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문명의 시작 그리스세계와 소 아시아땅 터키
고대 문명의 시작 그리스세계와 소 아시아땅 터키 (6/8/2007)
아크로포리스 신전과 아테네
그리스와 터키는 인접국이지만 서로 다른 배경의 역사와 지리적 조건 또한 판이하게 다른 두 나라를 보기 위해 나는 무더위가 시작되는 6월 8일 금요일 오후 Lufthanza Airbus에 몸을 실었다. 10여 시간의 비행 끝에 독일 Munun에 도착해 1시간을 보내고 다시 3시간 만에 그리스 아테네(Athene)공항에 도착했다. 예정대로 여행사에서 마중 나온 무뚝뚝한 운전사의 안내로 아크로폴리스 신전 근처의 Divani Acropolis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직원도 운전사처럼 성의 없이 방 열쇠만 주고 짐 날라줄 생각을 않는다. 승강기에는 옥상의 저녁식사가 일생의 추억을 만들 수 있다면서 아크로 포리스신전의 야경이 멀리 있는 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이 나라에 처음 내려 두 사람의 인상만 좋았어도 옥상의 식당에 갔을지 몰라도 나는 근처 식당을 찾았다. 어둠이 내린 거리는 한산하고 식당도 분주하지는 않았는데 식사값이 예상보다 비쌌다. 나는 나중에야 유로화가 물가를 올려 인심마저 차갑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는 400여 개의 섬과 반도로 이어진 작은 나라에 1천만명 정도의 인구가 모여 사는 고대 국가다. 고대 올림픽이 시작되었던 장소와 근대 올림픽이 처음 열린 장소 그리고 최근 2005년 올림픽이 열린 3개의 역사적인 경기장을 갖고 있다. 2일째, 일요일 아침, 그룹투어로 근대 올림픽 경기장부터 찾았다. 1895년 개관 70,000개의 마블 좌석과 좁은 트랙 한 개가 있는 것을 보면 몇 개 안 되는 경기 종목으로 시작한 게 분명하다. 아테네 시를 투어버스가 돌며 최근 치러진 올림픽 경기장과 부두 바닷가 좋은 집 지역을 지나 점심때 아크로폴리스에 왔는데 노동자들 시위로 1시간 이나 기다린 후 입장했다. 아크로 폴리스 신전은 10년 전에도 개축 중이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개축공사로 여기 저기 다 무너져 있다. 아크로폴리스는 높은 지역이라는 뜻으로 기원전 만들어 진 것을 생각하면 2000년이 넘는 구조물이다. 특히 야경이나 멀리서 보는 조망이 아름답고 가까이 가보면 볼품이 없다. 신전아래 전망 좋은 곳의 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오후 자유관광시간에는 신전 옆의 Agoras, temple of Hephaestus, 소 박물관등 견학하고 전차로 이동해 국립 박물관에 들렀다. 박물관엔 B.C 460년 전 Poseidon이나Zeus 신의 청동상 등 수많은 고대 유물들이 전시되어 우리를 고대세계로 인도 하는데 충분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나라, 한때는 제국을 흔든 강대국이 지금은 회색하늘아래 빠르게 변하는 새로운 세계의 추세에 멈칫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4시간 거리의 올림피아에 위치한 올림픽의 고대 발상지를 못 본 것은 또 하나의 아쉬움이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한국식당 “도시락”을 찾아갔으나 일요일 휴업, 그리스음식으로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스의 자존심, 에게해의 산토리니섬
