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보물섬 타이완 7박 8일
아시아의 보물섬 타이완의 7박 8일 (대만은 중국인가 ,아닌가?)
2/9/2016-2/17/2016
급변하는 세계의 정세는 이제 이데올로기의 틀에서 벗어나 복잡하게 변하고있다. 시리아의 내전으로 시작된 난민들의 행진과 모슬렘의 다양한 종파갈등은 아군과 적을 구분하기에도 어려운 이념세력들의 각축장이 되어가고있다. 이런 강대국들의 세력다툼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려 에쓰는 작은 나라가 있다.
중국반도의 산호섬같은 작은 섬나라 타이완, 그곳이 갑자기 가고싶어 인터넷에 연결하니 타이페이의 7성급 호텔 7박8일과 항공료포함 페키지 가격이 착하게 나온다. 출발 3-4일전에도 이렇게 여행계획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고도로 발달한 인테넷 기술의 발전 덕택이다. 2월9일 화요일 저녁 11시 L.A.를 출발한China Airline타이완 국적기는 14시간만에 수요일을 건너뛴 목요일 새벽6시 타이페이 도원공항(옛 장중산공항)에 내렸다. 제일먼져 할 일은 환전이다. $ 400교환에 1230위엔을 준다. 1 달러당 34위엔, 장총통의 얼굴이 그려진100위엔 지페와 500위엔,1000위엔, 지페를 동전과 함께 섞어 받았다. 타이완은 한국의 남쪽, 필리핀옆에 중국대륙에서 160Km 떨어진곳에 위치해 있다. 기후는 한국보다 따뜻하고 방추형으로 남북 394Km, 동서144Km인 섬나라이며 크기는 경상남북도와 전라북도를 합한크기라한다. 인구는 2300만명이며 14개 소수민족을 뺀 98%는 한족, 그중 85%가 청나라때 중국으로 부터 이주한 본성인이다. 15%는 1945년 장총통의 영향력 이후 옮겨온 중국인으로 외성인이라 부른다. 빨강색,파란색,힌색의 국기는 어릴적 옆집에 살던 중국인이 10월10일에 걸었던것과 똑같다. 중국의 국부 손문이 주창한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 표상이다.
미국에서 오는 전화도 막을겸, 필요시 전화를 사용할 수 있도록 Sim카드를 사서 갈아끼우고 유료 Wi Fi 기계도 리스했다. 여행자를 위한 Easy Card는 처음 일정한 돈을 입금시키고 지하철,버스사용과 편의점이나 간이식당에도 사용할 수 있다니 너무좋다. 부족한 돈을 지하철역에서 넣을 수도 있고 남아있는 돈은 출국시 공항에서 찾아 나갈수 있다니 좋은 카드다. 공항뻐스를 이용해 시내 원산 그랜드 호텔까지 오는데 1시간가량 걸리며 요금은 90위엔이다. 시내의 건물들은 페인트가 낡았고 우중충하게 보인다. 내부를 중요시 하는 문화탓일지도 모른다. 시내 중심가 높은 언덕에 자리한 원산 그랜드 호텔은 빨간나무 기둥이 특색인 7성급호텔로 타이페이의 시가지가 한눈에 다 보인다. 아직은 이른아 침이라 첵인이 안되어 짐을 맞기고 시내 구경에 나섰다. 먼져 택시로 지하철입구까지 가서 Easy Card를 사용해 지하철 노선부터 읶혔다. 가까운 걸리는 한번 타는데 16위엔이 나가는 것 같다. 지하철은 5개노선으로 시내가 1시간안에 모두 연결된다. 세계에서 3번째로 높다는 타이페이 101으로 이동했다. 101층 509M 의 이 빌딩은 중국인이 좋아하는 숫자 8개의 상자를 언져놓은것 같은 형태로 만들었는데 바람과 지진에 잘 견딜 수 있도록 만든 현대기술의 대단한 작품이다. 타이페이의 자존심인 이 건물은 2004년 준공당시에는 세계 1위의 높이였다고한다.
