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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문화와 힌두문화의 산실 캄보디아, 인도 여행

앙코르 문화와 힌두문화의 산실 캄보디아, 인도 방문기(11.21.2912)

캄보디아편

A.D 800년-1200년까지 캄보디아 씨엠립(Siem Reap)에서 활발하게 꽃피운 크메르제국의 앙코르문화는 14세기후반 세력이 약화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정글에 묻혀 버려진 방대한 지역의 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것은 1850년대후반 그러나 공산치하 크메르루스의 점령으로 베일에가려진 이 유적이 1992년에 와서야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 되었고 지금은 세계 7대불가사의 하나이면서 동남아 최대의 관광지로 하루2000명이상의 관광객이 모이는곳이다.

캄보디아 일정 7일을 보내기위해 10월 20일 새벽 1시20분 비행기로 인천에도착하니(12시간반) 오후 6시30분, 바로 7시30분 비행기로 캄보디아 씨엠립공항(5시간반)에 내리니 밤11시30분 늦은 시각이다. 한국 테마관광 장부장님의 안내로 Ankor Palace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캄보디아는 입국시 공항에서 사진 한장과 $20을 제출해 비자를 받는다.

10/21/(sun): 아침에 본 호텔은 식사와 조경이 일류급이며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이 많이 보인다. 아침인사 good morning은 “알렌 쑤이 쑤다이”로 시작된다. 우리에겐 낮선 발음이다. 한국의 남북한보다 큰땅이지만 인구는 1200만명밖에 안되며 푸놈펜이 수도이고 여기서 남쪽으로 뻐스길 4-5시간 걸린다. 종족은 크메르족, 종교는 불교가 인구의 95%을 차지한다. 말레이지아 쪽 해안선을 남쪽에 안고 서북쪽으로는 태국,정북쪽은 라오스,왼편엔 베트남의 열강들 사이에 허약한 모습을 보이는 지형이다. 마침 지난 15일 캄보디아의 운명과 생을 거의 같이한 시아누크국왕의 타계로 국상중 이라 23일까지 모든가무가 중지되어 거리가 조용하며 큰가게마다 꽃으로 접은 영정을 걸어놓고 있다. 거리에는 오토바이가 많고 뚝뚝이라는 자전거에 메단 3륜차가 손님을 싫고 달린다. 고유의 언어와 글짜가 있는데 올쨍이 모습같은 간판의 글이 아랍어보다 더 어려워 보인다. 알파벳은 50자쯤되는데 조합이 어려워 한국안내인은 배우길 포기했다고한다.

한국 관광객이 1년에 20만명이 방문하는만큼 한국식당 여행사 간판이 많이 보인다. 북한에서 나온 평양식당도 있으며 한국교회 특히 한국 선교사들이 관리할 것같이 보이는 한국학교, 영어학교, 고아원 등도 보인다. 앙콜유적까지는 12Km를 가야되는데 한국의 도움으로 길과 가로등을 설치해준데 데한 우정의 탑도 양국의 우의를 상징하듯 길가에 세워져있다. 아직도 길가의 상점이나 도로상태가 낙후되어 있고 상수도 하수도시설도 변변치않아 생활이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한국의 혼을 심는 현지 한국인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좁은 고국을 떠나 우리땅의 영역을 넓힌다는 생각에 감동 스럽기도 하다. 오늘은 첫날 앙코르 제국의 발상지이자 신성한 장소로 여기는 꿀렌지역 관광에 나섰다. 호젓하고 좁은 산길을 1시간쯤 달려 도착한곳에는 사찰이있고 큰바위를 이용해 맨꼭대기에 좌불상을 안치해 놓았다. 여기저기 확성기를 통해 기도소리가 소란스럽고 곳곳에 향불을 피워 향냄세가 건기에 접어드는 이곳 더운 날씨와 함께 스트래스로 닦아온다. 길거리에는 잔돈을 손에쥔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있는데 한쪽에선 돈을 바꿔주는 가게도 보인다. 미화 1$=4000리엘( Riel)의 환율인데 지폐가 100, 200, 500, 1000..10만까지 있으니 적은 돈으로 더 적은 돈을 만들어 적선을 하는 모습으로 보이나 물어볼 수가 없어 추측만 하기로했다. 모슬렘처럼 적선은 불교에서 하나의 의무인지도 모른다. 좌불상을 내려와 길가의 강물속에 조각되어있는 작은 불상들도 보고 조금더 들어가 폭포가 있는 계곡에서 준비해온 삽겹살을 구워 야채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날씨는 더운데 준비하는 현지인 아가씨는 두꺼운 옷을 입고서도 땀을 흘리지 않는다. 피부가 이곳 기후에 적응이 되어서 인 것같다. 점심후 돌아오는길에 반테이슬레이(Banteay Srei)사원에 들렸다. 10세기 후반에 지어진 이 사원은 기둥의 섬세한 조각이 아주 아름다운데 석양에 사원이 호수에 반사되는 모습도 출중하다. 지금도 계속 복원중이라 전체의 모습을 볼려면 시간이 많이 흘러야될 듯싶다. 시내로 돌아와 Market Place라는 번화가의 Red Piano식당에서 이태리식 저녁을 먹었다. 관광객들이 많이 붐비지만 가무가 없어 비교적 조용한 저녁이다.

10월22일(Mon): 새벽 4시30분 기상한것은 앙코르왓 일출을 감상하기 위해서다. 전기사정이 좋지 않아 새벽이지만 깜깜하다. 조심스럽게 사원안으로 들어가 달빛에 길게늘어선 앙코르왓이 잘 반사되는 큰호수앞에 자리를 잡았다. 구름때문에 일출은 멀리 갔지만 날이 밝은후 빨간 연꽃잎이 반짝이는 호수에 길고 장대한 사원이 반사되는 모습은 장관이다. 아침식사를 마친후 다시 와서 거대한 앙코르왓 사원안쪽 회랑을 관람했다. 3층으로된 사원의 높이는 65m 한쪽길이가 200m나되는 정방형이며 사원 주위로 성벽을 쌓고 그 밖은 인력으로 판 호수(해자)로 둘러 쌓여 한쪽 길이가 5.5Km나 된다. 250m의 다리로 육지와 연결되는 정문은 동쪽이 아닌 서쪽이다. 따라서 왕궁인지 왕실의 무덤인지 조차 의문이 가는 사원이다. 왕실의 문은 대게 동쪽이므로 사원의 목적이 의문을 둘만하다. 사각기둥 60개가 떠받치고 있는 1층회랑의 벽면은 돌을 조각해 만든 벽화가 8가지의 주제로 일목 요연하고 또한 정교하게 조각되어있다. 인도 창조설화부터 전쟁묘사 , 우유의 바다를 저어 가다 온갖 생명체가 탄생한다는 내용이다. 악마와의 싸움을 묘사한 신화에서 부터 일상생활까지 묘사한 조각들은 1000년의 세월에 변하지않고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놓고있다. 1000년동안 지진의 피해가 없어 다행이고 다만 천둥 벼락으로 많은 탑들이 무너져 내린 모습이 아쉽다. 2층회랑은 1500명이 넘는 아름다운 천상의 무희인 압사라가 조각되어있다. 3층으로 올라가는 층계는 70도의 가파른 층계로 되어있는데 올라가 보면 몇개의 방과 불상들이 있고 정중앙에는 더높이 올라간 중앙성소탑이 있다. 12세기 초에 만들어 진 이 사원은 비쉬누신 에게 헌정된 힌두교 사원이었는데 후에 불교사원으로 전환되었다고한다.

앙코르왓사원은 많은 유적가운데 규모가 가장크고 좌우의 탑들과 심어진 나무까지 완전 대칭을 이루며 크메르 건축예술의 극치를 이루는 역사적인 예술품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타지마할을 꼽는다면 가장 장엄한 건축물은 앙코르왓이다. 돌아나오는 길 양옆에는 복원이 안된 대칭되는 건물이 있는데 Library라고 부른다. 제사때 쓸 준비물들을 저장해둔 창고일것이다. 사원을 나와 한국식당 대장금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 초기유적지를 가는데 비가 내린다. 캄보디아는 건기(11-4월)에는 서늘하고 건조한 날씨며 우기(5-10월)는 고온다습한 날씨다. 3-4월은 가장더운날씨로 섭씨35도를 오르내린다. 습도가 많아 땀이나 옷이 다 젖어 버리는 데도 일하는 사람들은 긴팔과 두꺼운 옷을 입고있다. 캄보디아인들은 키가 작고 눈이 들어갔으며 피부가 약간 진한색이다. 아주 어린아이들이 자기키보다 큰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하는 모습이 신기롭다. 초기유적군인 프레아코 사원과 바콩 사원에 도착하니 비가 개인다. 아코르왓의 모체가 될법한 이 사원들도 불교의 수미산을 형상화한 앙코르식 건축양식이다. 사원을 나와 차에 오르는데 어린학생들이 앙코르사원을 배경으로 만든 내사진액자를 건낸다. 언제사진을 찍었는지 또 언제 푸린트를 해서 액자를 만들었는지 그 빠른 솜씨에 $5.00을 투자했다. 시내로 들어와 현지인 식당에서” 수키”라는 소고기,생선,야채를 넣어끓여먹는 식사로 저녁을 먹었다.

