평소에 근면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절제, 침묵, 질서, 결단, 절약, 금면, 진실, 정의 중용, 청결, 침착, 순결, 겸손의 13가지 덕목들의 계율들을 정의 하였다. 조그만 수첩에 하루의 행동을 생각하고 매일저녁 계율과 관련해 비교하고 개선해 나가는 생활의 모범을 보이고 저술 활동에도 이를 인용했다. 그는 조언을 통해 근면과 인내심으로 생쥐는 돌을 뚫고 밧줄을 갈아 두동강 낸다. 또한 개으름과 나태로 인한 낭비를 지적하며 “우리는 언젠가 묘지에서 충분히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다” 면서 부지런한 삶을 유도하는 저술활동에도 많은 시간을 쏟아 부었다. 미국 건국의 중요한 일을 하고 후세에게 근면함을 일깨운 “벤자민 프랭크린 “을 미국국민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제 43 회 : 미국의 영토 인줄 잘 모르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미국령
미국은 50개주와 1개의 특별 행정구(Washington DC)로 이루어진 연방 국가다. 미국 독립초기 13개주를 시작으로 1개주 씩 연방에 가입했기 때문에 주를 소개 할때 몇번째 주라는 말도 많이 한다. 동부의 델라웨어주가 1787년 맨먼져 가입했고 1959년 하와이주가 50번째로 가입했다. 미국의 영토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주가 아닌 16개의 미국령이 있다. 이중 5곳은 주민이 있는 지역이고 11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다.
크루스여행의 황금노선 캐리비안지역에 위치한 프에토리코, 버진 아일랜드, 괌, 사이판 섬으로 유명한 “북마리아나제도”와 미국령 “ 사모아제도” 가 있다. 이들은 Unincorporated Territory라 불리우며 즉 편입할 생각이 없는 지역중 하나로 독자적인 자치의회와 정부수반 (지사)을 선출하고 독자적인 사법부를 거느린다. 미국 대통령은 이 지역 지사에게 임명장을 주는 역활만 한다. 주가 아니라서 대선 투표권은 없으나 주민은 모두 미국 시민이다. 그러나 어떤 미국령의 주민은 아직 시민의 권리를 주지 않는 영토도 있다. 미국령의 주민들은 연방세를 내지 않으며 지방정부 세금만 낸다. 그러나 사회복지혜택은 다른 50개주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의 남한보다 약간 적고 미국의 메인(Main) 주 만한 “프에토리코”는 인구가 319만명인 캐리비안 지역의 미국령이다. 미국령이지만 성격은 몇년전까지 적성국인 쿠바와 가깝다. 인구의 99%가 스페니쉬 사용자며 관광업이 주를 이룬다. 1987년 헤리케인으로 많은 손해를 입었고 최근 2017년에도 태풍의 피해를 보았다. 미국령이지만 가구당 수입이 미국인 평균에 못 미치고 영어권은 본국으로 이주해 경제사정이 밝지 않다. 부유한 항구란 뜻의 “프에토리코”는 400년 스페인의 통치에 있다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미국령이 되었다. 1950년대 본토의 지원으로 정유산업육성, 중화학 공업의 발전을 꾀했으나 70년대 오일쇼크, 미국 경제침체로 경제성장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오일쇼크로 미국의 석유수입이 줄고 설탕농업, 섬유산업에도 대량 실업자가 발생해 지방정부에 부채수준이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와중에 발생한 1987년 허리케인”휴고”는 전 국토를 물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오래 전부터 “푸에토리코”를 미국의 51번째 주로 승격 시키는 문제가 거론 되었다. 하원의원 5-6명, 선거인단 7-8명이 예상되는 이 섬의 주민투표도 여러번 있었는데 이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주로 승격되면 한해 200억달러의 지원이 필요하며 주민의 99%가 스페니쉬 사용, 민주당이 우세하고 , 또 하나의 문제는 미국으로 부터 독립하자는 그룹도 여전히 존재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 도움이 유익한지 자신의 색깔을 들어 내는것이 유익한지 사이에서 방황하는 말만 부유한 항구의 뜻을 가진 낭만의 섬 “프에토리코”의 오늘을 조명해 보았다.
미국의 역사 제 44 회 : 미국의 최 남단 “ 키 웨스트” 와 “헤밍웨이” 의 작품활동
미국의 본토는 직사각형 모양인데 세군데의 구석은 모두 다른 나라와 연결이 되어 재미없지만 나머지 하나 남은 구석은 바다와 연결이 되어 땅끝마을이 된다. 따뜻한 기후의 후로리다의 남쪽 끝은 마이아미에서부터 바다를 가르는 길이 된다. 보아선 잘 느낄 수없는 7개의 섬을 연결해 만든 이 길을 운전해 가면 바다위를 모터보트로 움직이는 느낌을 갖는다. 양편의 끝없는 바다를 바라보며 120마일, 4시간 가량의 운전이 피곤을 느낄무렵이면 마지막 섬, 마지막 도시 키 웨스트(Key West)에 도착한다. 전혀 미국답지 않은 도시 모습은 쿠바의 어느 시골에 온 느낌이다. 제일 먼져 반기는 곳은 미국의 남쪽 끝단 표시가 있는 Southern Point 다. 여기서 쿠바 하바나까지 90 마일이라는 표지판에 여행객들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시카코에서 태어난 ”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젊을때 기자로 파리에서 생활도 했고 2차대전 참전으로 아프리카 경험과 스페인내전에도 운전병으로 참여해 전쟁의 참상을 작품으로 그려내어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대표작을 만들어낸 미국 의 대표작가다. 헤밍웨이는 쿠바가 손에 맏닿는 이곳에서 10여년을 살았고 대표작 “노인과 바다”는 이후 쿠바에서 생활 하면서 바다 낚시 친구들의 이야기를 집필하고 이 작품은 53년 플리쳐 상에 이어 54년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작가 들이 대개 사후 유명해 지는 것에 비해 운이 좋은 헤밍웨이는 비교적 여유있는 노후를 보낼 수 있었다. 하바나 바다낚시 주인공 노인의 이름은 “산티아고” 이며 그를 존경하며 따르는 낚시 보조 소년의이름은” 마놀린”이다. 작품 전반에 이두 사람의 이름밖에 나오지 않는다.
산티아고는 한때 잘 나가는 어부였지만 운이 없어 매일 나가는 바닷길이 84일째 소득이 없어 우울해 있었다. 처음 40일은 소년과 함께 했지만 그의 부모가 소득이 없는 산티아고 배에 더 이상 타지 말라는 말에 다른 배를 탄다. 다른 배에 타서 몇 마리를 잡은 소년은 계속 빈손으로 돌아 오는 산티아고를 찾아가 곧 좋은 소식이 있을거라고 격려하고 낚시밥도 챙겨 준다. 이렇게 빈손으로 혼자 44일을 견디어 낸 다음 날 여느때 같지 않은 낚시의 입김에 보통 고기가 아님을 직감하고 승부를 건다.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적당히 낚시줄을 쥐었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물고기가 미끼를 깊숙히 물도록 유인했다. 미끼를 문 물고기는 강한 힘으로 바다 깊은 곳으로 헤엄치기 시작하고 노인의 배는 속절없이 끌려가기 시작했다.