건물 1층에는 각나라 음식을 맛볼 수 있는 Food Court가 있는데 특히 딩다이펑이라는 만두 전문식당(특히 샤오롱바오)은 인기만점이라 긴줄에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하얀까운을 입은 10여명의 요리사들이 만두를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만두피속에서 흘러나오는 단맛의 액체도 특이하다. 여러 종류의 만두 몆개로 점심을 대신하고 에스켈레이테로 본건물에 오르니 5층까지 확트인 건물구조에 유명상품점이 매장을 다 차지하고 있다. 전망대에 오르는 길은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많아 서둘러 빠져나와 지하철을 이용해 오래된 절 용산사로 향했다. 1738년에 건립된 역사적인 사찰이지만 지진,전쟁등으로 몇번이나 소실되었다가 2차대전이후 재건된 모습의 사찰인데 너무 낙후되 보인다. 인조 폭포가 인상적인데 수많은 참배객들의 향불과 재물들로 사찰안은 너무 복잡해 보인다. 타이완은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마쭈교,등도 많아서 이들의 신불상도 함께 모시고 있는 사찰이다. 다시 지하철을 이용해 북쪽 끝지점인 담수이 역으로 이동했다. 인구 230만인 수도 타이페이는 지하철시설이 휼륭하다. 저렴한 가격에 어디라도 빨리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은 복잡한 구간도 있고 한가할때도 있는데 사람들은 전혀 서둘지 않는게 인상적이다. 뛰는 사람이 없고 뭘 물어봐도 잘 대답해 주지 않는다. 곳곳에 위치한 수많은 카메라들은 범죄예방 차원을 넘어 사생활침해가 될듯하다. 반정부 데모는 생각조차 못할 정도다.
북쪽 바닷가에 위치한 담수이는 경치도 좋고 역사적인 장소가 많아 인기있는 곳인데 수많은 관광객인파로 발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다. 대부분 중국본토에서 온 사람들이고 이들에게 향하는 상인들의 노점들이 좁은 길을 다 메워 버릴정도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데도 유람선은 바쁘게 움직이고 찾으려는 역사적인 건물들은 인파에 가려 나타나지 않는다. 간신히 찾은 단수이 홍루건물로 올라 섰는데 설연휴로 식당매뉴가 고갈되어 바다를 바라보며 저녁식사를 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다시 지하철을 이용해 호텔로 돌아와 첵인하고 호텔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타이완의 인상은 조용한나라, 서둘지 않고 천천히 살며 강대국들 사이에서 안정을 유지하고 싶은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다.
2/12/16 금
현대중국의 시작은 서태후 정권 청말기인 1911년 신해혁명으로 손문이 10년간 준비한 근대화를 위한 투쟁으로 그해 10월10일을 국가 건립일로 친다. 이 혁명은 2년동안 여러번의 난항을 겪으면서 1914년 중화민국은 난징에, 원세계는 북경에 각각 정부를 세우는일도 벌어진다. 1921년에는 중국 공산당이 쏘련을 업고 세워지며, 한편에서는 손문을 도왔던 장개석 주도의 국민당이 별도의 세력으로 등장하며 1924년에는 잠시 공산당과 합작의 노선을 걷기도 한다. 1925년 손문이 병사하고 1927년 장개석이 반공 쿠테타로 전면에 등장한다. 1934년 공산당의 대장정으로 국민당과의 싸움은 본격화된다. 일본 군관학교 출신인 장개석은 일본을 견제하라고 주는 미국의 원조로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 동족인 공산당을 배격하는 일에 만 전념하니 지휘권에 불만이 쌓여갔고 교육을 받지못한 공산당의 모택동은 맨손으로 게릴라 전법과 특유의 카리스마로 민중을 휘어 잡는 전법으로 10년 이상을 싸우는 중에 일본마져 난징을 공격해 중국반도는 전쟁,내전,기아,공포로 오랫동안 국민의 다수가 희생되었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물러가지만 양당은 새로운 싸움의 시작이었다. 4년동안 싸움의 결과 카리스마의 모택동이 승리해 1949 년 북경에 중국공산당의 정부가, 타이완으로 쫓겨간 국민당은 중국수복을 염원하며 타이완에 영구 정부를 세우고 본국탈환을 기다렸으나 닉슨대통령의 중국과의 화해 조치로 국민당의 본국탈환은 장개석 운명시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나라의 체계는 없지만 조용하게 잘 살고 있던 타이완에 대한 국민당의 진입은 본인들의 의사에 관계없이 2.28사건이나 40년의 긴 계엄속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본인들의 정체성을 들어 낼 수도, 이질문화에 합류할 수도 없는 이들의 운명은 이제 억압했던 세력들이 거의 타계한 지금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경제성장과 자립의 두마리 토끼를 잡기위해 열강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하는 새로운 시대에 돌입했다.