3일째 월요일, 오늘은 그리스의 육지에서 섬으로 이동하는 날 이다. 아침 7시40분에 떠나는 배를 잡기 위해 새벽 5시부터 서둘러 Pireus부두에 나갔다. 쾌속정이라는 뜻의 큰 배는 차200대와 승객 800명까지 탈수 있다고 하는데 40 놋트의 빠른 속력으로 수많은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데 분주했다. 작은 섬 2개 정도를 경유해서 이름만도 아름다운 산토리니 섬에 닦아 갔다. 화산에 영향으로 어두운 암벽과 불으스레한 토양, 화산재가 덮인 검은 해변의 이미지가 독특하다. 10년 전 크루스로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산정 위의 하얀색을 보고 이 여름에 웬 눈 경치 인가하고 의아해 했던 기억이 난다. 역사에 의하면 본래 하나의 섬은 기원전 1470년에 화산폭발의 대 재앙으로 5개의 섬으로 나누어진다. 마치 올챙이가 누워있는 형태의 5개의 섬 중 3개는 무인도이며 2개중 큰 섬이 산토리니섬이다. 그 후 1956년 다시 지진의 재앙으로 많은 구조물이 무너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토리니 섬은 인구 7000명에 사방 70Km SQ의 그리 크지 않은 섬인데 경사가 심한 고지에 도시가 형성되어있어 10년 전 왔을 때는 케이블카를 이용하거나 조랑말을 타지 않고는 산정 도시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지금은 직선의 벼랑길에 지그재그로 길을 놓아 보기에도 아슬아슬하게 차들이 꼬리를 물고 오르고 내린다. Marco 라는 청년의 안내로 Fira도시와 산토리니 해변이 가장 잘 보이는 Cromata Hotel에 도착에 여장을 풀었다. 멀리 코발트색 바다 위엔 이전에도 그랬듯이 서너 대의 크루스배가 자기보습을 뽐내고 하얀색일색에 파란지붕의 그리스 정교회당이 군데군데 십자가를 들어낸 모습은 언제 보아도 산토리니만이 가질 수 있는 평화스러운 모습이다. 내가 문득 그림엽서 속에 들어와있나 착각 속에 빠져 있는데 호텔 메이드는 Wellcome Wine으로 나의 기쁨을 더해 주었다. 그렇다 그리스에 산토리니가 없다면 그리스의 의미는 희석될게 분명하다. Fira시내로 걸어 나오며 전망 좋은 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Bus로 Kamari 해변의 검은 모래사장에 들렸다.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잠시 시간을 보낸 후 Taxi로 Red Beach 까지 갔다가 다시 Bus로 돌아왔다. 산토리니는 박물관과 포도주 생산공장, 화산 폭발시 진동으로 묻혀진 지하도시가 있는데 화요일은 문을 닫기 때문에 내일 Volcano 섬을 포함한 주변의 섬 일주 관광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1일 관광 비는 점심 제외한 $35유로 스페인보다 싸다.
4일째 6월 12일 화요일; 아침 안개 속에 가려진 산토리니는 신선함 그대로였다. 서서히 열리는 바닫가와 언덕 위의 하얀 집들은 꿈과 현실세계의 경계에 있는듯한 착각을 일으키는데 우아한 아침식사와 커피를 호텔방 앞 전방 좋은 곳으로 가져온다. 나는 갑자기 Fantasy Island에 온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진다. 잊을 수 없는 산토리니 바닷가를 보며 아침식사를 마친 후 관광버스가 오기 전 환전소에서 환전하니 $600.00이 425유로가 되 나온다. 마치 같은 달러 600을 400으로 바꿔 쓰는 기분이다. 약 150여명의 우리 그룹은 조그만 관광 선에 옮겨 타고 눈에 보이는 Volcano 섬으로 먼저 갔다. Volcano 섬은 배에서 내려 약 40분 정도 하이킹을 해야 하는데 전망이 좋고 아직도 Active 한지 유황 냄새와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곳도 있었다. 다시 배에 승선하여 섬을 돌아 뜨거운 물이 나온다는 지점에서 수영할 수 있는 사람만 배에서 점프해 hot spring까지 다녀왔다. 200파운드가 넘어 보이는 부부도 수영실력을 발휘해 다녀오는데 걷는 것 보다는 훨씬 쉬웠을 것이다. 