노인은 소년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물고기가 힘이 빠질때 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해가 지며 날씨는 쌀쌀해지고 줄을 쥐고있는 손에 쥐가 나서 뻣뻣하게 오그라 들었다. 그는 고통스럽지만 장기전에 대비해 낮에 잡은 다랑어를 먹고 그나마 날씨가 좋은 것에 위안을 삼으며 첫날밤을 꼬빡 새웠다. 다음날 아침 물고기가 마침내 모습을 조금씩 들어내는데 그 물고기가 자신의 배보다 크다는 것을 확인하고 마치 물고기가 자신에게 포기 하라는 것처럼 느꼈다. 대단한 물고기지만 결국 죽여야 한다는 각오를 한다 . 정오를 지나 자신의 손이 조금 풀렸으나 물고기는 포기 할 기색이 없어 낚시줄을 잡고 잠시 눈을 붙인다. 셋째날 아침 드디어 물고기가 본색을 들어내며 수면을 반복해 올라 기회를 봐 작살로 숨통을 끊어버린다. 거대한 물고기를 배에 묶어 돌아 오는데 피냄새에 상어들이 뫃여들어 고기를 띁어먹고 부두에 도착했을때는 거대한 고기의 뼈만 달고 돌아 오게 되었다. 2박3일 사투를 벌여 잡은 고기뼈의 크기에 마을 사람들은 놀라면서 소설은 막을 내린다.
제 45 회 : 마운틴 러쉬모어와 4명의 대통령 얼굴 조각상
세계엔 수많은 불가사이의 건축물이 있다. 후세에 보면 경이롭고 놀라운 이 예술품들은 한가지 일에 몰두해 일생을 또는 대를 물려 만든 예술인의 혼이 서려있다. 미국의 오지 사우스 다고타주의 Black Hills 산간 벽지에 세겨진 일명 “큰 바위 얼굴”은 대를 이어 만든 한 조각인 가족의 혼과 얼이 남아 있는 곳이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며 위대한 민주국가 탄생에 기여한 “조지 워싱톤”, 미국의 독립 선언서를 기안했고 루이지아나 지역을 구입해 국토를 넓힌 “토마스 제퍼슨”,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승리로 미 연방을 살렸고 모든 인간의 자유를 지킨 “에이브라함 링컨” 그리고 서부의 자연보호에 공헌이 컸고 파나마 운하건축 등 미국의 위치를 세계적으로 올려놓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네 위인의 초상이 산정의 거대한 바위에 그 위풍을 과시하고 있다.
공사의 시작은 1923년 사우스 다고타주의회의 합의를 얻고 시작되었다. 아이다호 출신의 조각가 보글럼(Borglum)이 그의 나이 58세인 1925년부터 시작하였다. 큰 바위를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하고 400개이상의 구멍을 뚷고 못과 망치로 다듬질하며 마무리 지었다. 작업의 시작부터 끝까지 15년의 공사를 해 마무리 지었다. 처음 1929년 일을 시작할 당시 이 기획은 “ Sherine of Democracy” 민주주의의 성전이라 이름짓고 연방정부는 25만불의 기금을 약속했다. 400명의 일꾼이 45만톤의 바위조각을 끌어냈고 지금도 일부는 조각아래 쌓여있다. 매우 위험한 작업이었지만 14년동안 희생자는 한명도 없었다. 1930년 4월에 워싱톤의 조각이 완성되었고 1936년 제퍼슨의 조각이 프랭크 루스벨트대통령에 의해 헌정되었다. 아브라함 링컨의 조각은 1937년 9월 완성 되었으나 마지막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각이 완성되기 전 1941년 3월 보글럼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아들이 7개월을 추가 공사해 같은 해 10월31일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민주주의의 전당이라는 이름의 대통령 조각상은 이후 1959년 알프레드 히치곡의 “North By Northwest”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라는 탐정영화에 촬영 배경이 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사우스 다고타 정부의 현지 촬영불가 결정으로 할리우드 스투디오 에 대형 세트 촬영이 영화화 되었으니 실제모습은 영화에 제공되지 않았다. 조각상의 균혈과 작은 파손을 막기위해 완공 50년째인 1991년 $40 million 기금을 투자해 보완 공사를 마치고 한층 안정되고 출중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년간 2백만명의 방문객이 다녀가며 미국을 빛낸 4명의 대통령 상은 후세들에게 영원한 민주주의의 귀감이 될 것이다.
제 46 회 : 최초의 동서 관통 루트 66번 하이웨이
1920년대 미국 최초로 개통된 대륙횡단 고속도로였지만 1950년대 더 빠른 인터 스테이트 고속도로가 들어서자 찾는이가 뜸해졌다. 마침내 1980년 고속도로로서의 자격마져 상실되자 50년대 옛날 향수를 간직한 옛길로 남게 되었다. 북동부 시카고에서 시작되는 루트 66은 미주리, 캔사스, 오클라호마, 택사스, 뉴 멕시코, 그리고 애리조나를 지나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리스 산타모니카에 닿기까지 8개 주를 한번에 연결한다. 대도시는 물론 중부 내륙의 소도시들을 통과하며 그랜드 캐년의 광활한 자연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오랜 문화 까지도 동시에 담고있다.
4천여km에 달하는 이 도로를 따라 여행하면 미국의 심장과 영혼을 관통하게 된다는 말이 이해된다. 1800년대 캘리포니니안 드림을 꿈꾸던 사람들이 서부를 향해 험난한 여정을 떠났던 발걸음은 대 공황기를 맞으며 50년대까지 이어졌고 고속도로에게 권리를 빼앗긴 이후에는 자유로운 영혼의 젊은이 들이 청춘의 열망을 찾아 방황하던 무대의 장소이기도 했다. 미국의 문호 죤 스타인백은 대 공황에 처한 1930년대 미국의 농민과 이주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다룬 그의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 루트66 을 “마더로드(Morher Road)” 로 표현했다.
루트66 길의 의미가 퇴색 되어가든 찰라, 이제는 아티스트들이 루트66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냇킹 콜, 엘비스 프레슬리, 밥 딜런, 등은 세월의 뒤 안길에 조금씩 멀어져간 그들의 청춘을 그리며 그 시절 반짝였던 루트66을 노래했고 60년대 유명 드라마 “Rout 66”이 인기를 얻으며 대중 문화를 통해 명성을 되 찾으며 루트 66은 미국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루트 66이 다시 거론되자 옛길은 재기에 성공했다. 미국스타일을 창조한 문화의 도로로 인정 받으며 “히스토릭 루트 66” 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되었다. 195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숍과 레스토랑, 네온싸인 반짝이는 낡은 모텔 등이 여전히 건재하는 루트66에 오르면 옛 미국의 모습을 리마인드 시키는 횡단 여행길이 열린다. 그리고 루트66은 특별한 수식어 없이도 그 자체로 길을 상징하는 “더 루트(The Rout)”로 통 하기에 이르렀다.