호텔에서의 아침식사는 660위엔인데 죽과 국수 빵 오므렛 등 비교적 잘 나왔다. 문제는 국수위에 언져지는 소스가 우리맛이 아니라서 친근하지않고 삵힌 두부는 냄세가 난다는데 맛 볼 기회가 없었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중국말을 걸어보았다. 니 자이 나알?(어디 사세요?), 나 여기 호텔서 ! (어디서 잣어요 로 해석) 안되겠다. 포기..택시로 숙소에서 가까운 국립박물관을 찾았다. 국민당정부가 본국에서 내려올때 옮겨온 수많은 보물들을 전시한 국립박물관은 67만점의 보물을 교대로 전시한다고 하는데 3층으로된 전시장 장소로 이들을 다 전시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것같다, 정기 전시회도 같이 겸하니 아직도 빛을 보지 못한 수많은 보물들이 창고에 가득하다. 붓글씨가 많고 청동류, 옥,등으로 만든 유기물 또한 많다. 별관에 위치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계속 관람을 했는데 나무,돌 등으로 된 작품은 보이지 않는다. 유명한 비취배추는 다른곳에 전시중이라 볼수 없고 고기형태를 돌로 만든 육형석을 볼수 있었다. 중국어 오디오가이드를 빌리는데는 200위앤 ,한국어는 100위앤으로 중국어쪽엔 많은 사람들이 줄서있다. 매일 박물관은 밀리는데 중국에서 온 관광객으로 발딧을 틈이 없다. 그들은 여기와서 자신의 선조들의 작품을 남의 나라에서 보는 느낌이 어떨지 모르겠다. 기념품점에 진열된 책자나 기념품들은 모두 한자로 되어 있어 중국을 제외한 외국인을 위한 배려가 부족하다. 오후 5시 가 지나 스린가는 뻐스에 올라 10여분 달려 야시장을 돌아봤다. 중국의 관광객들로 꽉차서 여기가 중국인가 착각할 정도다. 정말 중국사람때메 중국구경 못하겠네..타이완 사람들은 비만한 사람이 없고 물건살때나 길 안내때 큰 소리로 똑똑하고 빠르게 얘기한다. 그러나 자기와 관계없는듯한 대화는 잘 응해 주지 않는다. 식당에서 더운차는 잘 준비해 주는데 얼음물을 시키면 놀라는 눈치다. 냉혈동물? 밤시간에 수많은 인파들이 밀려도, 길가 음식들이 무질서 하게 팔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도 불가사이한 일이다. 내가 찾는 저녁식사 메뉴를 아니 적당한,안전한 식당을 찾지 못해 저녁을 여기서 해결 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화장실 켄셉의 식당도 있다. 변기를 닮은 그릇에 놓여 나오는 메뉴..타이완은 자유로운 나라다. 무질서 속에 무서운 질서 의식이 존재하는..
2/13/2016 토. 더운날씨
호텔에서 아침을 든든히 하고 지하절을 이용해 타이페이 역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기차로 1시간 루이팡으로 가서 핑시선이라는 탄광행 열차를 갈아타고 산골마을을 구경하기로 했다. 타이페이역은 지하철과 함께 있으며 여러개의 샤핑공간과 어우러져 괭장히 복잡하다. 다행한것은 열차편의 출발착이 시간 아주 정확해 좋았고 Easy Card 사용방법은 현지인이 아니라서 쉽지않다. 루이팡까지는 쉽게 갔는데 핑시선에 관광객이 몰려 있어 만원기차로 스펀까지 1시간가는데 고생했다. 12.9Km의 핑시선은 산골마을로 연결되는데 마치 설악산의 내설악을 여행하는듯 산과 냇물이 마주한다. 스펀은 산골마을인데 철길주변으로 좁은길을 사이에 주고 끝없이 상가가 펼쳐있다. 간이 음식점이 대부분이고 이곳에서는 천등이라 불리는 등불 날리기의 본고장이다. 상당이 큰 크기의 6면체 종이등에 소원하는글들을 써서 철사로 연결된 부분의 기름종이에 불을 붙이면 기름불이 타는 압력으로 종이등이 하늘로 올라간다. 한번 올려주는데 250위엔을 받는 비지니스가 도처에 있다. 철길 위에서 사진찍고 올리는데 공중에 떠있는 종이등들이 수백개가 올라간다. 어떤 등은 오르기도 전에 기름불에 겉종이가 불붙어 주져 앉아버리기도 한다. 형형색색의 종이등은 이제 하나의 관광상품이 되 버렸다. 수많은 관광인파가 철길과 상점가 사이에서 움직이고 기차가 오기전에는 종이등을 띄우는 사람들로 철길은 꽉찬다. 공중에 날르던 종이등은 언젠가는 떨어지는데 산속 군데군데 연기가 피어나기도 한다. 산불이 안나는것도 기차사고가 없는것도 운좋은 일이다. 1.5Km 를 더 안쪽으로 들어 가면 황금폭포가 있는데 차편을 잘 몰라 걷기로 했다. 더운 날씨라 피곤했지만 폭포에 도착하니 경치가 아주좋다. 폭40M와 높이20M의 거대한 폭포가 숲속에 가려있는데 타이완의 나이아가라폭포다.햇빛이 적당히 비칠때 금빛으로 발 한다고 해서 황금 폭포라 불리는데 마침 석양빛이 뒷쪽에서 비치는 모습이 황금색갈이다.