10월23일(Tue):앙코르 유적군탐사중 “앙코르 톰”사원을 보러 일찍 호텔을 나왔다. 이사원은 특이한 형상이 군락을 이루어 있는데 사원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도시형태를 갖추었다. 먼저 남문입구에 들어서니 키를 넓는 돌 불상들이 좌우 일렬 배치되어 육중함을 자랑한다. 위대한 도시라는 뜻의 이 사원 군락은 동서남북 각3km 높이 8m의 성벽으로 둘러쌓여있고 인공호수가 그주위를 에워싼 흔적이 있다. 전성기에 인구 100만명이 살았을것으로 추산되며 15세기 중엽 태국의 시암족의 침공으로 도시가 사라졌을것으로 보고있다. 5개의 출입문이 있는 성벽안에 왕궁과 바이온사원, 바푸온사원, 각종테라스등이 배치되어있고 복원중인 사원과 방치한채 버려진 사원들이 즐비하다. 자야바르만 7세 왕은 1200년대 이읏 부족들을 다 물리쳐 탁월한 군사력과 정치력을 갖추어 앙코르왕국을 번영시킨 위대한 지도자였다. 사원마다 정교하게 각인된 부조들은 그시대의 생활상이나 전투장면 ,신에대한 경의등이 조각되어 있으며 어떤 곳에는 요염한 모습의 압사라 부조가 눈길을 끈다. 세번째문 근처엔 바욘 사원이 있는데 4면이 얼굴인 불상들이 크고 작게 군락을 이루어 특이한 형태의 사원임을 나타낸다. 어떤 사원을 지나칠때엔 크메르루스와의 전쟁중 지뢰를 밟아 다친 상이용사들이 악기를 불며 도움을 요청하는그룹들도 있다. 시내로 나와 아시아식 부페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엔 푸레아칸사원과 프레닉펀, 타프롬사원을 차례로 방문했다. 이 사원들의 특징은 스펑나무가 건물을 통째로 무너트리는 무시무시한 괴력을 보여주는 사원들이다. 이 나무의 씨가 바람에날려 사원건물 벽에 자리를 잡으면 한쪽은 물을찾아 아래로 다른한쪽은 태양을 향해 위로 뻗으면서 자라 수백년동안에 사원건물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건물이 부숴지는 것이 아깝지만 그것 때문에 관광명소가 됬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다. 프놈바켕사원을 끝으로 유적탐사를 마치고 시내로 돌아왔다. 시대별로 수없이 많은 비슷비슷한 사원들을 보면서 위대한 제국 앙코르 역사는 희미한 흔적을 보일뿐 빈곤과 열악한 환경의 이시대를 비웃고 있는 듯이 보인다. 호텔로 돌아와 잠시쉬고 중국식당 Woodhouse 에서 저녁을 먹었다.

10월24일(Wen): 밤새 비오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하루종일 비가 올줄알았는데 다행이 화창한 날씨다. 오늘은 톤레쌉(Tonlesap)호수 관광에 나섰다. 이호수는 동남아에서 가장 큰호수로 캄보디아의 젖줄 엮활을 하는 곳이다. 우기와 건기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는데 수위가 가장낮은 5월에는 호수 면적이 경상남도(2500km sq)만 하지만 히말라야에서 눈이 녹는 우기에 접어들면 메콩강의 수위가 높아지고 프놈펜에서 역류한 물까지 호수로 유입되면서 그면적은 2배로 늘어난다. 현제 호수 주변에 거주하는 수상가옥은 국적이 없는 베트남 사람들로 이들은 일찍 조국을 등젖기에 돌아 가지도 못하는 망명자들이다. 1시간쯤 강변으로 난 작은 길을 달리는데 길 주변으로 빈약한 환경의 상가 및주거용 목조 건물들이 우리의 눈을 찌푸리게 한다. 워싱톤 DC 포토맥 강변의 Riverside Rd에 비하면 같은 이름인데도 천국과 지옥이다. 강변쪽에 팔뚝만한 막대기 몇개에 의존된 낡은 집에 좁은 방안이 환하게 보이는데 화장실 문제가 의문이다. 아무래도 모든 오물이 강물로 흘러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조국에도 이런날이 있었을것을 생각하니 박대통령의 치적이 새삼 떠오른다.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고 못만나는것도 민족의 운명이다. 미국에서도 어려운 때 지도자를 선택하는 선거일이 다가오고있다. 호수에 가까워 오니 한국에서 도와 줄 법한 교회이름, 선교센터 등의 한국간판이 여러곳 보인다. 물가가 싸니 적은 돈으로 선교활동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다. 그러나 이들이 대대로 유지해온 종교를 개종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한나라 건너위치한 대국 중국이 감히 어쩌지 못하는 이유가 될수도 있다. 금방 서 버릴 것같은 낡은 배로 옮겨타고 호수 관광에 나섰다. 30분 정도 달리는데 아버지와 딸이 탄 작은 배가 같은 속도로 와서 딸이 배에 오른다. 음료수를 사라고 콜라병을 내민다. 달리는 배에서 돈을 꺼낼수도 없어 머믓 거리는데 거절 당한셈을 아는지 순식간에 내려 자기배로 건너간다.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고 내리는 착각을 일으킨다. 위험한 일이지만 빈곤이 가져오는 헤픈닝이다. 곧 수상가옥들이 주변으로 보이는데 호수가의 수위가 낮은듯 크고작은 수초들을 안고 허약하게 지어진 임시거쳐들이다. 어느집은 목조 배위에 어느집은 큰 드럼통위에 출렁이는 물결따라 피난민의 생활 환경도 출렁거린다. 페루에서 본 수상가옥은 여기 비하면 양옥집이다. 베트남 학교의 건물도 있고 작은 수퍼도 보이며 적은 규모의 상가도 보이지만 대부분 민가로 주민 한두명씩 보이며 어린애들은 한가로이 집안에 메단 그네에 몸을 언고 노는 모습이 측은하다. 출렁이는 목선건물에 흔들리는 그네 그것은 갈곳없는 무국적 망명인들의 현실이다.

한국에서 누가 만들어 준 식당건물과 태국기가 걸린 전망대가 바라보이는 맞은쪽 건물에 내려 이층으로 올라가니 우리국기가 가깝게 펄럭이는게 보인다. 우리가 도와 주었다는 뜻인듯 하지만 여기가 한국땅 이라는 뜻으로 와 닿는다. 적은 목선들이 생활용품이나 연료를 이동하면서 파는 모습도 보이고 어느배엔 작은 꼬마 아이가 손을 내밀어 구걸하는 모습도 보인다. 각박한 생활상이 안타까워 사진 촬영하기가 민망 하기 까지 한 느낌은 여행중 처음이다. 우리는 미국에서 너무 편안한 생활을 하고있음이 아시아에 와서야 절감한다. 강물은 옷이 젖을가 걱정되게 더러운데 큰 고기들이 많이 살고있다. 어떤책에는 물반, 고기반일 만큼 많은 어류가 이곳에서 잡힌다고 하며 캄보디아인의 큰 수입원이라한다. 아마 이곳의 수초가 정화작용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자연이 주는 값없는 혜택이 빈곤속에서도 생존을 유지할수 있게 하는것을 보면 신의 존재가 확실하다. 시내로 돌아 가는육지 길목의 현지인들의 모습도 망명인들의 수상가옥처럼 열악하긴 매 한가지다. 그러나 거의 모든 집 한편에는 금색의 작은 기둥에 지붕을 언진 사당이 있는데 아침마다 향을 피우며 기도하는 이들의 불교의식은 철져하다. 점심식사는 이제까지 본 환경과는 전혀다른 일식집 고베에서 데팡야기 고급식사를 대하니 미안한 마음이든다. 일본에 유학하면서 배워온 일식당 주인은 이런식당을 몇개 더갖고있다고 한다. 호텔로 돌아와 쉬면서 수영도하고 책읽다가 오후 3시 재래시장 답사에 나섰다.

오토바이와 자전거 또또라는 인력거등 사이로 인파가 넘쳐나는 재래시장터에 오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비좁은 가게들은 물건을 가득 채우고 거래가 한창인데 나이어린 여점원이 많다. 학교갈 나이인데도 부모는 장사해 돈을 벌기를 원하는 모양이다. 교육정책이 안좋은것도 이유지만 환경은 공부할 여건이 되지않고 정부도 국민들이 많이 배우는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눈치다. 같은 아시아라도 한국,일본,중국등의 아시아 부모의 마음과 다르다. 생필품에서 건축자재 식료품 시장까지 함께있는 몹시 붐비는 재래시장에서 놀랜것은 경찰이나 경비나 안내인이 한명도 없는것이다. 특히 금은 방에서는 귀금속판매는 물론 인근 국가에서 건너와 거래된 외국돈을 현지돈으로 바꿔주는 환전상까지 겸하는데 큰돈뭉치를 수북히 유리창구안에 보이게 놔두고 거래를 하고있는데도 아무일이 없는것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아직은 순진하고 부정한일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이 보인다. 시장을 나와 앙코르시절 인공 저수지를 관광하고 이곳에서만 생산되는 야자열매도 시식해 보았다. 어린애들이 한국노래를 부르고 구걸을 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돌아오는길에 한국인이 현지인을 고용해 운영하는 맛사지 집에 들려 전신마사지 1시간을 받았다. 우리가 돈을 내지 않지만 1시간 전신을 맛사지하는 힘든일에 얼마를 벌 수 있는지 궁금하다. 저녁식사는 오늘부터 가무가 허락되어 아마존 앙콜식당에서 앙콜문화 공연을 보면서 현지음식을 부페로 먹었다. 압사라 무희전통복장으로 1시간동안 진행되는 민속춤이 아주 아릅답다.

10/25(Tur): 내일 인도로 이동하기에 앞서 하루를 호텔에서 쉬면서 수영과 인도공부 그리고 캄보디아의 오늘과 내일을 생각해 보는 휴식의하루다. 그러나 점심은 평양냉면관에서 북한에서온 무희들의 작은 공연을 보면서 먹기로 되어있다. 북한에서 운영하는 식당은 비교적 넓고 안내인들이 친절하다. 손님은 전부가 남한에서온 관광객들, 여기서 만큼은 적대감정없이 반가운 동포다. 반갑습니다의 환영인삿말 노래를 시작으로 아코디온,가양금연주, 기타반주와 함께 30분정도 춤을 선보인다. 하루 빨리 통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있다. 저녁식사는 우아한 현지식당 Tropical 식당에서 한후 Smile of Angkol이라는 공연장에 갔다. 고전춤과 영상을 적당히 섞어 만든 공연으로 시작한지 얼마되지않는 관광상품이다. 이런 계획들이 더 많아져서 이 나라가 좀더 잘사는나라로 발전하길 빌어본다. 강성했던 크메르 왕조는 태국과 베트남의 계속된 친입으로 내리막길을 걷다가 결국 캄보디아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진출한 프랑스에의해 식민지화 되고 만다. 1954년 프랑스로 부터 독립한 캄보디아는 얼마전 타계한 노르돔 시아누크를 왕으로 추대 하면서 왕국으로 출범했지만 시아누크의 반미,친중정책이 이어오다가 1967년 공산주의자 들의 반란에 친미쪽으로 흘러 공산주의자들과 갈등을 겪어 중국에 망명한다. 그 사이 공산세력 폴 포트 정부에의해 민족 전인구(700만명)의 1/3에 해당하는 200여만명이 학살을 당해 킬링필드로 유명하다. 강대국 의 손에서 해방되면서 발생된 비극중 하나다. 우리나라도 한국의 동란으로 250만명이 희생되고 인도는 영국으로 부터 해방되면서 모슬렘과 회교도의 갈등으로 500만명이 희생되엇다. 시아누크의 일관성없는 정책과 미국의 잘못 계산된 폴포트의 지원등 으로 무고한 국민만 무참히 죽어간 사건들이 이 시대의 비극이다. 이제 파란만장한 시아누크공도 이생의 연을 달리했으니 좋은 지도자를 만나 이 나라 에도 서광이 비칠 것을 기대해본다. (캄보디아편끝)