제 47 회 : 뉴욕을 내려다 보는 자유의 여신상 (Statue of Liberty)
영웅전 하면 “나폴레온”이며 나폴레온은 “프랑스”의 상징이다. 파리에 가면 제일 먼져 방문하는 앵발리드(Invalide)에 나폴레온의 유해가 묻혀있고 유럽을 주름잡은 용맹은 몇줄의 글 아래 영면해 있다. 생각해 보면 미국은 독립전쟁에 프랑스의 은덕을 크게 입었다. 그리고 이후 오늘까지 싸워 본 일이없는 영원한 동맹이다. 나폴레온 시절 프랑스령 “뉴 올리언스”를 1500만불에 사서 영토를 2배로 늘린 것도 프랑스의 은덕이다. 프랑스는 미국의 건국 100주년에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해 양국간의 우의를 돈독하게 했다.
뉴욕의 리버티섬에 세워진 키 93.5M, 204 Ton의 육중한 체격을 가진 이 여신상은 파리 에펠탑을 만든” 귀스타브 에펠” 에 의해 골격이 설계되었다. 7개의 뿔이 달린 왕관은 미국 자유와 평등이 7개 대륙으로 퍼지라는 뜻을 담고있고 오른손에는 햇불, 왼손에는 독립 선언서를 안고 있다. “ 너의 지치고 가난한,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 너의 풍요의 기슭에서 버림받은 가련한 이들을 내게 보내라, 세파에 시달려 갈 곳없는 이들 내게 오거든 나 황금의 문 곁에서 높이 등불을 들리니..” 여신상의 기단부에 써 있는 글귀의 일부다.
미국의 독립 100주년 선물이지만 실제 전달 된 것은 1885년 1월이었고 여신상의 겉면을 구성하는 300개의 구리판을 프랑스에서 제작한 다음 배로 운반해와 4개월동안 재조립했다. 프랑스 국민 성금40만 달러를 들여 제작해 왔는데 조립비용이 없어서 방치중 이 사연을 들은 “플리쳐”에 의해 신문 모금 캐페인을 벌려 기금을 뫃아 완성했다. 당초에는 등대로 사용 되었으나 (공식 등대 목록 381) 빛이 너무 약해 등대로 계속 사용되지 않았다. 원래는 구리의 붉은 빛을 띠었지만 공기중에서 서서히 산화하는 구리의 특성상 푸른 빛으로 변하게 되었다. 횟불에는 도금을 했기 때문에 횟불만은 금빛이다.
세상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명소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실제 여인상 앞에서면 볼품이 없다. (멀리 봐야 폼 난다는 뜻) 1시간 가량 줄서고 배 타고 들어가 또 줄서고 여신 상 앞에 서면 등잔 밑이 어둡다는 느낌으로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막상 여신상 안으로 들어가 3시간 정도를 계단을 밟아 여신상 끝까지 올라 갈 수 있다. 크라운 까지 올라 가는데는 3개월 전 예약을 해야하며 발 계단까지는 에레베이터로 쉽게 올라 갈 수 있다. 프랑스에도 사이즈는 작지만 똑같은 디자인의 복제품이 있는데 파리 센느강변에 위치한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 대 혁영 100주년 기념으로 프랑스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이 프랑스에 기증했다. 프랑스와 미국이 서로 자유의 여신상을 주고 받은 셈이다. 자유와 인권이 미국과 프랑스를 넘어 전세계에 영원한 횟불로 비쳐지길 기원한다.
제 48 회 : 꿈을 현실로 만들어 가는 기업인 “일론 머스크 (Elon Musk)”
인류는 지구에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 다른 행성에서는 왜 살 수 없을까?, 행성 끼리의 여행은 가능할까 ? 아마 이런 얘기를 꺼낸다면 정신이 좀 이상해진 사람 아닌가 의심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주 정상적인 머리로 이런 생각을 하고 조금씩 꿈을 이루어 가는 1세 이민자 며 젊은 기업인인 전기차 회사 “테슬러 모터스”의 창업자 일론 머스크의 인생은 어느 외계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다. 올해 49세인 “머스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났다. 콤프터와 책읽기를 좋아 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카나다로 이주해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곧 미국 펜실바니아 대학으로 편입해 학업을 마치고 실리콘 벨리로 이주해 동생과 함께 인테넷 기반 지역 정보제공 시스템인 “Zip 2” 를 창업한다. 뉴욕 타임스, 시카고 트리븐 같은 언론사 등을 대상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회사로 키워 4년후 콤프터 제조회사에 매각 할때 2200만불을 얻게된다. 그는 1000만달러를 투자해 온라인 금융 서비스 회사인 “X.com” 을 창업한다. 온라인 결제를 주로 담당한 이회사는 1년만에 경쟁업체를 사들이고 이름도 “PayPal” 로 바꿔 승승장구, 페이팔의 가치가 급상승 한다. 눈독을 들이던 “이베이”에 의해 페이팔이 인수되면서 머스크는 1.65억 달러를 얻게 되었고 이돈은 머스크가 다른 사업을 창업하는 기반이 된다.
2002년 일론 머스크는 민간 우주항공 기업인 “스페이스 X”를 설립 하였다. 초기에는 직원수가 많지 않았지만 2017년 4월에는 직원수가 약 6000명에 달했다. “스페이스 X”를 설립하면서 세운 목표는 우주선 발사 비용을 10분의 1로 줄이는 것이었고 재활용 가능한 로켓발사 시스팀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2015년 최초로 1단 분리로켓을 지상에 착륙시키는데 성공했다. 또 다른 계획은 화성을 식민지화해서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로켓을 통해 사람을 화성까지 운반하는 것이다. 전기차 ”테슬러”는 2004년 투자자로 참여 했다가 창업자들이 다 떠나 회사를 맏게 되었고 현재 3가지 모델이 기술이 향상되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의 사촌들이 창업한 태양광 발전회사인 “솔라시티”에 초기 자금을 대 주었는데 지금은 테슬라가 인수해 함께 CEO를 맏고있다. 태양광 패널로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일인데 테슬라의 급속 충전소에 태양광 페널을 설치해 전기차에 전기를 공급해 주거나 가정용 전기 보관시스팀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2013년 머스크는 진공튜브 안에서 캡슐형태의 고속열차를 움직이는 시스템인 “하이퍼 루프” 콘셉을 공개했다. 하이퍼 루프는 최고속력 시간당 1300Km를 달릴 수 있고 운행에 쓰이는 에너지는 전량 태양광 발전으로 생산되어 친 환경이다. 최초로 만들어 질 하이퍼 루프는 뉴욕과 워싱톤을 연결한다. 태양이 있는곳에 “머스크”가 있다. 전혀 평범하지 않은, 미래를 바꾸는 천재 경영자 “ 머스크”의 다음 계획이 긍금하다.