돌아가기 위해 스펀역에 도착 했는데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다 못탈 것같다. 콩나물시루 에 실려 50분쯤 달려 루이팡역에 내렸다. 택시로 반대편 지우펀 이라는 도시로 이동했다. 미터기를 사용 않고 250위엔을 달라고 한다. 20분쯤 달리니 왼편에 저멀리 바다가 보이고 오른편엔 거의 수직선의 집들이 들어선 도시가 나온다. 마치 그리스의 산토리니를 연상케 하는 이 산속마을은 한때 골드러쉬의 잔존마을인데 영화 비정성시의 촬영지로 알려져 관광객이 많이 다녀가는 곳이다. 좁은 언덕길을 사이에 두고 찻집,선물가게,간이 식당들이 즐비하다. 전망좋은 식당에 들려 이고장 에서 유명한 위위안 이라는 간이음식을 먹으며 저녁노을을 보다가 내려왔다. 택시로 루이팡으로 돌아가 다시 기차로 타이페이역에 도착한후 지하 샤핑몰로갔다. 지하2층, 지상3층의 샤핑몰은 옷가게와 식당 등이 많고 사람들도 붐벼서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시간이 9시가 지나 다 문을 닫고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는다. 3층으로 올라가니 한국식당 고려원,두부마을도 있는데 문닫는 시간이다. 할수없이 어느 일식집에 부탁하니 20분안에 먹을수 있느면 주문 받겠다고 한다. 이시간 만은 손님이 왕이 아닌것만은 분명하다.그림에 맞있게 보인는 찌라시와 우동을 주문하니 빨리 나왔는데 가격도 아주 착하다. 한국 식당도 발견했으니 오늘 수확이 크다.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돌아오니 저녁 10시반이다.
2/14/2016 일 흐림 비 50%
오늘은 좀 흐린 날인데도 중동부 지방의 타이루거라는 대협곡을 관광하기 위해 타이페이역으로 나갔다. 화렌역까지 880위엔/2명 급행기차표에는 좌석번호가 있다. 어제 시루떡같은 기차여행이 아니고 고급스럽다. 그러나 아침식사를 호텔이 아닌 시내식당에서 해 볼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도대체 적당한 식당 ,예를 들어 미국의 대니스같은 식당을 찾았지만 절대 불가능, 맥도날드와 커피 그리고 그 흔한 사시미간식을 사들고 간신히 기차에 올랐다. 좌석칸에 식탁을 펼치니 대니스식당 보다 훨씬좋은 분위기다. 다른 손님들도 그렇게 식사를 즐기고 있다. 2시간쯤 달리니 동쪽 바다가 잘 보이는 화렌에 도착한다. 시내가 비교적 조용한것은 중국본토 관광객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역에서 200피트 떨어진곳에 관광안내소가 있다. 지도을 구하고 나오는데 나이 지긋한분이 택시를 구하느냐고 다가온다. 4시간 협곡 관광해 주는데 2000위엔 요구하는데 안내소에서 받은 정보와 똑같다. 이지역은 중국 답지 않게 흥정이 없다. 60불에 택시 4시간 전세 이니 대만의 경제가 약한게 사실이다. 물과 간식을 준비해 가자고 못하는 중국말을 건네니 어떤작은 가게에 들려준다. 빵과 바나나 물을 사고 협곡 으로 향했다. 다행이 아침에 내리던 비가 그치고 해가 조금씩난다. 공원 입구에서 안전철모를 배급받고 입장료는 운전수가 내는것같다.먼져 이 수직의 낭떠러지 협곡을 개발하면서 3년10개월동안 어려운 공가이기 때문에 많은 (212명) 인명 피해가 있었는데 위령탑과 사찰을 지은곳에 도착했다. 작은폭포와함께 경치좋은 15분정도의 하이킹을 할수있다. 2000M의 고산준령에 깍아 지른듯한 약20여Km의 계곡길은 보기에도 아슬아슬하다. 길은 계속되어 타이중으로 넘어 가게 되어있고 천산이라는 반환점에는 사찰이 10층석탑과 함께 보인다. 이른봄 철쭉꽂이 봄비에 많이피어 사찰에 신비감이 감돈다. 돌아오는 길에는 흔들다리 ,1 자로 떨어지는 폭포도 아름다웠다. 화렌에 돌아와 500원을 팁으로 주겠다고하니 그럴필요 없다고 사양하지만 싫지않은 눈치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소박한 시골아저씨가 오늘 우리를 위해 점심도 거르며 수고많이 하셨다. 역에 도착해 기차에 오르니 해가 지고 비가 오기 시작한다. 타이페이역에 도착해 어제 봐 두었던 한국식당을 찾아봤으나 도져히 못 찾겠다. 간이식당에서 음식을 시켰으나 국적불명의 음식이 나와 못먹고 사시미 간식을 사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장개석과 모택동공부로 한세기 두지도자의 면모를 알 수있는 계기가됐다.