10/26(fri):캄보디아 일정을 마치고 씨엠립 공항에서 오후2시 말레이지아 쿠아라룸푸르 공항에 5시30분 도착했다. 곧이어 6시30분 출발, 인도 뉴델리 공항에 도착하니 밤 9시가 되었다. Tauck 여행사에서 마주나와 1시간 거리의 델리 시내 Oberoi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인도(India)편

10/27(sat): Tauck 여행사에서 운영하는 “Spotlight on India” 12일 일정은 인도의 수도 뉴델리와 타지마할이 있는아그라 그리고 갠지스강의 도시 바라나시를 중심으로 인도북부의 문화유적을 관광하는 코스로 유명 체인호텔 Oberoi 와 협력으로 이미 잘 알려진 코스다. 매주 모집되어 120차례의 경력을 자랑하는 이번 여행엔 12 일 코스 10명과 18일 코스로 서남부 6일이 추가되는 코스에 등록한 8명이 한조가 되었다. 아침8시 Director Abhijat Sharma의 인사와 인원이 소개되고 일정에 대한 설명이 있은후 곧 뉴델리 시내 Sight see 관광에 들어갔다.

10억 인구를 자랑하는 거대한 인도의 공화국 수도는 히푸연 잿빛 안개속에 그 분주함을 드러내놓고 출근길의 차량행열이 길을 메운다. 고대의향기와 전근대적인 혼란, 그리고 세련된 현대적 모습들이 섞여있는도시, 파란색의 오토릭샤, 사이클 삼윤차, 인도 전통 복장의 여인이 운전하는 고급 승요차 사이를 한사람 또는 두사람이 탄 오토바이가 비호같이 비껴간다. 3000년 역사의 도시 힌두와 모슬렘 속에서 끝없이 갈등하는 이 나라는 길에 넘치는 차량행렬만큼이나 복잡한 나라다. 중국같은 대국이지만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나라이기에 민중의 소리를 다 듣기위해 해방이후 끝없는 정치적 방황이 필수지만 이해할 수없는 종교적신념은 이나라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대통령궁과 대사관거리, 영국 식민지 시대의 저택들을 지나 무골제국 2대왕 후마윤 왕묘 ( Humayan Tomb) 을 보기위해 차에서 내렸다. 왕의 사후에 페르시아출신 부인의 명으로 지은 이 건물은 후에 타지마할의 본보기가 되었다고 한다. 정사각형의 높은 돔 건물은 당시의 건축양식의 우수함을 남기고있다. 다시 차에 돌아와 넓은 광장을 도니 파리의 개선문 처럼 보이는 인디아 게이트가 나온다. 인디아게이트는 1차대전 참가에 희생된 8만5천명의 명단이 기록되있고 바로 옆에는 인도 파키스탄 간의 3차 전쟁으로 희생된 군인들의 넋을 위로 하기위한 무굴식 조형물이있다.

이태리식 식 사를 주로하는 자그마한 식당에서 피자로 점심을 대신하고 오후 마하트마 간디의 화장터 였고 지금은 추모공원이 된 라즈가트(Raj Ghat)에 들렸다. 변호사출신의 간디는 인도 독립에 영향을 주었고 비폭력주의를 평생 제창했지만 폭력에 의해 희생되었다. 수많은 학생들과 함께 추모인들의 발길이 끝이지 않음은 인도인들이 그를 존경과 사랑으로 지금도 추앙하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북쪽에 평화의 숲에는 초대수상인 자와할랄 네루 그리고 그의딸이자 인도 수상을 엮임한 인디라 간디여사 ,그리고 그의 두아들 산자이간디,라지브 간디가 화장된 곳이 있다. 인디라 간디는 수상시절 시크교 밀집지역인 델리 북쪽 암리차르에서 1984년 발생한 시크교도들의 황금사원 점령시 강력진압으로 2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후 시크교도 경호원에 의해 피살 되었다. 이에 분노한 힌두교도는 또 시크교도를 학살하는 갈등으로 이어져 암리차르지역은 지금도 경계지역이다. 1947년 해방이후 모슬렘, 힌두교와의 분쟁으로 500만명이 희생되고 파키시탄, 뱅글라데시가 독립했다. 인디라 간디여사의 자녀들도 모두비슷한 정치적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모슬렘과 힌두교, 힌두교에서 분파된 시크교 이들간의 정치적 이권에 희생된 권력의 잔재다. 많은 민족을 가진나라가 민주주의를 실현 하는데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면 그 희생이 너무크다. 지금 그들의 자녀중 한사람 간디가 또 정치일선에 뜨고 있으니 성이 같은 두 간디 가족에 의해 인도의 운명이 해방후 지금까지 오고있다는 느낌 이 든다. 라즈가든에서 나와 길을 건느면 바로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 박물관이다. 유학한 영국에서부터 간디의 행적, 비 폭력주의을 외친 말들,신문 스크렙과 몇가지 미니어처까지 만들어져 간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인도의 최 북단 파키스탄과 중국국경 지역인 카슈미르 지역은 해방이후 종교분쟁으로 잃어버린 낙원이 되었다. 희말라야의 설산과 그 눈녹은 물로 만들어진 호수의 모습이 절경이지만 이곳이 파키스탄과의 3차전쟁으로 많은 희생을 치루고 지금도 소요가 끝이지 않는 분쟁지역이다. 영국의 200년 속국시절 수많은 작은 왕국들을 자치령으로 보호 해준 카슈미르 왕국은 본래 주민의 80%가 모슬렘이지만 왕(마하라자)은 힌두교도 였다. 해방이후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은 이읏 파슈툰족이 쳐들어 오니 왕은 인도의 도움을 요청하고 인도정부는 카슈미르지역을 인도의 연방으로 편입 시킨다. 이에 파키스탄(모슬렘다수)은 인도와 3차에 걸쳐 전쟁을 치루며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지금도 무장세력들은 카슈미르지역을 파키스탄으로 영입하자는 쪽과 또하나의 나라로 독립 하자는 쪽으로 대치되어 매우 민감한 지역이다. 최근 이스라엘과 한국 관광객이 이런 민감한 대립지역을 많이 방문하고 있어 우려를 낫는다고 책에 소개된 지역이다.

박물관을 나와 고대 5층탑이 멀리서 보이는 꾸듭미나르(Qutb Minar)유적군을 보기위해 차에서 내렸다. 거리엔 차와 인파가 넘쳐나 길을 건느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원추형의 5층 높이로 높이 솟은 타워는 1193년 모슬렘시절 만들어 졌고 주변엔 왕족들의 무덤과 궁궐의 잔해가 아직도 그때의 모습을 말해준다.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된 이 타워는 인도에서는 제일 높은 탑이다. 오후 4시쯤 호텔로 돌아와 쉬다가 6시에 강의실에 뫃여 인도대학의 정치학을 전공한 여자 교수로부터 인도 의 어제와 오늘을 공부하는 시간을 갖었다. 10억 인도가 움직이는 인도는 공식언어만 22개라하니 놀라지 않을수없다.62%의 국민에 전력이 가능하고 높은 인터넷수준과 특히 영국령이어서 영어가 잘 통하니 가능성이 있는 나라다. 그러나 수많은 종교들의 상생관계는 이 나라의 낙후를 발전시키는데 큰방해물이 됨은 틀림없다. 소를 신성시하여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것은 이해하지만 신성시 해야할 소의 길거리 방황은 이해 할 수없는일이다. 복잡한 나라인도는 이들이 사용하는 영어처럼 영국식도 미국식도 아닌 제3의 언어로 들리는 만큼이나 혼동되는 나라다. 정치, 교육,종교,미국 및 이읏나라와의 관계 등 많은 질의 문답으로 인도를 이해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평균 자녀 3-4명의 가정들이 많은데 국가적 산아제안 계획은 있는가 물었는데 매우 민감한 사안이라 누구든 이문제를 제시하면 국민의 표를 잃는다고 하니 이 계획 또한 추진하기 난처한 일이다.

저녁식사를 위해 호텔옥상의 중국식당 대빵(TaiPan)에 올라와 시내를 보니 자욱한 안개로 잘 보이지 않는다. 스모그가 많아 밤낮으로 안개가 낀다. 중국식사는 신선하고 고급인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두사람이 9000루피면 $180 정도가 된다. 이번투어의 모든식사와 팁이 포함되어있어 돈을 쓸일이 별로없다.