제 49 회 : “이민자” ( 미국에서는 누가 미국 사람인가?)
미국에 이민 와서 처음 시립학교에서 영어를 배울때 교재의 저자가 일본 사람 이름이었다. 나는 신기해서 선생에게 물어 봤더니 미국의 일본 사람이 만든 책이라 했다. 지금은 많은 한국인 2세들이 학교의 영어 선생도 하고 하지만 당시엔 이해가 안됐었다. 이민자는 어느 나라에도 있고 그들의 생활은 처음부터 풍요롭지 않다. 미국은 다 민족이 이룬 사회며 선조들은 거의 다 외국에서 가난때문에 종교적, 정치적 압력 때문에 각자 다른 목적으로 들어와 뿌리를 내리고 후손들은 미국의 주인으로 살아간다. 미국의 주인은 얼굴이나 혈통으로 정하지 않고 미국에 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사람들의 나라다.
대게의 이민자들은 열심히 일하며 살아간다. 간혹 불이익이 발생해도 웬만하면 참고 넘어간다. 그것은 미국을 잘 몰라서 일 수도 있고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미국의 많은 이민자들은 그렇게 참고 열심히 일해서 경제적 안정을 찾고 이후엔 정계 진출이나 주류사회의 리더가 되기 위해 끝없는 노력을 경주한다. 미국의 발전을 위해 이민자의 헌신과 노력은 결코 무시 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치명적인 그리고 지워 버릴 수 없는 약점은 원주민 인디언과의 갈등과 흑백간의 인종차별이었다. 그 중 흑백간의 차별은 링컨 대통령이 해결을 명시한 지 100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대책 없는 문제중의 하나다.
순간 순간 일어나는 경찰과의 흑인 충돌은 미국사회를 한순간에 아비규환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다. 이를 이용하는 그룹도 있을 법해서 이제는 연례행사로 맞이하는 소수민족의 어두운 그림자가 되고있다. 서양인의 얼굴은 영어가 부족해도 주류를 이루는 백인들이 있기에 잘 나타나지 않지만 동양인의 얼굴은 아무리 똑똑해도 일단은 의심의 눈초리부터 세운다. 그 의심은 미국의 부를 훔쳐가는 것일 수 있고 평화와 안정을 헤치는 것 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주인이라 생각하는 가난한 약탈자(Looters)가 시위대속에 있다가 적당히 기회를 보아 약탈하는 행위에 같은 미국의 주인인 얼굴만 다른(동양인) 소수민족이 타켓이 되거나 원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몹씨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100년전의 이민자보다 지금의 이민자는 가난 때문이 아니고 자유와 삶의 가치를 찾아 이땅에 뿌리를 내릴려는 전문인과 이미 자기나라에서 훌륭한 인격을 가진 모범적인 분들이 많다. 주인이라고 행세하며 이민자들 삶의 땀을 훔치는 영원한 폭력자들을 저지하기 위해 우리는 머리를 뫃아야 겠다. 미국의 주인으로써 부끄러운 일은 아예 생각하지 말자. 모든일에 솔선 수범하여 미국의 가치(American Value:정직, 양심, 자유)를 지키는데 앞장서자. 그리고 주류와 협력하여 부끄러운 가난을 이땅에서 영원히 추방할 수 있는 사업에 동참하자. 그 사업은 마약추방, 도박추방, 기술교육, 직업교육, 인성교육으로 미국의 가치를 지키는 모든 일이 포함 될 것이다.
제 50 회 : 뉴욕 브로드웨이의 “해밀튼 (Hamilton)” 공연
뉴욕의 브로드웨이는 뮤지칼의 성지이며 여기서 힛트하면 전 세계로 퍼져나가 음악인의 사랑을 받는다. 뮤지칼은 연극에 춤과 음악을 가미해 만든 종합예술로 좋은 작품은 오래도록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는다. “사운드 오브 뮤직” “마마 미아” “미스 사이공” “나비 부인” 등이 대표적인 예다. 사용하는 말이 달라 세계인의 사랑을 받을려면 내용 보다도 음악과 춤이 재미 있어야 한다. 2016년 뉴욕에 선을 보인 “ 해밀톤” 은 프에토리코 태생인 “린 마뉴엘 미란다” 가 이 작품에 거의 8년동안 매달려 완성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서인도 제도 (캐리비안)에서 태어나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 독학으로 자수 성가한 인물이다. 미국의 건국 당시 재무장관을 맏았고 국무장관이던 부유한 농장주 출신의 제퍼슨 쪽과 의견을 달리했다. 해밀턴의 경제사상은 초기 행정부의 경제정책에 크게 반영되었다. 그는 연방정부와 주 정부가 진빚을 한데 묶어 공채를 발행해 연방정부가 갚도록 했다. 이미 빚을 갚은 남부주 들이 반발하자 수도를 필라에서 남부 주인 오늘의 워싱톤 DC지역으로 옮기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로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은행 설립법을 통과시켜 오늘날 은행, 금융의 전기를 마련해 성공 시켰다. 셋째로 제조업을 발전시키고 보호 할수있는 계획을 제출해 농업위주의 기반을 닦아야 한다는 제퍼슨 그룹과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건국을 위한 그의 공로는 인정되어 우리가 사용하는 지폐 10불짜리의 얼굴로 자리잡았다. 안타깝게도 반대파와의 결투대결로 49세에 인생을 마감했다.
뮤지칼 “해밀턴”은 미건국 역사의 이야기에 거리음악 “힙합”을 가미해 성공하리라고 생각 못했지만 대 힛트를 쳤고 표가 없어 암표가 500불 까지 올라 갔지만 10불 짜리 지폐의 얼굴인 만큼 공연장 앞에서 10불짜리 한정적 표를 제비뽑기로 나눠 주기도 해 인기가 올라갔다. 시카고 공연도 약속되고 영국에도 진출해야 하는 시점에 펜데믹 기간을 맞이했다. 그러나 좌석은 이미 내년 봄까지 매진 되었다. 스토리가 역사 이야기인 만큼 외국인이 이해하기에는 제한이 있다. 언젠가 할리우드에 진출한 한국의 “명성황후” 뮤지칼을 보면서 역사물 뮤지컬이 미국에서 성공이 쉽지 않은걸 보며 “해밀톤”이 타 민족에게 호감을 얻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미국의 역사 제 51 회 : 지구촌을 뒤 흔든 펜데믹의 와중에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일들 ( 05.05.2020 부터 12.05.2020 까지)
미국의 역사를 40회까지 기술 할때 45대 트럼프 대통령의 마지막 해 년초부터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했다. 감염자가 많아지고 호홉기 곤란으로 입원환자도 많아 지면서 저가 품목인 마스크와 호홉 치료기들이 바닥났다. 갑자기 많은 량의 저가 품목들은 모두 제 3국에서 만들기 때문에 품귀현상에 직면하고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노약자들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가족들과의 작별기회도 갖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부는 몹씨 당황하게 되고 전염병의 대쳐 방안도 갈팡질팡 하게 되었다. 불행중 다행한 일은 예방주사가 긴급 준 승인되고 선진국 부터 접종 실시로 질주하는 전염병의 속도를 잡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변종 바이러스가 등장하고 접종 거부자들의 감염과 일시에 전 세계 인구에게 백신을 공급 할 수 없는 문제로 바이러스의 종식은 난제가 되었다.