2/15/2016 월 , 비
청나라 봉건왕조가 신해혁명으로 무너지던 20세기초, 중국은 혼란 그자체였다. 손문의 국민당 혁명정부는 각지에서 난립하는 군벌세력으로 힘을 결집하기 힘든상황이었고 이를 틈타 서구 열강과 일본이 중국영토를 좀먹고있었다. 손문의 사상적 동지이자 재정적 후원자인 송요여는 세딸과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모두 미국유학으로 서구교육을 받게했다. 이중 둘째딸이 손문의 비서로 일했는데 세력다툼 중 잠시 일본으로 건너갈때 같이 가게되어 일본서 손문과 결혼하게 된다. 다시 돌아와 일하면서 민족주의를 배우고 10년후 손문이 사망하자 모택동과 손을 잡고 중국건설에 평생을 바친다. 셋째딸은 장개석과 결혼해 국민당이 대만으로 이주할때 동행해 두 자매는 서로 양극의 길을 걷는다.
타이페이역 가까운 곳에 중정 기념관에 들렸다. 중산은 손문위의호며 중정은 장개석의 옛이름이다. 기념관 앞은 넒은 자유광장이 자리하고 양옆으로 국가 희극원과 음악당이 거대하게 자리잡고있다. 기념관 층계를 밟고 올라가면 중정의 동상이 있고 아래층으로 그의 업적과 전쟁사, 세계 지도자들 과의 모임사진 등이 전시되있다. 말년에 입지가 적어져 고립되었지만 한때는 미국과 함께 그 존재를 자랑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지하철로 서문사장의 마라훼거식당에 들렸으나 예약만하고 손문의 국부 기념관으로 갔다. 그의 3민정책은 중국깃발에 세겨있다. 근대중국의 아버지로 그의 혁명일을 중국원년으로 기념해 매년 계산한다. 상단에 동상이 있고 시간마다 열병식을 하는 것은 중정기념관과 비슷하다. 다시 훼거 식당에 갔는데 요기로 일식을 먹은 후 인데도 고기,생선 구이 부페를 잘먹었다. 한국 관광객이 많고 1인당 식사비 800위엔.
저녁식사후 89층 빌딩 타이페이 101을 두번째 방문했다. 509M 의 높이를 30초에 오르는데 빠른 에레베이터 속력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있다고 한다. 지진에 견디는 Damper 시스팀이 특이 하며 건축기술도 전자기술과 같이 무한발전하고 있다. 전망대에서 보는 타이페이 시가지가 아름답다. 선물센터에는 산호제품과 마블제품의 장식품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가격이 상당히 높다.
2/16/2016 화 흐림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200불을 환전했다. 기온이 내려가서 11시가 넘어 방을 나와 자연공원을 가기로 하고 호텔안내에게 물으니 잠수이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서 뻐스나 택시로 가면 쉽다고 한다. 잠수이는 지하철 북쪽종점인데 지난번 관광객이 많이와 혼 난곳이다. 뻐스타는 곳에서 서성 거렸으나 우리 실력으로는 안될것 같아 택시를 불렸다. 얼마쯤이면 가겠냐니까 메터기만 가르킨다.일단 타고 달리는데 해안가 경치가 좋다. 오른쪽 산언덕에는 별장이 많이 있을만 하지만 거의 무 개발지다. 1시간 쯤 달려 미터기가 1000위엔 나올때 자연공원에 도착했다. 갑자기 운전수 아저씨가 1000위엔을 하나 꺼내들고 손짓을 한다. 1000위엔을 다시주면 다 볼때까지 여기 기다리고 있으마!오케이 나는 손가락 두개를 펴들고 2시간안에 오겠다. 바람이 많이 불고 추운날씨인데도 관광객들이 많다. 돌들이 바람의 풍화작용에 의해 버섯모양으로 변한 자연공원이다. 갖가지 모양에 이름을 주어 그럴듯하다. 여왕바위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다. 안전요원들이 곳곳에서 수고하는 모습도 보인다. 수년전 파도에 휩쓸리는 사람을 구하려다 희생된 열사의 동상도있다. 황선생(운전수)의 기다림에 힘입어 쉽게 잠수이로 돌아와 지하철을 탓다.