10/28(Sun):오늘은 인도의 옛 도시 델리 관광에 나선다. 몽고나 그리스,터키족들이 큰 인도땅을

점령하기위해 델리는 요세지역이었다. 왜냐면 북쪽엔 히말라야가 가로막기 때문, 만들고 버려진 구 도시터가 7개나 된다. 타지마할 건축왕으로 이르난 샤 자한(shah Jahan)이 1639-1648사이에 건축한 붉은 성(red Fort)이 지금도 그 위용을 자랑하며 남아있다.붉은 성의 입구 라호르게이트는 현제 파키스탄으로 편입된 지역과 델리이곳,그리고 아그라의 왕궁과 함께 무굴 3경으로 그 치세를 떨치던 곳이다. 붉은 사강암(sand stone)으로 견고하게 지어진 이곳은 네루수상의 독립일 연설이후 공화국 정치행사장으로도 자주 이용되는 곳이다. 샤자한왕은 수많은 건축물에 국력을 낭비하고 아들에 의해 아그라성에 유폐되어 말년을 보내게된다. 그룹 관광을 마치고 오늘오후는 자유 시간 이다. 국립 박물관도 관람할 수있고 샤자한의 최후 걸작품 사원, 2만5천명이 한번에 예배를 드릴수 있게 크다는 지마 마스지드 사원 을 볼수도 있는데 교통편이 좋지 않다. 자유로 다니기엔 매우 위험한 도시다. 그러나 마음을 단단히 먹고 붉은성과 마주해 있는 구도시 찬드니촉(chandni chowk)을 방문해 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곳을 보지않고 델리를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 호텔에서 지정해준 택시의 운전수는 하늘색 큰모자를 쓴 시크족이다. 당신은 무슨종교냐고 물으니 인도 현직 수상 씽(Singh)과 같은 같은교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신문에 나는 수상의 얼굴과 비슷한 인도 인구의 5%인 씨크 교도다. 약간 무서운데 오늘 자기가 다 책임지면 어떨가 떠온다. 사실 택시를 다시 잡는일이 무지 어려울 듯한데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자기가 찬드니 촉을 다보고 나올때까지 입구에서 기다려준다고 한다. 그러면 대기료를 주어야 하지 않느냐니깐 미터기에 나온 520루피(10불)만 갈때도 주면 된다고 한다. 고맙다고 하고 내려 1시간 정도 구시장을 구경했다. 1000년이상을 변함없이 움직이는 시골장터는 골목마다 인파와 진열된 상품 불결할 것같은 노점의 음식들 그리고 간혹 감초처럼 등장하는 소들이 사람들이 버린음식을 먹고있다. 쓰레기는 또 얼마나 쌓여있는지 감정자제가 어려운 것같은데 이들은 이런환경에 젖어있다. 딱이 먹을만한 식당을 찾지못하고 있는데 맥도날드가 나온다. 소고기를 안먹으니 빅맥은 없고 생선과 닭고기 메뉴다. 스위스에서온 여행자가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았으면 서서 먹어야할정도로 사람들이 많다. 시간이되어 반신반의 입구로 나오니 시크교 운전수가 반갑게 기다려준다. 재미있었는냐고 물었으나 사실 차에 타고 난후 긴장이 풀린다. 인도의 자유여행은 언제쯤 가능할 지 혼자 다니는 한국 학생들이 걱정 된다. 맥도날드 점심 음료수포함 2인분이 370루피인것을 보면 택시비 1040루피 왕복은 비싼편이다. 그래서 기다려 주었는지도 모른다. 인도의 택시나 천연개스로 움직이는 오토릭샤의 여행자 속이는 일들이 책에 많이 소개되어 혼자 나설 엄두가 나지않는다. 신성한 종교를 믿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또하나의 믿지못할 일이다.저녁식후 바라나시에서 지낼 작은 가방과 추럭으로 아그라로 보내지는 큰가방 두개로 나누어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10/29(Mon):오늘은 비행기로 간지스강의 성지 바라나시로 가는날이다. 국내선 비행기는 20파운드 짐을 초과하지못함으로 3일간의 짐을 간단히 꾸리고 큰가방은 3일후 만날 아그라호텔로 보내어 진다 . 10시40분 비행기로 바라나시에 도착하니 12시에 여행사차가 가이드와함께 마중을 나왔다. 공항에서 바라나시 시내까지 오는 길은 이곳이 정말 순례자들이 찾는 힌두교의 성지일까 의심이 갈 정도로 미개발 지역이다. 거리의 지저분함은 말할바가 못되고 할 일없이 거니는 소들의 무리는 무질서의 도시라는 인상을 준다. 가이드는 바라나시의 역사,힌두종교의 배경을 설명 하느라 쉴새가없다. 사실 인도인의 영어는 액센트가 일정해서 특히 영어가 약한나에게는 졸리는 경향이 많은것을 요 몇일 사이에 느낀다. 인도인은 4가지의 어머니를 갖는다고 한다. 자신을 낳아준 엄마외에 대자연의 품과 우유를 공급받는 소 그리고 인도인의 한이 서린 갠지스강이다. 어머님겪인 소를 방치하는일과 간지스강이 존재하는 이도시의 열악함을 볼때 이해가 되지 않는다. 10억인의 힌두교인이 3000년 간직한 영혼을 몇일동안에 이해 할 수있는 사건은 정말 아니다. 인도를 방문하는 사람은 돌아갈때 꼭 두종류로 나뉜다고한다. 절대 다시는 안오겠다는 사람과 꼭 다시오겠다는사람으로 , 두 그룹중 어느그룹에 속하든 인도인은 관계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택시 운전수는 방문객을 골탕먹일려고 하거나 현지인 안내인은 인도의 부끄러운 풍경들을 보여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호텔 “Gate Way”에 여장을 풀고 점심 식사후 12마일 북쪽으로 이동해 불교의 부다가 처음 설교를 했다는 성지 Sarnath를 방문했다. BC6세기에 번성한 이도시는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있다가 1780년 발견되고 그후 1932년 지진으로 많은 흔적이 부서졌지만 여러 가지정황으로 부다의 설법지가 분명해 성지로 정했다고 한다. 스투바(Stupa)라고 불리는 원통형의 유적군이 여기저기 그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어떤목적으로 만들어 졌으며, 본래는 어떤형태로 있었는지 조차 알 길이 없다. 발견당시 발굴된 4마리의 사자가 사방으로 서있는 우람한 돌 조각상은 옆에 마련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현제 인도의 국장(National Symbol)으로 정해져 지폐등에 새겨져있다. 불교시작은 여기지만 Cast제도의 강압으로 여기선 자리를 못잡고 스리랑카 네팔,티벳등지로 불교가 번져갔기에 인도는 불교의 종주국인셈이다. 태국,미안마 등지에서온 참배객들이 많이 보이며 일정한유니폼들을 입고 부다의 설법을 듣던 당시의 모습처럼 여러 소그룹이 진지하게 모여있는모습이 많이 보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 최근 태국의 불교신도들에 의해 지어진 거대한 불상이 이제 막지려는 석양의 해를 머리뒤로 보내는모습이 아름답다. 갠지스강의 저녁모습을 보기위해 사르나스를 출발한 뻐스는 어두워지는 좁은길을 오는데 교통편이 많이 막혀 10여Km를 1시간도 더걸려 강가에 도착했다. 길주변의 노점이나 주거용 집들, 천막에 의존하는 빈민들의 삶이 20세기에 살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열악하다. 강가에는 물에 띄우는 적은 꽃잎과 촛불용 용기를 파는 어린애들이 많이 따라온다. 적은 목선 두척을 빌려 10여명씩 나눠타고 가는데 중도에 우리배가 엔진에 고장을 일으켜 서 버린다. 물에 띄우는 쓰레기 들이 엔진으로 들어간것이 틀림없다. 사공노릇을 하는 청년은 옷을 벗드니 물속에 뛰어들어 엔진의 방해물을 치우고 다시 시동을 거니 배가 움직인다. 구조용 조끼도 없고 안전은 하늘에 마낄수밖에 없다. 20분쯤 배를 저어가니 갠지스강가의 층계가 있는곳에서 제사의식을 지내는 모습이 보인다.

인도의 바라나시는 힌두교인들의 성지다. 갠지스강가에서 평생한번 목욕을 하고 성수를 마시고 기도 하는일이 인도힌두교인 들에게는 소원이다. 왜냐면 갠지스강은 이들의 어머니이며 인생의 시작이고 끝이기 때문이다. 바라나시를 보지않았다면 인도를 본 것이 아니며 바라나시를 보았 다면 인도를 다 본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아마존을 보지 않았다면 브라질 본것이 아니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이다. 아침 동틀 때는 해를 맞이하는 의식과 함께 이 강물에 몸을 씻고 기도를 드린다. 해질무렵엔 브라만 사제들에 의해 매일 강의여신에게 바치는 제사의식이 거행된다. 얼마 떨어져있지않은 강가에서는 하루종일 시체를 태워 재를 강가에 뿌린다. 한쪽에선 이에 아랑곳 하지않고 빨래에 열심인 사람도있다. 가트라고 불리는 강가의 계단이 100여군데도 넘는다. 우리가 도착한 지정된 계단에는 벌써 제사의식이 한창진행중이며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들이 수백명은 되는것같다. 강쪽엔 역시 관광객이나 이 의식에 참여하는 배에 탄사람들이 제사의식을 지켜보거나 꽃잎으로 만들어진 촛불이 켜진 작은 촛대들을 강물에 띄우는 일을 하고있다. 이들 역시 백척도 넘는 배에 수백명의 관광객이 뱃머리를 부딧치며 구경에 여념이없다. 제사 의식으로 스피커소리가 요란하며 제사장들이 끈임없이 돌리는 횟물의 연기가 여기저기 피워놓은 횃불과 함께 자욱하게 하늘을 뒤덥고 있다. 아 이런 장관을 내 생애에 본일이 없다. 인생은 무엇이며 어디서와서 어데로 가는지를 이들은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그것을 알기위한 몸부림인가. 1시간 정도 제사의식을 구경한후 배를 돌려 아직도 시체를 태우는 화장터 쪽으로 배를 옮겨갔다. 자욱한 연기와 장작타는 냄세가 인도의 향내가되어 코를 자극한다.

배를 돌려 호텔로 돌아오는 시간내내 그형언할 수없는 제사의식의 끈에서 빠져 나올수가 없었다. 인도인의 정신 힌두사상의 근원을 본 것같아 복잡한 감정을 달래는데 몇일은 걸릴 것같다. 호텔내 인디안음식 식당에서 selmon 요리를 주문하는데 Dry할텐데 괜찮은가 묻는다. 먹어보지 않고 어떻게 알겠는가 ,무조건 시켰는데 정말 많이구워 Dry Selmon 요리가 되어 나왔다. 일행중 한분은 인도향의 식사가 맞지않아 계속 Beep steak요리를 주문하는 분도 있었다. 수입한 소고기요리는 비싸고 맛도 없을것같다.

10/30(Tue): 새벽 4시반에 일어난 이유는 갠지스강의 아침 모습을 보기위해서다. 어제밤의

야단법석의 그제단이 아침에는 어떤 모습일지 궁굼했다. 바라나시는 2백50만인구의 교육도시 이기도 하다는데 갠지스강근처의 불결함은 성지로써의 모습을 갖추기 어렵다는 생각이든다. 아니면 이런 전근대적인 모습을 언제까지 갖고 싶어서일까. 날이 새면서 어제밤 제사를 드리는 그장소에 오니 벌써 많은 인도인들이 강가층계에서 몸을 씻고 기도하는 모습이 보인다. 남여 노소,그리고 청장년 형형색색의 옷차림으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한다. 우리는 어제밤처럼 목선에 옮겨타고 강변을 저어 올라갔다. 빨래하는 사람들, 기도 하는사람들 ,목욕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시선이나 카메라 후랫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일에 도취되어있다. 사제인듯한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는모습도 보이며, 노상에서 머리를 깍고있는 모습,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이자리에 와있다. 아침해는 서서히 강쪽에서 올라오고 인도인의 오늘하루는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돌아오는길목은 한층더 복잡하다. 길가의 야채상들이 즐비하고 출근길의 오토바이들의 속도는 바쁘기만하다. 소가 배추를 훔쳐 먹는 모습과 놀래 야단치는 주인의 모습도 신기하다. 어머니겪인 소지만 소에게서 지불할 돈이있겠는가. 시골장터를 방불케하는 좁을 길들을 지나 뻐스에 옮겨타고 호텔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했다.