국민들은 두가지 문제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하나는 정치인들이 바이러스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 하기 시작했다는 점과 바이러스의 생성과정, 기다렸다는 듯이 출현한 백신의 빠른 출현, 그리고 백신의 유해점을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공장은 가동이 중지되고 학교와 관공서의 엄무가 중단 되었다. 직장은 잠시 문을 닫고 일터는 집안으로 옮기던가 쉴 수 밖에 없었다. 정부는 임시 기금을 방출하고 실직 수당신청이 수직 상승했다. 교통량이 줄고 식당, 호텔, 항공사, 여행업계가 펜데믹의 직접 피해자들이 되었다. 갑자기 흑, 백 갈등이 노출되며 법집행 경찰들이 시민의 적이 되기도 했다. 문제는 민주당은 이 기회를 이용해 국민의 편에 서려 했으며 집권 공화당은 강력한 법집행에 방해를 받는 쪽이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경력이 없는 상태에서 구태의연한 악법 제도들을 고치려 했고 이들의 연결고리를 놓치고 싶지 않은 기존의 이익집단은 이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언론과 빅택(FaceBook 같은 인테넷 매체) 들은 기존의 이익 집단과 손을 잡고 트럼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거세게 압박했다. 트 대통령은 국경장벽을 튼튼히 해 미국의 안보를 지키려 했고 세일개스 개발을 통해 에너지 왕국으로 중동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강한 나라로 미국을 만들고자 했다. 중국의 세력이 커지는 걸 막기위해 아무도 감히 실행 하지 못했던 관세를 올려 중국의 세계화에 브랙을 걸었다. 하지만 중국의 입김은 벌써 이전부터 민주당 뿐만 아니라 공화당 내부 인사들까지 미끼에 걸려 있어 RINO 들이 자신의 얼굴을 들어 냈다. 무늬만 공화당 일뿐 트럼의 정책에 반대하는 배신자들이다. 미치 멕코넬, 미트 롬니, 체니, 부시, 특히 조지아 주지사 “캠프” 같은 당원들이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2월 트럼프의 두번째 임기를 위한 선거전은 별로 경쟁이 되지 않았다. MAGA- 미국을 위한 정책들에 유권자들은 열광했고 20-30년 구태에 물든 자기 지향적 정객들은 비난 받았다. 트대통령의 하루 두차례의 공항 선거유세에 수만명이 구름처럼 몰려와 경청했고 도시별로 벌린 MAGA 행렬로 수백대의 차량들이 미국 깃발을 앞세우고 “트” 를 지원했다. 바이든은 별로 유세를 하지도 않았고 어느땐 4시간 비행기로 달려 왔는데 50명이 안되는 참여자가 있을때도 있었다. 민주당은 바이러스가 창궐하니 모두 우편투표를 권장 한다면서 투표지를 각가정에 배부했다. 12월10일 선거가 치뤄지고 전세계의 눈은 개표상황에 집중되었다. 여기 저기서 모호한 개표상황이 뉴스로 전해졌다. 밤 1 시 바이든 표가 10만표 올라가는데 트럼표는 한표도 보이지 않는 다든가, 참관인들을 다 돌려 보내고 의자 밑에 숨겨둔 가방 4개에서 이상한 표가 책상위로 부어지는 등등..
미국의 역사 제 52 회 : 세계인 들 앞에서 벌리는 가면 무도회
4년마다 치뤄지는 미국 대선에 미국인들은 1억2천 만명이 투표에 참여하고 그 증가율은 미비하다. 오바마 1차에 6천 3백만, 2차에 6천 2백만 , 트럼프 1차에 6천 3백만 으로 승리했다. 그리고 트럼프 2차에 7천3백만을 받았지만 바이든의 8천2백만에 못 미친다. 갑자기 미국인 1억5천5백만명이 펜데믹의 와중에 선거에 참여 했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거의 인기가 없었던 바이든 표가 더 나온 것이 믿을 수 없는 사실로 받아졌다. 펜데믹으로 한해를 절망으로 보내는 2020년의 마지막은 불완전한 선거의 결과를 보듬어 안은채 다음해로 넘겨졌다. 1월6일은 연방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펜스” 부통령이 이 결과를 패스하든가 위원들의 이의 제기로 심의가 이루어 지다 결론이 안나면 대의원 표를 각주로 돌려 보낼 수있는 기회가 있다.
1월6일 아침부터 연방 의사당 앞에는 시위대들이 몰려들었다. 트럼 시위자들도 있고 그 반대자 들도 있다. 갑자기 시위대들이 연방 의사당에 난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런데 어떤 카메라는 친입자들을 안내해 입장을 용이하게 해 주는 장면도 보였다. 의회 경비경찰의 총소리 도 들리고 사망자도 나왔다. 의회는 회의가 잠시 중단되고 의원들은 지하실로 잠시 피했다. 다행히 소란이 정리되고 의회는 밤 늦게까지 회의가 계속되었다. 여러 의원들의 의의 제기와 선거 결과의 재검이 필요함을 역설 했지만 의장인 부통령은 결과를 되 돌리지 않고 인정하고 패스를 시켜 바이든 당선을 확정 시켰다. 공화당인 부통령 “팬스” 는 왜 되 돌리지 않고 패스 시켰을까 ? 본인 만이 알 수 있는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많은 사람들이 의혹을 풀지 못했다. 어떻게 미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 날수 있을까 하는 숙제를 안은채 1월6일은 지나 가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의회는 다음 단계의 문제 하나를 놓고 시비를 가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1월6일 사태” 를 트럼프 대통령이 사주 했느냐에 메달리기 시작했다. 선거 시비를 감추고 일단락 시키기에 너무 좋은 카드였다. 마치 팬데믹이 선거를 유용하게 치르기에 너무 좋은 카드 였던 것 처럼 말이다. 6명으로 양당에서 조사 위원을 구성하자며 6명의 공화당 의원은 반트 당원으로 채워졌다. 곧 백악관을 떠나게 될 트의 존재를 아주 없에려는 재임 3번째의 탄핵이 시작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전임자와 신임자의 화기 애애한 인수 인계 과정이 없이 “트” 는 백악관을 떠났다. 그리고 삼엄한 방위군의 경계아래 아주 초라하게 초청인사도 없이 바이든의 취임식은 치뤄졌다. 바이든은 취임 하자마자 국경장벽 건설 중지와 탄광채굴 금지, 송유관 중지 등 트의 정책들을 바꾸므로 곧 바로 미국의 안보와 생활에 변화가 닥쳤다. 국경은 밀입국을 시도하려는 사람들로 붐비게 되고 기름가격은 상승하기 시작했다.