지하철 타는데 서둘거나 뛰는 사람이 없다. 부자유한 사람이나 도움을 받는사람도 도와 주는 사람도 많지 않다. 길가에 재주를 부리고 돈을 요구하는 사람도 없고 지하철에 악기를 연주하거나 구걸하는 사람도 없다. 이 나라사람들의 실업율은 0%? No homeless, No solicit, No performance 좋은 나라다. 지하철의 카메라는 거의 1M 간격이다. 나쁜짓하다간 금방 찍힐 것 같다. 미국은 왜 이렇게 못할가? 지하철로 동문에 도착해 융캉제 거리로 나왔다. 야시장을 둘러보고 딩타이팡식당에 들려 저녁식사를 했다. 식당옆에 체인약국 Watson약국에 들려 약사와 얘기도 나눴다. 약사는 영어를 잘해 시원하게 대화가 되어 좋았다. 지하철로 호텔에 돌아와 선물가게에 들리니 L.A. Monterey Park에서 3년 살다 왔다는 주인이 영어를 잘해 선물 몇점샀다. 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호텔식당에서 물어도 필요한 것만 대답하는 불통의 이땅을 다시 찾을때는 이 나라말을 좀 더 공부한 후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억압의 세월을 보낸 이 땅에 진정한 자유가 잉태되길 빈다. 그 자유가 더욱 고귀하게 느껴지는 그날이 곧 오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보내는 이땅의 마지막 밤이 나그네를 밤잠을 못이루게 한다. (2/18/2016)
타이완 역사:(괄호안은 중국 본토 역사)
1624: 네넬란드 지배-37년간 지배-스페인과 각축
1662: 정성공 대만정복(반청명복)-23년간 지배-정씨가족
1683: 청나라 지배-212년간-중국인 유입(본성인)
1894: 청일전쟁-일본승리,일본대만지배 50년-문맹과 낙후에서 근대화 시작
1900: (청나라 말기, 서태후 세력약화,서구 열강들 교류,농민 투쟁시작)
1911: (손문 청나라 타도(신해혁명)-10월10일 중화민국 건국)
1919:(국민당결성-손문-삼민정책)
1925:(손문 타계, 장개석 부상- 삼민정책 보다 공산당과의 투쟁)
1925-1949: (장개석의 국민당 과 모택동의 홍위군과 갈등)
1934: (공산당 대 장정시작 1년동안 87,000명 10,000Km행진)
1937: (장학량 사건(시안)-장개석의 부하이면서 모택동과 결탁 장개석 감금)
1937: (일본 중국 동북성 공격, 8년 전쟁)
1945: 일본 패망-국민당 대만접수-국민 혁명군 지배
1947: 2.28사건-대만 주민 3만명 사망
1947: (모택동-홍위군 계속 싸움)
1949: 장개석 정부 대만으로 후퇴-국민당 그룹 대만유입(외성인)
1971: 중미 관개개선,미국과 대만 단교-대만 유엔에서 축출
1975: 장개석 총통 타계,
1978: 아들 장경국 총통승계
1986: 민주진보당 창당,본성인 그룹
1987: 개엄해제(40년개엄)
1988: 장경국 타계, 본성인 이등휘 총통
1992: 대만과 한국 단교
1995: 2.28 정부 공식 사과, 공원 조성
1996: 처음 총통선거, 이등휘 총통 재선(국민당,그러나 본성인출신)
2000: 민진당 천수이벤 총통당선, 장중산공항->도원 공항 이름 바꿈
2004: 천수이벤 재선, 정명운동,장개석기념관->민주 기념관 이름바꿈
2008: 국민당 정권,마잉주 총통-친중국 정책-경제성장 기대
2012:마잉주 재선, 경제성장 미미-타이완의 정체성 불투명
2016:민진당 채영원 총통당선-현제 공식 수교국 29개국
중요인물:
정성공:(1624-1662)명나라 재상으로 군대를 이끌고 대만에 도착해 네델란드 군을 몰아내고 정씨 나라를 건설한다, 그러나 1년만에 죽고 그 자녀들이 대를 이러 23년동안 존속하나 청나라의 공격으로 망한다.
손문:(1866-1925) 중국의 외과의사며 정치가, 미국 일본등으로 유학했고 신해혁명을 이끌었다. 1912 중화만국 임시총통, 삼민주의 제창, 1919 국민당 결성, 1차 국공합작도 실현,25년 북경서병사
장개석:(1887-1975) 일본 군관학교교육, 손문의 휘하의 군사학교교장, 1925 손문 서거후, 국공합작 북벌계획, 왕정위등 국민당 좌파생김 1928국민당 지휘, 1930 공산당과의 긴 싸움, 1937 일본중국침략 일시 국공합작 일본대항, 1941 국민당 일본에게 패배,군사력약화, 1945 국공통합시도, 1946 공산당 공격 1949 공산당에게 패해 대만으로 옮김, 대만 총통, 1975 사망
모택동:(1893-1976) 군인, 혁명가, 장개석과 국공내전에서 승리 1949 중화인민공화국 건설, 대약진운동실패, 문화대혁명으로 2500만 인명피해.