짐을 정리하고 공항으로 이동해1시간쯤 날라 Khajuraho 시에 도착했다. 얼마되지 않는길인듯

하지만 도로사정이 나빠 항공편을 이용하는것같다. 중국 같으면 인기있는 관광지길 먼져 닦겠지만 인도는 민주주의라 다르다. 많은 사람의 의견을 수용해야하니 이럴때는 민주 주의가 불편하다. Lalit Temple view hotel에 여장을 풀고 점심식사를 했다. 오후 3시반 유네스코에 등재된 사원 관광에 나섰다. 교통이 불편하고 조그만 도시인 카주라호가 유명해진데는 1000년전 이지역에 번영을 누렸던 찬댈라왕조시대의 사원 때문이다. 이사원의 탑들은 한때 85개 까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22개가 남아있고 탑의 벽면에 수없이 많은 여러가지 남여 성애장면이 부조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남성과 여성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다고 믿었고 두 결합이 가장 완전하다고 믿어 섹스를 수행의 도구로 생각하고 있어 이러한 성애모습의 부조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까마스트라라고 하는 성애장면이 소개된 책자는 중국의 소녀경처럼 이지역의 전해 내려 오는 전설이다. 최근인터넷에서 자신의 분신을 가르킬때 아바타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원래 힌두교의 비쉬누신과 관련된 말이다. 비쉬누신이 세상를 구하기위해 인간이나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지상에 출현할 때가 있는데 이모습을 바로 아바타라고 불렸다는것이다. 그러고 보면 최근 힛트한 카메론감독의 아바타 영화가 생각난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오는듯 한국말걸어오는 호객꾼이 많고 어디쯤 한국식당도 있다고한다. 책에는 이 도시가 바람둥이의 천국이니 조심하라고 써있다. 대학생을 사칭하고 닦아오는 유창한 영어의 청년이면 사기꾼일 가능성이 많다는것이다. 인도와 한국의 대학생수가 비슷한데 5천만명 인구중의 한국 대학생과 10억인구의 인도 대학생 비율로봐서 이시골에 대학생이 할 일없이 관광객에 추근델 시간이 있겠냐는것이다. 개인 여행시엔 아주 조심해야 할일이지만 조심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닌듯 위험한 일이 벌어질수도 있겠다. 경찰이 있기는 한데 수많은 인구들의 움직임을 control 할수있을지 의문이다. 저녁식사는 새우스프가 너무짜서 새우만 건져먹었는데 주방장이 달려왔다. 왜 스프가 잘못되어 먹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점심때는 감자가 너무짜서 못먹었는데 저녁식사의 감자는 괜찮고 스프가 짜다. 적은 감자를 마이크로 웨이브로 읶혀내오니 오븐의 감자를 기대한 우리는 실망할 수밖에없다. 호텔이지만 서양요리에 어둡다는 생각이든다. 인도청년들은 빠르고 영특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웨이터중 Mukeshi라는 이름의 청년은 이 이름이 낮읶다고 하자 세상에 3명의 동명인이있는데 하나는 뭄바이의 세계제일의 갑부이름이고 둘째는 가수, 셋째는 사랑이 많은 자기라고 유머스럽게 말한다. wifi인터넷 사용료가 1시간에 300루피($6.00)를 주고 집에소식을 보내는중 CNN뉴스는 헤리케인 샌디가 뉴욕지역을 강타하고있다고 보도한다.

10/31(Wed): 아침식사를 호텔 Panna 에서 하고 뻐스로 Orcha라는 도시로 이동한다. 도로사정이 안 좋아 속력을 낼 수가 없어 짧은 거리도 시간이 많이걸린다. 중간에 옛고성터에 들려 민가를 방문했다. 시골의 토담집인데 안마당이 깨끗하고 부엌,방등을 스스럼없이 보여주는 이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어떤집을 나오는데 주인이 누굴불러 대신하는말이 집을 보았으므로 100루피를 달라고한다. 가이드는 이들이 돈을 요구할 지를 모르고 있을것이다. 적은 돈이므로 얼른 100 루피를 주었다. 돈이야기를 안했으면 더 순수하게 느껴졌을것이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 누가 자신의 집을 이유도 없이 보여 줄가 인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화장실도 없는 막연한길을 거의 3-4시간은 달린것같다. Orcha시내에 도착해 호텔에서 Vegitalian 식 점심을 하는데 가이드가 야채 쎌러드는 먹지말라는 주의를준다. 혹시 불결한 음식 복용으로 복통나면 전 일정에 차질이 오니 걱정되어 하는 이야기다. 베지 식사에 야채셀러드 빼면 무얼먹나 감자,파스타, 쌀밥,읶힌야채 등으로 점심을 채웠다. 식사가 믿음직 스럽지 못한 이야기는 책에도 있다. 심하게는 음식점 주인과 의사가 짜고 불순물을 식사에 넣어 복통나면 바로 의사에게 보내고 치료비 나눠 갖는다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점심후 호텔을 나오는데 정문의 안내복장을 한 인도인이 “충성”이라고 외치며 한국 군대형식의 거수경례를 하드니 아리랑을 끝까지 부른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데 영어를 전혀 못한다. 아 인도인은 모두 영어를 잘 한다는 얘기는 또 아니네.

오후3시 현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고성관광에 나섰다. 인도 북부 교통의 요지 잔시와 카주라호사이에 있는 인구2000명정도의 작은 도시 Orcha는 주변의 황량한 풍경과 달리 중세의 궁전과 사원이 산재해 있는 독특한곳이다. 1600년대 이곳은 당대의 지방 소국 분델라 왕조의 본산지로 당시에는 55개의 궁전과 성이 이근처에 존재했다고 한다. 영원한 권력이 존재할수없듯이 이왕실도 무골제국에 패배해 멸망되어 그흔적들이 많이있다. 사원은 힌두교와 모슬렘 양방식을 겸해진 건축양식이 보이고 궁전건물과 사원건물들이 나눠져 있다. 궁전건물은 현제 호텔로도 사용되는듯한데 낙후되어 보이고 상가나 주택들이 매우 낙후되어있다. 길가에서는 여러가지 컬러의 색소가루를 팔고있는데 아주 예뻐보인다. 이곳에 도착하기 10여Km전에는 길주변에서 광물질을 채석하는지 희푸연 연기가 안개처럼 도로주변을 뒤덥고있다. 주민들의 호홉에 지장이 올텐데 아무런 제제도 없는지 이상하게 보인다. 몇군데 사원과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변에 비치는 저녁 사원 모습도 잠시 사진에 담고 10여Km떨어진 잔시로 이동했다. 잔시역은 델리, 뭄바이, 캘커타 등 인도 3대도시를 잇는 한국의 천안 같은 철도교통의 요지다. 잔시에서 우리는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Agra)로 2시간의 기차여행이 기다리고있다.

잔시역은 크고 왕래가 많은 역이라서 많은 인파가 움직인다. 기차가 1시간 연착한다는 소식에 뻐스에서 기다린후 시간 맞추어 프렛홈으로 나왔다. 대합실에는 아무데나 담요를 깔고 누워서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다. 프렛홈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와 아그라행 기차를 기다린다. 열차내에서는 음료수와 간식을 나눠준다. 내용을 알수없어 선뜻 먹을 수가없다. 7시에 출발한 기차가 8시반에 아그라에 도착했다. 아그라는 무골제국의 수도로 인도 제1의 관광지 답게 세련된 상가들도 많다. 이정도 도시라면 몇일 묶어갈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차에서 내리니 자욱한 안개가 하늘을 가린다. 인근공장지대의 화학물질등으로 대기오염이 심각한편이다. 아그라시내의 오베로이 호텔에 여장을 풀고 늦게 저녁식사를 했다.

11/1(Tur);모든 방에서 타지마할이 잘 보인다는 아그라의 Oberoi 호텔도 짙은 스모그에는 속수무책 ,아침부터 짙게낀 안개스모그는 가시거리가 20-30m밖에 보이지 않는다. 인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이자 7대 불가사의라 불리는 타지마할은 무골제국 5대황제 샤자한(Shah Jahan)의 아내가 죽은후 그 무덤을 화려한 건축물로 만들어 바치겠다는 계획아래 1632년 부터 22년동안 건설한 대리석 건물이다. 정방형 이슬람식 건축물에 65m의 중앙돔을 위시해 4개의 작은 돔이 구석마다 배치되어있다. 건물앞 중앙연못에 비치는 타지마할의 잔영은 누구에게나 감동을 느낄만큼 훌륭한 건축물이다. 대리석벽에는 꽃등의 문양을 판뒤 색색의 돌이나 준보석을 박아넣었다. 이슬람 건축물은 움직이는 동물이나 신상을 그려넣지 않으므로 화려하지 않지만 순백의 청초함이 수려한 유적이다. 입장료도 비싸지만 출입시 소지품검사가 까다롭다. 후랫쉬나 연장이 될만한 물건은 가지고 들어가지못한다. 안개로 좋은 사진을 기대할수 없는데 전문사진사는 단체사진과 개인사진을 잘찍어 나눠주엇다. 건물 정중앙에는 부인의 묘, 그옆에는 자신의 묘가있다. 무덤 하나를 위해 대공사를 이룬것은 이해 할수 없는일이지만 아무래도 후세들을 위해 좋은 수입원을 남기고 간 황제다.