아프카니스탄 에서 미숙하게 철수하므로 수많은 국방물자를 적의 수중에 넘겨주게 되고 시민권자 및 미국에 부역한 그 나라 국민들을 남겨두고 오는 일도 생겼다. 미국의 유약함을 알리는 결과를 초래해 러시아의 우크침공 준동, 중공의 타이완 위협도 미국이 안게 될 큰 숙제가 되었다. 그 동안 트럼프는 TMTG (Trump Media & Technology Group) 라는 푸렛 폼( 정보를 알리는 기업) 을 만들고 진실보도를 유치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국익에 도움이 안되는 의원이나 주 지사들은 선거시 낙선을 돕는(?) 일을 간접적으로 벌리고 있다. 지금 이 시점에 “트” 는 무슨 일을 도모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선거에 의문이 있기때문에 그 가 다음선거에 출마해서 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 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이 아수라 정치판에 1분도 있고 싶지 않을 그 가 아직도 정치에 연연함은 무었일까? 그 는 분명 자유와 민주로 이룩한 이 나라를 다시 강력한 나라로 회복 되길 원 할 것이다. 그리고 불의한 독재자들 아래 고생하는 지구촌 고통받는 민족들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지도자를 잘 만나는 일이 중요함은 남,북한 70년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미국이여 영원하라. (12.07.2021)
미국의 역사 제 53회: 민주당과 바이든 정부가 불러온 고유가와 인플레이숀
죤.에프.케네디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한후 미국은 중심을 잃고 쓰러질 줄 알았지만 잘 견디며 큰 문제 없이 강대국의 면모를 보이며 지내왔다. 미국의 부패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국을 만들자고 출발한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에 반발은 예상외로 컸다. 민주당은 언론을 총동원해 “트” 는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고 그를 무대에서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그의 결과는 당장 미국에 불이익으로 나타났다. 국경장벽을 만드는 일을 필사적으로 막은 결과 한달 50만명의 불법 이민자들이 국경으로 몰려 안보의 위협과 마약사범, 범죄율 증가로 치안이 위협을 받고있다. 쉐일가스 독자개발로 산유국이 되었으나 민주당의 광산 폐쇄결정으로 유가는 상승하고 러시아는 천연가스의 고소득을 믿고 어쩌면 시도 하지 않았을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우크”는 미국의 반대편에 있지만 려시아의 부상을 막기위해 도와주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라 막대한 전쟁물자를 지원하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펜데믹의 구호를 위해 많은 경비를 지출하니 달라의 가치가 떨어져 인플레이숀과 필요물품 부족사태를 겪고있다. 인플레를 맊기위해 고금리 정책을 사용하니 주가폭락과 주택금리상승으로 시민생활이 어려워지고 있으며 출퇴근 비용 상승으로 조기은퇴 이직이 늘고 직장은 구인란으로 고생하고있다. 펜데믹으로 유명회사들은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지만 서민들의 경제력은 떨어져 빈부차이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 민주당은 전기차를 사라, 태양광 등의 대체 에너지를 강조하지만 현실과 다른 정책으로 정부신뢰가 30%로 추락하고있다.
무대에서 사라진 “트” 의 차후등장을 막으려는 듯 민주당은 1월6일 사태를 재거론하며 “트” 의 사주에 의한 난동으로 유도하려고 하지만 국민들은 관심이 생활비 걱정에있다. 민주당의 인기가 적어 11월 선거에 공화당의 선전이 예상되며 많은 공화당의원들이 당선되면 민주당은 탄핵을 면하기 어려워진다. 이를 막기위한 조그만 카드가 생겼으니 6월에 발표된 대법원의 낙태금지 법안이다. 낙태는 여성의 권리 이며 공화당이 여성의 권리를 막고 있다고 유도하니 마지막 안간힘이다. 미국을 위한, 나아가 자유세계를 리드 할 정치력이 보다 필요한 미국의 2022년, 벌써 반절의 시간이 지나고 있다. 미국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06.30.22)
미국의 역사 제 54회 : 미국 건국 246년째의 2022년은 이렇게 저문다.
많은 의문에도 불구하고 “죠 바이든”은 미국의 제 46대 대통령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유가는 불안정하게 오르고 있고 주식은 역시 불안정하게 내리고 있다. 생필품을 비롯한 필수품의 물품공급도 원활하지 못하고 물가 안정을 위해 은행 이자율이 오르니 주택매매가 저조하게 되었다. 불법 난민의 국경유입은 정부의 방관속에 계속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고 범죄와 마약의 유통도 증가세에 있다. 펜데믹은 어떤가 ? 맞으라는 예방주사를 5번을 맞았는데도 2번이나 걸린 사람이 있다. 정말 효과있는 주사일까 ? 펜데믹에 걸려 고생해도 펜데믹약을 많은 의사들이 처방하지 않고 있다. 어떻게 하라는 건가 ?
2022년은 미국의 대통령직에서 내려온 트럼프 의 존재를 없애려는 세력과 버티려는 트럼프의 운명적인 한해가 되고있다. 대통령직에서 내려온 “트” 의 집을 급습하고 1월6일 의사당 난입의 주모자로 만들기 위해 민주당의 “펠로시” 와 공화당의 “체니” 의원은 의회 조사위원회를 만들어 6개월간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들었으나 결과는 없다. 트대통령은 나이와 여유도 많은데 왜 이런 고통스런 일에 얽메어 떠나지 못하는가 ? 부정으로 정권을 잡았을 법한 민주당은 “트”가 없어야만 자신들의 왕국(?) 을 완성 할 수 있고 , “트” 는 국가의 장래를 위해 이 부패세력을 없애야 하고, 이일은 본인이 아니고선 해낼 수 없다는 신념이 있기때문이다. “Fox News”를 제외한 다른 뉴스 미디어가 부패세력을 지지하니 이 두 그룹의 기싸움이 끝나지 않는 것이다.