장학량:(1900-2001) 1936년 중국 동북방면에서 일본의 침략과 맞서 싸우는 만주의 왕이라 칭송되는 장작림의 아들로 국민당 장개석을 도와 홍군 모택동을 공략하는 쪽에 있었다. 장작림이 일본군에 죽자 일본군을 먼져 소탕하자고 장개석에게 권고 했지만 미군의 막대한 원조를 받으며 같은 민족인 홍군타도에만 장개석이 주장하므로 서안에서 모택동과 함께 장개석을 유도 구속시킨다. 모택동이 장개석을 죽이지 않고 회유하여 같이 일본을 칠것을 권유해 달리 방도가 없으니 이에 응하는 체 하며 빠져나오는 장개석편에 역시 동행해 의형제의 의리를 지킨다. 후에 장개석과 같이 대만으로 내려온 장학량은 전의 배신한 일로 10년 징역형을 받고 5년으로 감형되었지만 가택연금등 고초를 겪다가 장개석이 죽은후 1996년 하와이로 이주 2001년 101세로 세상을 떠난다. 생전에 중국정부에서 사절을 보내어 민족주의의 소신에 경의를 표하고 중국본토에서 살기를 권유했지만 거절했다.서안사변의 주역 장학량의 기록이 서안 화청지 주변에 잘 보관되 있다고한다.
송미령:(1897-2003) 대만 총리 장개석의 부인으로 손문의 부인인 송경령과 형제이며 사업가에게 결혼한 송애령과 도 형제다. 일찍히 미국 웨스리대학에서 공부했고 1920년 장개석과 14년차이로 결혼했다. 대만으로 이주한후 국모의 역활읗 했고 1943 중국인 최초 미국의회연설, 카이로 회담엔 남편의 통역을 맏았다.언니는 손문 사망후 모택동과 손잡고 일해 부주석까지 올랐고 동생인 자신은 국민당의 최고 영부인이 되었다.1978 미국으로 이주 2003 뉴욕에서 10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송경영:(1893-1981)중국 현대사에 큰 자취를 남긴 3자매 송애령,송경령,송미령씨는 손문의 친구이자 재정적 후원자인 송요여의 6자녀중 3자매다. 13세때 미국에 건너가 유학 ,대학을 졸업한 재원들이다. 첫째는 은행재벌이자 당시 중국최고 갑부인 공상회와 결혼했고 둘째 송경령은 는 27살 차이의 손문과 결혼했다. 손문이 10년만에 죽자 모택동과 함께 공산당 노선을 걸어 1945년 항일전쟁 승리후 모택동과 함께 송미령과 그남편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그후 부주석, 명예주석까지 올랏고 상해에서 89세로 생을 마감했다. 첫째는 돈을 ,줄째는 중국을,셋째는 권력을 사랑했다는 세 자매의 스토리는 현대 중국사의 한 단면이다.
진정희 지음 “송미령 편전”을 읽고 (4/20/2016)
“For whoever would save his life will lose it, but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will save it.”(Luke 9:24)
중국 근대사에 송씨자매의 얘기는 항상 세간에 화제가 되어왔다. 큰딸애령은 갑부 공상희와 결혼해 돈을 사랑했고, 둘째딸 경령은 손문과 결혼해 나라를 사랑했고 셋째딸 미령은 장개석과 결혼해 권력을 사랑한 결과가 되었다. 이들 자매가 현대 중국의 역사창조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 한 것은 송씨 가문의 특별한 선택과 시대의 부름이 있었을것으로 생각된다. 이제는 당사자들이 대부분 세상을 등졌지만 그들의 생각과 선택이 오늘의 중국을 가르고 후손들에게 남겨진 유산을 다시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지므로 미래로 향하는 우리의 생각을 바로 할수 있다면 800페이지가 넘는 장편을 마련한 저자의 의중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1875년 5월, 중국의 남쪽 섬 해남에서 태어난 한교준 은 어릴적 가난을 이기지 못해 양자로 친척집을 전전하다 11살의 어린 나이로 미국의 보스톤으로 이주하게 된다. 교준의 중국발음이 치아쏜 과 비슷해 찰스송으로 새로운 이름이 지어진다. 처음 5년은 인근해안 여객선 청소와 잡일로 미국생활을 배우고 선교사 집안의 도움을 받아 5년을 더 공부한후 선교사가 되어 상해지역으로 파송된다. 가난을 이기기 위해 미국까지 가서 서양문물을 배워와 선교의 일과 개혁의 일을 하는 동안 사회는 청나라의 왕조에서 공화국으로 탈바꿈하는 변화의 물결과 때를 같이한다. 찰스송은 결혼해 가정을 갖으면서 교육을 통해 사회를 변화 시키는 일을 추구하면서 부수적인 출판,인쇄,등의 사업으로 부를 쌓게 된다. 3자매와 3 형제들을 두지만 모두 나이 어릴때 유학을 보내 선진국의 교육을 받게해서 자신의 어릴때의 행적을 자녀들에게 똑같이 전수한다. 큰딸은 유학후 공상희라는 재벌에게 시집을 보내고, 둘째딸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경제적 도움을 주던 혁명가 손문의 일을 도와 주다가 결혼하게 된다. 셋째딸은 10년 유학후 상해로 돌아와 국민당을 만들어 중국의 장차 지도자가 될 장개석과 결혼 하게된다. 1911년 신해혁명의 선봉으로 중국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손문은 병으로 일찍 죽고 찰스송도 미령이 유학에 돌아온지 1-2년만에 일찍 세상을 떠난다.