타지마할을 나와 얼마 떨어지지않은곳에 위치한 아그라성을 관람했다. 1566년 5대 무굴황제 아크바르가 지은성이다. 샤자한황제대에와서 이성을 화려한 궁전으로 변모시켰다.샤자한은 아이러니하게도 건축등으로 국고를 탕진하다가 아들에의해 이곳에 유배되어 비참한 말년을 보넀다. Oberoi호텔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자유시간이라 수영과 독서등으로 보내는데 요가수업을 1시간 받았다. 마음을 다스리고 신체의 스트래취로 건강을 지키자는 요가는 힌두교에서 발달되었다고한다. BC2000년경부터 브라만교의 철학의 배경으로 시작된 힌두교는 인도의 민족종교이며 문화다. 신의영감으로 만들어졌다는 베다성전을 지키며 중심사상으로는 수억년이 되풀이된다는 우주관, 업과윤회를 믿으며 다르마라고 하는 4계급간의 법질서를 지킨다. BC500년경에는 불교와 자이나교나 갈라져나와 큰틀이 붕괴되지만 법의 실천으로 실리, 애정, 애욕, 해탈의 중요한 원리를 지킨다. 중심사상간의 모순도있으나 관여치 않고 정통에대한 이단 대립같은 불협화음이없다. 즉 모든것을 다수용하는 관용의 종교다. 다신교인 힌두교는 사원이 있지만 대표나 리더가없고 정규적인 학습도없다. 몸에베인 종교적인관습이 이들을 지탱하는 힘이다. 16세기 이스람문화의 침투로 이들과도 같이섞여졌고 그후 시크교가 또 갈라져나와 조금다른 노선을 취하고있다. 일찍히 시작된 불교문화의 깨달음과 공사상을 통한 마음수양이 요가로 발전해 지금도 정신건강의 큰 방법의하나로 자리하고있다. 타종교는 이교도를 만나면 적대하는 반면 회교도는 어느이교도도 다흡수해 버리는 포용력을 가진 종교문화가 힌두교다.

인도인 P.Oberoi가 주인인 이호텔체인은 인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에집트까지 이름난 유적지에 고급호텔을 지어 호화숙소로써 이름이 나있다. 아그라뿐만아니라 앞으로 봐야할 두도시 도 Oberoi호텔에서 묶게된다. 저녁식사는 코스요리로 3가지 주문하면 음료수까지 1인당 3500루피정도에 20% service charge가 붙는다. 저녁식사로 스프, 슈림프파스타, 왕새우요리 , 맥주를 시켰다. 식사비가 포함되어 마음껏 좋은음식으로 주문해서 좋은데 다이엇을 해야할분이나 음식이 맞지않으면 섭섭하게 이를 다 즐길수도 없겠다.

11/2(Fri): 오늘은 금요일마다 먹는 말라리아약을 먹어야하는날이다. 처음먹어보는 이약은 부작용으로 구토증이약간있다. 가까운 모슬렘교회의 기도소리와 함께 잠이깼다.아침 아그라를 출발해 자이퍼(Jaipur)라는 도시까지 뻐스로 이동한다. 아그라를 출발해 1시간반쯤 거리에 파테뿌르 시크레(Fatehpur Sikri)라는 옛성터가 있다. 무굴제국 3대왕 아크바르의 3부인중 모슬렘부인쪽에 기다리던 후사가 생겨 이를 암시해준 당대 이슬람 성자의 말을 듣고 수도를 정해 성을 세웠는데 물부족으로 14년동안 유지한 수도를 다시 아그라로 옮기면서 이성터는 400년 방치되버렸다. 높은 언덕위에 위치해 있어서 작은 뻐스로 갈아타고 산정으로 올라갔다. 폐허지만 아름다운 옛모습이 조금씩 묻어나는 이슬람식 사원이다. 이슬람,힌두교,기독교 각종교마다 부인을 두었고 각 부인이름의 궁을 지어준 사원도 있다. 사원 관람을 마치고 계속 달려 정오쯤에 자이프르 Oberoi호텔에 도착했다. 자이프르는 인도 28개주가운데 가장 큰주인 라자스탄주의 주도다. 인구 5600만명에 주넓이가 영국의 두배쯤되며 사막지대지만 교통의 요지로 상공업이 발달한 도시다. 옛날 왕세자를 맞기위해 온도시를 환영의 뜻의 붉은색으로 칠한 유래가 있어 Pink City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양고기로 점심식사를 마친후 1700년대 당시에 벌써 계획된도시로 건설했다는 자이퍼 구시가지로 갔다. 산등성이위에 위치한 이도시도 옛시골 장터를 방불케 하는 시장과 낙후된 시내모습을 볼수 있으며 일명 바람의 궁전이라 불리는 하와마할 사원이 시내 한가운데 있다. 바깥출입이 제한된 왕실의 여인들이 유일하게 밖을 볼수있는 창문이 촘촘히난 건물이다. 일행은 왕의 천문대 Jantar Mantar관측소를 방문했다. 우리에게도 세종대왕의 천문학 관측이 있었다는 생각에 두왕의 공통점이있다. 해의 그림자를 이용해 시간를 측정하거나 지구의 회전 기후변화 등을 관찰할수있는 기구들이 전시되어있다. 옆에 위치한 왕궁 전시실에는 옛의상과 왕실에서 사용하던 생활상을 전시해 놓았는데 20Kg이 넘는 옷을 전시 해놓았다. 실제 입기도 했다는 옷이다. 특히 세계최대의 은항아리 2점이 눈길을 끈다. 영국에 초대되어 3개월 여행시 간지스 강물을 담아가서 마셨다고 한다. 오늘저녁은 왕궁이 호텔로개조된 식당에서 우아한 식사를 하기로 되어있는데 릭싸라 불리는 3윤 자전거로 왕궁까지 한 반시간을 이동했다. 이미 해가져 어두워진 왕궁정문에는 원색옷으로 치장한 코키리,말들과 함께 악대가 음악연주로 우리를 환영한다. 이층 식당으로 가니 고전춤과 고전음악이 음식이 나오는동안 연주된다. 중국식 서양식 부페식사에 와인까지 곁들여 고급음식으로 대접을 받고 호텔로 돌아왔다.

11/3(Sat): 아침 식사후 자이프르 구도시북쪽 11Km지점에 위치한 Amber Fort 를 관람하기위해 나섰다. 뻐스로 산아래까지 간후 5인승 찝차나 코키리로 바꿔타고 산등성이의 Amber Forte에 입성한다. 무굴황제 아크바르와 혼인동맹을 맺어 왕국을 반석위에 올려 놓았던 마하라자(인도의 각 지역왕을 칭함) 만 씽(Man Singh)이 건설한 카츠츠와하왕조의 최고걸작 왕궁이다. 무골황제 제항기르가 방문했을때 시샘을 살가봐 성에덧칠을해 본모습을 감추어야 할만큼 당대에는 화려 하고 아름답게 지은 건축물인데 이왕국은 1037년 부터 1726년까지 오랜동안 영화를 누렸다. 거울 모자이크의방, 정원, 수로를 끌어와 시원한 공간을 만들었던 지혜로운 방도있다. 강대국의 이중 청혼에 아버지의 고통을 덜어주기위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공주의 운명도 이제 세월의 흐름앞에 전설로 남는다. 좁은길을 생명걸고 질주하는 찝차와는 달리 한마리 900루피($20)를 주고 타고 천천히 올라가는 코키리 타기는 휘청거리는 흔들림에 다시는 코키리등에 생명을 맡기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변한다. 궁전을 내려와 큰호수를 왼편에 관망하며 시내로 들어오니 벌써 점심시각이다. Taj궁전터를 호텔로 개조한 식당에서 점심을 하는데 8가지 음식이 골고루 조금씩 맛보기처럼 나온다. 몇가지는 맛있고 몇가지는 우리정서에 맞지 않는다. 일행중 뉴욕서 오신분은 또다시 맛을 보지도 않고 물리고 뉴욕 스테익으로 재주문한다. 입에 맞지않는 음식을 소화시키기 어려운 분은 여행도 어려움의 연속이다. 식사후 일부는 샤핑을 위해 시장에서 내리고 나머지는 호텔로 돌아왔다. 오후 휴식시간에 호텔을 산책하는데 왕궁이었던 이호텔의 부지가 32에이커 라고 한다 .취핑연습할수 있는 골프장 몇개의 홀이 있으나 그린이 흔적만있어 관상용 골프장이 되버렸다. 저녁식사후 짐2개씩 다 꾸려 추럭으로 다음도시로 보내고 일행들은 비행기로 내일 델리를 거쳐 우다이퍼로 이동한다.

11`/4(Sun): 아침 식사후 공항으로 이동중 baby shower가 아닌 money shower를 하겠다며 일인당 1000루피($20)씩 나눠준다. 델리공항을 거쳐 Udaipur로 이동해야하는데 델리공항에서 점심 식사 를 하라고 주는 돈이다. 공항음식은 싸서 한사람 subway lunch음료수 포함 250루피밖에 되지 않아 돈이 많이 남았다. 자이프르에서 우다이프르는 같은주기 때문에 얼마되지 않는 거리같지만 도로사정이 좋지않아 항공편을 두번이용해 이동하는것이다. 국내편 짐은 15파운드를 넘지못해 모든짐은 어제밤 추럭으로 다음도시로 옮겨진다. 가이드의 수고와 민첨함이 단체여행을 용이하게 해준다. 오후 4시반에 Udaipur 공항에 내려 45분 거리의 오베로이 호텔까지 들어 오는길은 인도의 다른도시에 비해 비교적 깨끗하다. 호반도시 우다이퍼 신혼여행지로 인도인들의 각광을 받고있는 도시다. 여행잡지에서 아시아 제일 의 호텔이라 선정된 오베로이호텔은 역시 궁을 개조한것인데 55개의 방에 어울리지 않게 크다. 호수가 펼쳐진 야외 식당자리에 장작불로 모기를 쫒으며 저녁 식사를 마쳤다.

16세기 북인도 대부분을 통일한 무굴제국은 마지막 라자스탄왕조들을 점령하려는데 그선봉에 메와르왕조가 있었다. 1568년 결정적 패배를 당한 이왕조는 4면이 산맥으로 쌓인 이요세지 Udipur를 발견하고 피난을 오면서 도시가 발전되었다. 9년후 무굴제국의공격이 있었으나 물리치고 인공호수와 난공불락의 왕궁을 건설해 번영했던 왕조의 도시가 되었다. 20년전 007영화옥타브스의 해상추격장면을 여기서 촬영해 이도시가 세인들에게 알려지기시작했다.