바이든은 부통령시절 아들과 함께 중국과 “우크” 나라로 부터 미국의 국익에 해로운 일을 한 것에 대해 법무부가 조사하지 않고 있다. 2020년 대선기간동안 보고된 부정한 일에 대해서도 법무부가 조사를 않고 지나갔다. 11월8일 중간선거에는 이런 의문점과 함께 경제와 정책을 심판 받는 선거가 될줄 알았는데 역시 뉴스미디아의 역활로 역대 최대의 우편투표 참여가 현실화 되고 개표하는 날 우편투표지가 밀려와 이해 할수 없는 선거 결과를 가져왔다. 댓글 참여자들은 한번 속이는 것은 속인자들의 잘못이지만 두번 속는 것은 속는자 들이 바보다며 미국 국민들은 졸지에 바보가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부패세력을 이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30세의 청년 “셈”은 암호화패 거래소를 만들어 짧은 기간에 억대 부자가 되었다. 그는 민주당에 큰 금액을 헌금하고 인사들과 친해졌다. 또한 민주당이 “우크” 에 전쟁펀드로 준 돈의 일부가 “셈” 에게 투자 되고 “셈”은 민주당에 그돈을 헌금하고 그돈은 다시 바이든한테 돌아오는 돈세탁의 연결고리가 점차 수면위로 올라와 “ Fox News”는 밝혀야 한다고 보도한다. “셈”은 세계 120만명의 투자액을 잘 관리 못하고 파산해 버렸다. 민주당이 “셈”을 조사 하겠는가? 아리조나 상원의원 “테드 크루스”는 트럼프를 극도로 미워해 취임식날까지 파토를 내든 인물이었지만 “트” 의 행동과 생각이 나라의 장래를 위한 것이라는 판단이 된후 적극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Justice Corrupted” 미국 사법부의 부패 라는 책을 최근 출판했다.
공화당도 뿔뿔히 갈라지고 있는 이때 테드 크루스의 마음을 이해하고 전국민이 힘을 합해 부패세력을 물리치는 일에 나서야 한다. 정부가 없으면 직장, 가정도 안전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트”를 괴롭히던 같은 공화당 “체니” 도 와이오밍주민들의 이해로 밀려났다. 20년 민주당의 뿌리 역활을 한 펠로시도 의아한 남편의 밤도둑 사건을 만들고 나이많아 무대뒤로 사라진다. 한 제국이 문을 닫는데 250년이면 충분하다는 넷티슨의 댓글보다 아직은 자원과 기술로 세계를 이끌 미국의 강대함을 지키고 이를 좀먹으려는 마적단(?) 들을 물리치는 일에 적극 동참해 앞으로 250년은 더 자유, 민주, 진리의 수호국으로 미국이 남길 빌어보자. (11.20.2022)
미국의 역사 제 55회 : 혼돈의 미국 , 혼돈의 세계 (11.21.2022- 7.20.2023)
2023년 7월 4일 미국 건국 247회 생일을 맞으며 이런 생일을 몇번이나 더 맞을 수 있을지 갸늠하기 어려운 미국을 생각해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2월20일 2022 였으니 1년반을 끌고 있는 전쟁의 여파로 원유와 생산자제의 유통이 원활하지 못해 전 세계는 혼란에 빠지고 있다. 식량도 부족해 조금 더 있으면 빈곤국의 식량대란이 우려된다. 미국과 nato 국은 우크를 지속적으로 도와 곧 끝날 수 있었던 전쟁은 러시아에게 큰 피해를 주며 이제는 현상태를 유지 하는지 국제회의에 우크의 대통령이 나와 참석하고 한국의 대통령이나 미국의 고위 인사들이 쉽게 우크의 전쟁지를 방문하는 일이 빈번해 지고 있다.
트럼프대통령이 재야에 있는데도 민주당의 비리가 발표되면 때 맞추어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죄목이 발표되고 재판이 이루어 졌다. 뉴욕검찰은 트럼프가 27년전 한 여인에게 성적희롱을 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법정 기소 년한이 7년인데도 맨하탄 법원은 금년 한해에 한해 무한정 기소 할수 있도록 시 의회에서 법을 고쳤다. 언론은 트럼프가 곧 감옥에 갈 것처럼 방송하고 잘 모르는 시민들은 그렇게 알고 있을 수도 있다. 트럼프는 지속적으로 MAGA 운동을 위한 연설모임을 도시를 바꿔가며 시행하고 있는데 가는데 마다 수만명의 지지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 동안 2024 대선에 출사표를 던진 공화당 인사가 트 이외에 11명이나 되는 데 이 또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젠가 다시 뭉쳐 트를 공격 할 것만 같아서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또 있다. Fox News는 CNN, 이나 MSMBC 에 비해 매우 보수적이고 정론 방송을 유지 한다. 터커 칼슨, 션 헤니티, 쥬디 지인, 등 유명 앵커들이 활동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바이든 가족과 행정부의 비리를 방송하는데 주져하지 않아 청취율이 높다. 그런데 전자개표기 회사가 폭스뉴스를 고소했다. 이유는 전자개표기가 나쁘다고 방영해 손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가 있는 한 정확치 않은 소문이라도 방영은 구애받지 않는다. 그런데 폭스사는 한발 뒤로 물러서며 터커를 내보내고 보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합의를 해 버렸다. 왜 그랬을까 ? 만일 재판을해서 전자 개표기가 지면 2020년 선거가 완전치 못했다는 결론이 나므로 정부가 개입 했을까 ? 이해 할 수 없는 이유로 터커는 계약기간이 남아 있는데도 독자 길을 걷게 되었다.
2023년 6월은 미국의 부침에 한가닥 희망을 주는 달이 되었다. 공화당의 하원장악에 힘입어 케빈 멕카시회장은 정부지출에 부랙을 걸고 바이든 가족 비리조사 위원회(Oversight Commity) 를 만들어 4개월동안 조사한 바이든 가족의 비리를 공개했다. 바 가족 9명에게27개 구좌로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중국 등으로 부터 부정한 돈이 들어와 자금세탁이 이루어진 증거들을 제시했다. 이후 많은 전직 법무부, FBI 요원들의 증언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폭스뉴스이외엔 별로 언론에 공개 되지 않고 바이든은 가는 곳마다 기자들의 비리의혹을 공개하라는 질문에 난감해 하고있다. 한 기자는 당신이 외국으로 부터 돈을 받아 나라를 팔아먹는 일을 했다는데 대답해 주세요라는 질문에 기자는 그 돈을 봤느냐고 애끗은 대답이 돌아왔다. 바이든의 운명이 바람앞에 등불이지만 그를 감추려는 세력은 또 어떤 기묘한 방책으로 이 난국을 피해갈지 미국의 앞날이 밝지 않다. (07.20.2023)
미국의 역사 제 56 회 : 미국의 부패를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 (해설 4),( 07.21.2023 -12.13.2023)
금년 6월 하원은 바이든가족의 비리를 처음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개별적 소환을 통해 조사가 시작 될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요 언론은 이를 보도하지않았고 폭스뉴스를 비롯한 몇몇 언론만이 이를 보도했다. 전 하원의장인 케빈 멕카시의 우유부단함이 결국 의장직 퇴출로 이어졌고 신임 “마이클 죤슨” 의장은 선출 되자마자 우크라이나 지원등에 제동을 걸면서 바이든 탄핵 심리안을 표결에 붙여 12월13일 하원의 동의을 얻게 되었다. 이제 본격적인 탄핵의 시작점을 점화시켰다. 같은 시간 아들 헌터는 의사당앞에 나와 아버지는 자신의 비지니스와 무관 하다는 논리로 모든 잘못을 혼자 지고 가겠다는 의중를 밝혔다. 하지만 하원조사 위원회는 이미 많은 증거를 확보해 무난히 끝날 수 없음을 암시했다.