장개석은 1887년 10월 상해에서 태어났다. 홀어머니 밑에 가난하게 살던 그는 청나라말기의 어지러운 환경에서 군인의 길을 걸을것을 결심한다. 원세계의 군사학교에서 수업하고 졸업생중 뽑혀 1907년 일본군사학교에 진학한다. 당시 일본에는 손문을 위시로 혁명을 준비하는 세력들이 운집해 있었는데 그 세력들과 동참하다가 귀국한다. 장개석은 수많은 세력들 틈에서 방황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하고 잠시 숨을 고른다. 1911년 신해혁명 성공으로 상해지역에서 각성의 대표들이 손문을 임시총통으로 선출한다. 손문을 도와주며 자신의 입지를 다지던 장개석은 1924년 5월 손문서거 로 수많은 파벌들 사이에서 각축을 벌린다. 어렵게 송씨집안의 셋째와 결혼해 1949년 남경에 수도를 둔 국민당을 만들고 총재를 맞는다.
그러나 또 다른 중국 북쪽의 연안지역에서는 모택동을 중심으로 공산당이 형성되어 국민당과 대적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동북부 침략은 중국을 전쟁과 기근의 싸움터로 만들어 국민의 피해가 오랜동안 계속되었다. 공산당은 일본과, 국민당과의 싸움에 소련을 끌어드리려 하지만 소련이 선뜩응해 오지 않고 국민당은 송미령의 협조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큰원조를 받게 된다. 항공전투기와 군사물자를 받는 장개석 국민당은 일본을 물리쳐 주길 원하는 미국의 뜻에 아랑곳 하지않고 공산당 물리치는 일에만 주력한다.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고 동족끼리 화합하기를 원하는 국민들의 뜻을 거부하고 공산당과 대적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국민당에 비해 공산당은 군사물자도 없이 맨주먹으로 12만킬로의 대장정을 치루는등 정신적인 승리를 기대한다.
1934년 9월에 시작된 홍군의 대장정은 국민당의 공격과 일본군의 지속적인 침략에도 불구하고 포위망을 벗어나거나 게릴라 작전으로 적을 물리치기도하고 전투물자를 노획하기도한다. 악천후와 굶주림으로 주력부대의 대부분이 희생되지만 다음해 10월까지 지속된 대장정의 결과는 주민들에게 민족주의를 심어주는 결과가 되었다. 동족끼리의 싸움이 무의미하고 화합의 필요를 느끼던 서안 토벌군 장학량이 드디어 1936년12월 서안에서 상관인 장개석을 감금하는 서안 사변을 일으킨다. 장개석은 화해을 약속하고 풀려나지만 장학랑은 이일로 평생을 그늘속에 살아야했다.
1937년 일본군의 계속된 침략으로 국공합작의 의견이 이루어져 잠시 모처럼 3자매가 함께 항일전선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대 미국 방송은 물론 고아원 방문, 부상자 위로를 위한 병원방문 등
많은 군사원조와 수많은 항공기의 도움이 있으면서도 일본의 침략을 방관하고 조직의 부정부패로 전세가 불리하게만 되어갔다. 부인의 외교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원조를 중단하고 일본은 1945년 패망하게 되어 50년 통치하던 대만을 국민당에 인계하고 얼마있지 않아 1949년 국민당은 대만으로 쫒겨가는 신세가 되었다. 국민의 여망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충성스런 신하를 지키지 못하고 힘으로 무력통치한 결과 는 결국 40년을 철권통치하여 수많은 희생자들을 만들고 본국회복을 못하고 일생을 마감하는 결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