아침 9시 아침식사를 마치고 유람선에올라 거대한 인공호수의 유람을 즐겼다. 한때 샤자한의 아들이 아버지 왕에 쫒길때 숨겨주는 도박을 건 왕국으로 아들을 위해 지은 인공섬 가운데 작은 궁궐 도 지나친다. 1시간정도 지난후 왕궁옆에 내려 먼져 좁은 골목길을 한참 내려가 이지역에서는 이름난 힌두교 사원을 관람했다. 가파른 층계를 높이올라가 신발을 벗고 예배중인 사원안으로 들어가 이들의 예배모습도 보았다. 향불과 전통악기의 현란한 소리가 신을 부르는지 쫒는지 분간하기어렵다. 사원의 외벽은 온통 코키리 문양으로 채워졌는데 코키리는 평화를 상징 한다고 한다. 전통시장의 모습은 비슷하고 선물용품이 될만한 물건을 찾기가 쉽지않다.

왕궁으로 돌아와 통로가 아주 좁고 높낮이가 가파른 City Palace를 자신있는사람만 관람하기로 하고 일행이 나눠졌다. 인도 540개의 왕궁중 제일 마지막까지 남았었다는 왕궁답게 요세중의 요세로 지었다. 만일의 적의 공격에 시간을 벌기위해 가짜문은 크게 그리고 진짜문은 작게 만든 지혜가 엳보인다. 작은 창문으로 보는 시내의 전망이 아주좋다. 왕궁을 나와 호수가 전망좋은 식당에서 점심을 들었다. 전망과는 달리 맛은 떨어지지만 인도에 이런도시가 있다는것은 인도의 자존심이다. 호텔로 돌아오는길에 18세기에 만들어진 식물원에 들렸다. 호수물을 끌어와 분수도 만들고 정원의 물을 골고루 분배한 옛 건축인의 지혜로움이 뛰어나다. 오후에 호텔에서 쉬다가 저녁식사전 시크교 모자인 터번 사용법과의 여인들의 전통의상 착용법을 공부하고 시범을 보이는 시간에 참석했다. 어찌보면 알카에다의 복장같이 보여 섬뜩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인도인, 이슬람, 시크교들의 다른 복장을 잘도 구별 하는것같다. 일행 모두 전통복장으로 갈아입고 기념촬영도 했다. 그러고 보니오늘이 인도여행의 마지막날이다. 하루하루 기이하고 벅찬 인도의 풍물을 접하다가 시간 가는줄을 몰랐다. 마지막 저녁식사는 칵테일 파티로 그동안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시간도 가졌다. 바라나시의 잊을수 없는 밤의 향연에서부터 코키리 등에서 떨어지지않으려 몸부림친 흔적까지 이기억들을 영원히 잊지않고 가지고 갈것이다. 그리고 또 현실로 돌아가 생활하면서 이들의 현실을 비교삼아 우리의 생활에 보탬이 되는 시간들을 가지려 노력할것이다.

11/6(Tus): 일행중 반은 문바이와 남부도시코치를 더관광하기위해 떠나고 반은 집으로 가기위해 덜리공항으로 향했다. 델리에 잡아둔 오베로이 호텔에서 쉬면서 인천행 밤비행기에 오르면 서울을 거쳐 로스앤젤리스행 비행편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데리에내려 처음우리를 안내한 젊은이가 또나왔다. Trident Oberoi 호텔로 안내해 잠시낯여장을 풀고 예약된 점심식사를 했다. 선물도 준비못해 택시를 4시간 4000루피($80)에 대절해 Delhi Hat라는 시장으로 갔다. 찬드리 쳇같이 복잡하지는 않지만 입장료를 주고 들어가서인지 많이 붐지지 않는다. 전통 문화에 관련된 많은 물건들과 먹거리 시장이 질서있게 움직인다. 수공예제품 이 가격도 싸고 정성이 보여 몇점을 사고 시장을 나와 광고에 있는 궁이라는 한국식당을 찾아갔다. 운전수만 밖에 세워놓을수 없어 같이 들어가 식사를 하는데 힌두교도인 운전수의 식사선택이 문제다. 소고기를 먹지 않기때문에. 우리는 갈비를 시키고 운전수는 돼지고기를 시켰는데 예상 외로 삼겹살 구이가 나왔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선지 운전수 는 별 말없이 잘 먹는다. 우리가 문제, 한국음식을 해외에서 먹어본 중 가장 한국의맛에 멀리있는 음식맛이 되었다. 알고보니 음식재료의 수입이 금지되어 모든 재료를 현지에서 구입해야하니 그럴수 밖에 없겠다. 그리고 소고기를 먹지 않는나라에서 수입에 의존 해야 하는 고기원료의 구입도 문제다. 아무튼 식당이 문전성시고 바삐뛰면서 몇마디씩 주고 받는 한국말 사용 현지인 종업원들의 친절이 너무 반가워 이 감정도 빠지지 않고 가지고 가야할 귀향길 짐 목록중 하나로 넣자. 호텔로 돌아오는길이 교통체증으로 많이 밀린다. 도시로 도시로 밀려온 인구들의 생활이 쉽지 않음을 실감한다. 짐을 꾸려 공항에 오니 처음으로 많은 한국 여행객을 만났다. 로타리크럽 회의가 있은듯 회원복장의 그룹도 보인다. 밤 2시 비행기가 3시에 출발 한다고 하니 한국여행객이 욕설을 하며 심통을 부린다. 세계 10대선진국으로 도약하는 한국 국민정서도 함께 도약 했으면 좋겠다. 새벽 3시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니 쏟아지는 잠을 피 할 수 없이 인도의 아늑한 기억과 함께 깊은 잠에 빠진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서점에서 인도와 불교 명상책 몇권을 사넣고 로스앤젤리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같은날짜의 아침 10시경 L.A에 도착하니 새벽잠에서 깬지 35시간만이다. 지구를 반바퀴돌아 현실이 기다리는 고향에 다시 돌아 온 것이다.

10억인구와 한국의 33배의 크기에 달하는 인도를 2주 여행하고 평가 하기는 너무이르다. 알 수 없는땅, 이해할 수없는 이질문화의 벽속에 숨어있는 진기한 보물들은 이제 문명의 가빠른 변화 앞에 힘없이 무너질 날도 멀지 않았다. 20개가 넘는 유네스코자산들이 세계인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인구때문에 고생하는 이들도 결혼관, 자녀관이 변하는 새로운 세대에 그리 큰 걱정 거리는 아니다. 종교적 분쟁을 넘어 진정한 종교인의 사랑으로 화합해 찌든 가난에서 빨리 벗어 난다면 웅크렸던 인도 서민의 마음도 녹아져 좀더 친절한 마음으로 여행객을 맞을수 있을것이다. 다시는 인도를 찾지 않겠다는 초행자의 심정은 베일속에 가려진 진귀한 그들의 유산이 다시 보고 싶은 설레임으로 변해 곧 인도를 다시 방문하고 싶다. 빈곤한 대도시 켈커타에서 평생을 빈민 구제에 바친 마케도니아인 테레사수녀의 발자취, 고국 티벹을 등지고 독립을 위해 평생외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달라이 라마의 망명도시 맥그로드 간즈, 간지스강의 근원이자 히말라야 4대 성지가 있는 코사니, 종교분쟁으로 민감한 펀잡주 암리차르 의 냉혹감, 홍차와짜이로유명한 다르질리, 히말라야의 트래킹, 뉴욕같은 대도시 뭄바이의 타지마할호텔, 향신료 무역의 남부고도 코치 등은 지금이라도 달려가보고 싶은 매력적인 인도의 내면세계다. (11/11/2012)

인디아(India) II

도무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땅 인도를 다녀와서 인도병에 몇일을 앓고 일어나 두분의 인도 여행기를 읽었다. 작고하신 법정스님이 20년전에 여행하신 기록(인도여행)과 유시화시인의 잦은 배낭여행의 일화들을 소개한 하늘호수로 떠난여행을 읽고 어쩌면 이분들도 여행후 극심한 인도병에 시달리다 이런책을 썻을 것이란 생각을 해봤다. 이제 두분의 책을 간추려 소개하며 내가 볼 수 없었던 인도의 매력에 빠져 보고자 한다.

처음유시화시인은 다른나라에서 볼 수없는 이 세가지 사건으로 온통 생각의 혼동속에 몇일을 보냈다고 한다. 화장지가 없는 인도를 여행하면서 가방에 화장지를 넣고 다니는데 이를 본 어떤인도인이 가만히 화장지를 가져가는 것을 목격했다. 왜 남의 화장지를 가져가느냐고 따지니 한참있던 그 인도인은 어떻게 이 화장지가 영원히 당신 것이냐고 돼묻고 이것은 잠시 당신곁에 있었을 뿐이고 장소만 내쪽으로 이동된 것이라는 억지를 부리는것을 보면서 소유권의 혼동을 느낀것이다. 한번은 20시간의 좌석열차에 앉았는데 자신의 좌석옆으로 슬며시 한명,두명,세명이 엉덩이를 밀어대고 나눠앉자고 좁혀와 화를 내면서 좌석권을 보이니 역시 이자리는 영원히 당신 것이 아니며 결국 잠시 앉았다가 떠나야할 자리를 가지고 뭘 그리 연연하느냐고 자신을 힐책하는 것이었다. 또 한번은 선물을 하나골랐는데 1000루피를 불러 바가지다 하면서 100루피하자니깐 150내라고, 이렇게 흥정하다 몇개더 언져 70루피에 사서 돈을 지불하고 가는데 뒤에서 불러 싸게 사서 행복하느냐 ? 신에 대해 부끄러울것없이 행복한 가겪을 치뤘는지 생각해 보라는 인도인의 말에 잠시 숙연해짐을 경험했다는 이야기다. 인도인은 어리숙하면서 스마트한 면이 있다. 정신세계의 문화속에 많이 젖어서인지 이론이 맞는것 같기도 하면서 여행객의 혼을 빼는일이 종종있다.