지난 10월7일, 이스라엘과 나란히 위치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날아든 5천 여발의 로켓포탄에 애끗은 이스라엘 시민 천2백여명이 숨지고 200여명이 납치되어 이스라엘은 전쟁을 선포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하마스는 이스람 세력의 테러리스트 인데 민간인의 집, 병원, 학교 등에 숨어 활동하니 자연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고 평화주의자들은 이스라엘에게 종전을 권유하지만 이번참에 이스라엘은 좁은 가자지구를 구석구석 누비며 하마스의 끝을 보려는 입장이다. 지난 70년동안 덤빌때 마다 백배로 갚는 이스라엘에게 값없이 죽어가는 팔레인들이 가엽다.
이스라엘 전쟁이 시작되므로 난감해 진건 우크라이나의 입장이다. 미국과 유럽의 원조로 가까스로 지키고 있는 우크의 재정이 전쟁이 길어지므로 앞날을 보장받기 어렵게 되었다. 우크대통령은 바이든을 만나러 왔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 하원은 우크의 지원을 거부했고 바이든의 탄핵이 도마위에 올라와 있으니 악수하는 손에 힘이 빠진다. 푸틴이 전쟁을 고만하자고 하면 좋으련만 그렇게 쉽게 끝낼 러시아가 아니다. 누구든 우크 전쟁을 중재하는 사람은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것이다.
미국이 직접 전쟁에 관여하지 않고 있지만 전쟁의 확전여부에 따라 미국의 입장이 달라질 수 있다. 한없이 오르는 물가, 범죄확산, 마약유통, 국경 문제로 지도자의 능력이 어느때보다 요구되는데 현실은 암울하다. 외교에도 O점, 내치에도 O 점 , 앞을 내다 보는 안목도 기대하기 어렵다. 2023년은 이렇게 저무는가, 고요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은 년말이 탄핵의 어지러움으로 한바탕 요란한 겨울을 맞이하게 될지 걱정이 앞선다. God Bless America !! (12.13.2023)
미국의 역사 제 57회 : 미국 독립기념일 248주년을 맞으며 돌아보는 건국정신 (해설 5),( 12.14.2023 -07.04.2024)
미국은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의 생명과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주장하는 독립선언서에 기반을 두고 탄생되었다. 그리고 이 신앙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진실을 말할수 있는 자유를 얻기위해 끝없는 시련과 희생이 따랐다. ” Freedom is NOT Free ” 라는 건국시 외침이 역사를 통해 내려오며 자유세계는 힘을 합했다. 그러나 근래에는 힘의 논리를 앞세워 기본적인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려는 세력이 등장하고있고 이를 저지 하려는 움직임과 갈등하는 모습은 순진한 국민들을 혼동시키기에 충분한 세상이 되었다.
하나님이 준 성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일, 종교나 피부색으로 나누어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일, 세계적 부자들이 모여 지구상 모든 나라들은 견제하려는 움직임, 민주주의를 앞세워 진실을 외곡하는 정치적 파워게임에 자유세계는 몸살을 앓고 있다. 부정선거가 난무하고 방해자들은 감옥으로 직행하는 옳고 그름이 분간되지 못하는 시간속에 국민들은 분별력을 찾아야되는 숙제를 안고 살아간다.
미국정부는 4년마다 대통령을 뽑으며 선거가 끝난 다음날부터 정치와 함께 4년후의 선거를 준비하는 패턴으로 움직인다. 돌아 보건데 지난 3년의 정부는 올바른 정책보다는 반대파를 잡으려는 일에 집중해 결과적으로 외교의 실패, 국가 안위의 불안, 경제적 안정을 실패하고 있다. 트럼대통령 재직시 의사당 난입사건 조사 , 백악관 서류 조사, 수많은 트럼프 개인적 일에 대한 조사로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대부분 헛수고에 그쳤다. 4년의 세월은 그렇게 메워지고 다음 선거의 시간이 오고있다. 첫번 후보 토론에 현 정부의 위상이 떨어지고 트럼프의 선전이 표면화되었다.
1차 트럼프시대는 잘 몰라서 (부정세력) 다루지 못한 부분도 다음번 선거에 이기면 이제는 분별력있는 눈으로 잘 할 수 있을것이다. 국경은 안전해지고 불온한 세력은 퇴출될 것이다. 탁월한 외교로 불행한 전쟁들은 종식되고 평화를 위한 조약들이 맺어지길 바란다. 국가는 더욱 안전과 번영의 길을 걷고 세계는 미국을 존중 하게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건국선배들이 이루려했고 그동안 누려왔던 “자유”를 온전히 다시 찾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국민들의 옳바른 선택이 남았다. God Bless America ! (07.04.2024)
미국의 역사 제 58회 : 하늘이 도운 트럼프 제 2 기 를 기대하며…( 07.05.2024 -12.15.2024)
바이든 정부 4년이 종지부를 찍은 날은 11월 5일이었다. 세계의 눈은 일제히 선거 표지판을 향했고 트럼프는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 되었다. 미숙하고 굴절된 정치 방향으로 국익은 훼손되고 국민들은 방황했다. 오염된 언론과 소인배 정치인들 사이에서 미국은 오랜 시간 잘 버티어 내었다. “트럼프” 는 마치 이날을 맞이 하기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오뚜기 같이 일어섰다. 11월5일이 없었다면 미국의 앞날을 예측 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 앞에 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는 선거기간동안 뉴욕시 법정을 6주간 출석했고 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최초의 전직대통령이 되었다. 이 사실은 그의 지지세를 꺽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7월 펜실바니아에서 있은 집회에서 암살범의 총알이 그의 머리 1인치를 빗겨 지나가 살았다. 그후 4개월동안 민주당 경쟁자 두명을 이겼고 7개 경합주를 모두 휩쓸어 20년만에 대중투표에서 승리한 공화당 소속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미국 정치를 재편하고 공화당을 재편했으며 민주당의 잘못이 무었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미국이 변화를 갈구했다면 트럼프는 이제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지 지켜봐야된다. 그는 수백만 명의 불법입국자를 추방 할 것이며 연방정부의 일부를 해체하고 정치적 적대자에게 보복하고 많은 사람들이 검열적이며 부패하다고 보는 기관들을 해체 하겠다고 했다. 그는 단순한 생각을 가지면서도 복잡한 사람이며 다른 정치인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나 전쟁을 싫어 하는 평화주의자며 미국의 강력한 국방력 아래 세계가 질서위에 공존하기를 희망한다. (12.15.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