인도인은 서둘지 않는다. 호텔에서 첵아웃을 위해 키를 주고 나가려면 앉으라고 권하고 콤푸터로 천천히 책크하고 어려움은 없었는지 서로 대화하고 가게한다. 고속도로의 톨게이트에서 운전수가 큰돈을 내고 잔돈을 기다리는동안 돈받는 사람이 옆에 친구와 계속얘기하며 시간을 끄는데도 운전수는 불평한마디않고 잔돈 줄때까지 기다리는것을 보았다. 수백명이 3-6시간 연착하는 기차를 기다리며 아무불평없지만 한국 여행객은 비행기 한시간 연발소식에 화를 낸다. 인도에서 뻐스를 타면 재미있는 광경을 많이 본다. 만원뻐스에서 표를 끊지 않고 슬쩍탄것을 본 검표원이 끝까지 쫒아가 차비를 내든지 내리든지 하라면 나는 여러중생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므로 돈을 안내도 된다고 억지를 부린다. 만원뻐스는 개나,닭같은 동물도 싫고 보타리가 많아 차가 넘치면 지붕까지 올라가 타고 차가 출발한다. 더운날씨에 동물냄세, 인도인의 특유의 냄세를 맡으며 포장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길을 하염없이 간다. 어떤 작은 마을에 서 기다리다가 차가 가지 않아도 불평이나 왜 안가는지 언제 출발하는지 묻지도 않는다. 단순히 운전수가 없기 때문이고 운전수는 아마 아는사람을 만나 그집에서 차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것으로 생각한다. 조급해 하는 동양인에게 터번을 잘 차려입은 인도 신사가 묻는다. 당신은 어데로 가는가. 히말라야 초입마을에 간다.그 다음엔 어디로 가는가, 그뒤엔 잘모른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데 서두를 필요가 있겠는가 .모든것은 정해졌다. 버스가 떠날시간이 되면 정확히 떠날 것 이다. 서두른다고 될일이아니다. 지금 마구 화를 내든가 그저 마음을 평화롭게 갖든가 둘 중 하나의 선택중 평화로운 마음을 갖는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자신이 원하는데로 일이 되어 가기를 기대하지 말라. 일들이 일어나는대로 받아드리라. 나쁜것은 나쁜것데로 오게하고 좋은것들은 좋은것대로 가게하라. 그때 그대의 삶이 순조롭고 마음은 평화로울 것이다.

인도에는 삼윤차격인 릭샤가 저렴하고 택시보다 싸고 잡기쉬워 많이 이용한다. 그러나 초행자의 이 릭샤이용이 만만하게 쉬워 보이지 않는다. 가격을 정하지 않고 가면 터무니없는 바가지 가격을 주는게 보통이고 중간에 선물집으로 안내해 곤욕을 치루는 일도 많다. 행선지를 말하면 처음 다 아는척 나섰다가 그 근처에가서 헤메는것이예사다. 20년전 여행한 법정스님은 한 도시서는 인상된 요금이 아직적용이 안된 미터기를 부착한 차의 가격 때문에 실랑이를 벌렸고 미터기가 거리만 나오기 때문에 그때마다 계산해서 맞는지 봐야하는 고충도 있었다. 유시인은 타지마할로 유명한 아그라열차 역에서 내려 일부러 멀리있는 좀 어리숙해보이는 릭샤의 주인이 정직하고 착해보여 그에게 호텔이름을 대니 그호텔은 홍수로 부서졌다. 두번째 호텔은 화재로 소실됬다. 어쩔수 없이 5분거리의 좋은 호텔로 소개해준다며 멀리떨어진 후진 호텔에 안내하고 아침에 1시간도 넘게 타자마할로 걸어와보니 책에 쓰여진 그 호텔들이 가까히 다 멀쩡하게 영업을 하고 있는것을 보고 속은 것을 알았다. 인도에서 누가 A호텔이 좋다고 소문이 나면 아무나 다 A호텔 간판을 붙여 여러개 있는데 A호텔중 하나로 가게되어 좋은 서비스를 못 받는일이 많다고 한다.

한사람이 기차여행을 하는데 그가 키우는 소,염소,닭까지 나와 환송하며 마구 아무데나배설하는 나라는 인도 밖에 없을것이다. 게다가 여행 떠나는사람은 이불과 메트리스,냄비 등등 세간사리를 전부들고 기차에 오른다. 크막한 트렁크를 대 여섯개씩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이제 정부에서 한사람당 짐 한개씩 가지고 다니라고 권하지만 집에 놔두다간 도둑맞거나 또는 왕복 70시간씩 걸리는 켈커타나 붐바이로 결혼식 참여라도 떠나는길이면 가방 하나만 달랑들고 떠날순 없다. 자릴잡지 못할경우를 생각해 메트리스, 오가며 밥을 해 먹어야할 경우를 생각해 식기류의 동행도 필요하다. 즉 의식주가 모두 함께 여행에 나서는 것이다. 집없는 천민들은 역 대합실이 임시거처지다. 그래서 대합실은 아수라장이 될 때가 있다. 큰소리의 물건 파는사람, 머리의 이를잡는사람, 쭈그리고 앉아 방뇨하는사람, 맨땅에 누워자는사람, 터번쓴남자와 사리입은 여자, 회교식 복장을 한 노인.. 등등 만일 기차가 들어올때는 서로 탈려고 그 아우성은 몇배의 혼동으로 변한다. 인도의 철도는 전체길이 6만킬로에 달한다. 이는 세계에서 네번째로 긴길이다. 날마다 하루 1만 1천대의 기관차가 달리며 7천여개의 역으로 9천만명의 승객을 실어나른다. 단일 회사로 160만명의 고용인을 거느린 인도철도회사다. 세계에서 가장긴 프렛드홈은 인도 뱅갈주에있는 카락푸르 기차역으로 자그만치 833미터나 된다. 인도를 여행하는 외국인은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야한다. 편안하고 화려한 여행을 꿈꾼다면 그여행자는 인도에는 맞지 않는다. 아무것도 소유없이 묵묵히 지상의 삶을 견딜줄 아는자에게 인도 기차여행은 묘미를 느낀다. 인도기차는 아무때나 가고 아무데나 설수있다. 이유를 모르게 몇시간씩 늦어질수있다. 인도인은 말한다. 인도를 여행하는동안 신을 배우고 신과 하나가 되지 않는한 여행은 무의미 하다고.

미국인 대학교수가 동료들과 인도 여행중 바라나시에서 하루를 묶고 어떤연유로 그곳 바라나시에서 평생을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극적인 경험을 하지 않도록 신중하고 조심성이있어야한다. 꽃과 태양과 비의나라,사막과 해변과 만년설의나라, 영원한 지혜를 축복하는 신들의 나라가 어느순간우리에게 다가와 평범한 우리의 일상을 탈출해 그곳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대형사고가 발생할 소지가 다분히 있기때문이다. 인도인들은 정말 손으로 밥을 먹고 화장실 이용까지 그손으로 하나요? 소를 숭배해서 도심지에 소떼가 어슬렁거릴가요? 그들에게서 카레냄세가 날까요? 정말 갠지스강에 시체와 꽃을 버리고 그물에 목욕하고 그물을 성수라고 마실까요? 이물음에대한 대답은 예스다. 아시아에서 가장먼져 서구문명과 만났지만 여전히 기상천외하고 파격적인일들이 벌어지는나라다. 인도가 열렸으며 더 이상 신비한 나라가 아니라고, 쉽게 갈수있다고 여행사는 광고하지만 인도는 결코 다가가기 쉬운 나라가아니다. 열번여행한 유시인에게도 여전히 불가사의하고 신비하고 더럽고,익살맞고 황당하고,고귀하고, 기발하고 화려하다. 인간의 모든 고정관렴을 깨부숴버리는 인도는 우리의 삶자체가 그러하듯 예측할수 없는 변화의 장소다. 또한 인도인은 못낫고,가난하고, 밀쳐대며, 불구자 투성이다. 고집세고 낙천적이고 기품있고 성스럽고 때로는 슬픔만치 삶에 열정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베짱이 보다 더 게으르다. 어디든 존재하는 신전이 수천년전에 탄생한것인반면 여분의 신장이나 안구를 팔아 냉장고와 전기밥통을 사들이기도 한다. 거지들은 움막을 치고 살면서도 닭과 염소까지 키운다. 물건값을 계속 깍으면 그러고도 행복하냐고 반문한다. 거지들은 돈을 줘도 고맙다고 하지않는다. 선행을 베품으로 자신들의 악업을 씻으니 오히려 자기들에게 고마워 해야한다는 논리다.

서양역사에서 1000년이면 긴시간이다. 로마제국은 발흥,쇄퇴,멸망이 모두 이사이에 일어났다. 고대그리스는 그 절반이 못되는 시간에 흥하고 멸망했다. 그런데 힌두교는 그기초를 구축하는데만 꼬박 100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여전히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인구의 9할이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인도에 다시오지 않겠다고 떠나지만 대부분 1년도 안되 다시찾아온다. 그곳에서 당혹스럽고 어지럽고, 사기를 당하고 무섭고 도망치면서도 그곳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자연의 조화를 터득한다. 아열대의 공기, 이상한새들, 꽃과차의 향기, 신전의 인상적인 지붕들, 사리를 휘감고 들판넘어 신기루처럼 사라져가는 여인들의 모습은 인도로 가고싶은 충동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나마스테,나마스카, 인도인사의 뜻은 당신속의 신에게 절을한다는 뜻이다. 인도하면 이말이 앞서는 것처럼 인도를 대표하는 도시는 바라나시다. 3000년이상된 고도 바라나시엔 1500개의 힌두사원이있다. 인구 2백만이 넘는다지만 먼지와 혼잡으로 뒤범벅이된도시다. 시장의 비좁은 길양쪽으로 늘어선 구멍가게 ,길이 미여지게 늘어선 순례자의 행렬, 아무데서나 어정거리는 소, 지붕과 지붕사이를 뛰어다니는 원숭이들, 들것에 실려 지나가는 시체,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와 오물들의 악취가 코를 찌른다. 공항에서 만난 알젠틴 베낭여행자는 괜히 바라나시에 왔다고 불평이 대단하다. 세계최악의 도시라며 네팔,부탄을 본봐야 한다고 손가래를 친다. 남미여행자가 동양의 신들의 이야기를 이해 할수 없음은 당연하다.

힌두교도들에게는 이 바라나시가 일생중 한번은 와야할 성지다. 강가의 성스러운 물에 목욕을 하면 모든죄업이 소멸되고 이곳에 죽어 화장재를 강물에 띄우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믿는다. 이것이 힌두교도에게는 최고의 행복이다. 강가 화장터의 모습, 그옆에 임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자기차례를 누워서 기다리는 모습도 있다. 강변에서는 이런 성수에 남녀노소가 한데 엉켜 머리까지 물속에 넣어 자맥질을 하며 물을 마시고 병에 담아가기까지 한다. 인간에게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 무엇이 이런 신앙을 갖게 했을까? 갠지스강변에서만은 생사가 전혀 낯설지 않게 마주하고있다. 그러나 갠지스강은 이런 내색에 전혀 동요없이 조용히 흐르고 있다. (11/21/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