배는 다시 눈에 보이는 가까운 거리의 다른 섬에 내려 점심식사를 했다. N. Thirassia라 불리는 이 섬도 높은 산정에 적은 도시가 보이는데 나귀가 올라가고 있고 아래에는 3-4곳의 식당이 해산물을 꼬치에 끼어 구워주는 점심을 팔고 있었다. 15유로 짜리 랍스터를 주문했는데 5유로짜리 일반해물로 바꿔 나왔지만 그냥 불평 없이 먹었다. 속아주는 것도 여행의 묘미니까. 점심 후 물가에 발을 담그며 시간을 보낸 후 다시 배에 올라 본 섬의 가장 북쪽부분인 Ia시에 도착했다. 이곳은 산토리니 행정도시이며 낙조가 유명하다면서 많은 관광객이 북적거린다. 우리는 배에서 내려 아득히 보이는 언덕 위까지 걷는 일도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무심코 타라는 나귀에 4불을 주고 몸을 실었다. 나귀는 우리의 사정은 생각지 않고 그냥 뛰어 달리니 좁은 언덕길에 아찔한 곡예가 시작되었다. 앞에는 200파운드의 그 부부도 나귀 신세를 지고 움찔움찔 올라간다. 약20분 동안 나귀등이 얼마나 흔들렸는지 걸어 올라온 것처럼 식은땀이 등을 적신다. 조그만 Ir시를 돌면서 낙조를 잘 볼 수 있는 식당에 다 달으니 30여 개의 자리가 다 예약되어있고 한자리만 비었다고 내주었다. 식당주위의 길은 모두 낙조를 보려는 관광객으로 만원사례인데 슬며시 한 젊은 관광객 남녀가 식당 앞에 해를 가로막고 선다. 주인과 손님들이 비켜달라는데 막무가내로 서서 예의 없는 행동에 모두 얼굴을 찡그린다. 지는 해는 젊은이의 방해에 아랑곳없이 넓은 바다 물을 온통 빨갛게 물들이며 바다로 빠져들어간다. 어둠이 진 후 Bus로 20분 거리의 fira시 호텔로 돌아왔다.
5일째 6월 13일 수요일, 아침 6시 안개 낀 산토리니섬의 주변을 반시간 조깅하고 돌아와 Fantasy Island를 연상시키는 아침식사를 받았다. 안개가 벗어지는 멀리 바다에는 2-3척의 크루스선이 들어와 하선 준비를 하고 하얀 집과 파란 교회당 십자가는 여전히 어제와 똑 같은 그림을 지키고 있다. 한국에서 온듯한 신혼부부가 아침부터 눈앞 수영장에서 물장구친다.
오늘은 2박3일의 꿈 같은 섬, 포근한 이 Cromata Cave호텔을 떠나 Mykonos섬으로 이동하는 날이다. 부두에서 2시간쯤 연락선으로 이동하니 Santorini 보다 훨씬 적은 아주 아름다운 섬이 나온다. 안내원에 의해 여장을 푼 곳은 Mykonos Grand호텔, 시내에서 떨어져있어 전용 백사장에서 평화스런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찾을 수도 없고 찾아 오지도 않는 조용한 이곳에 한여름 강렬한 태양만이 나의 마음을 안다는 듯 같이 있어주었다.
6일째 6월 14일 목요일, 오늘은 항공편으로 Athen시로 갔다가 오후 비행기로 터키에 가까운 Samos섬으로 이동하는 날이다. 또한 계획한 일정의 그리스에서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나는 그리스 땅이 좁다는 듯 30분 정도씩 두 번 날아서 Samos섬 A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여기도 전용 해변이 있어 휴양지로써의 모습은 보이나 Service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저녁식사는 그리스 민속춤에 바비큐 부페로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와인의 고장인 듯 물은 유료지만 와인은 무제한으로 마셔도 무료였다. 그리스에서 지속적으로 먹어야만 했던 음식은 그리스 셀러드 였는데 야채, 오이, 도마도, 그리고 하얀 색의 치스에 올리브 오일로 드레싱한 음식이었다. 너무 맛있고 영양도 좋을 것 같아 집에 가서도 만들어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2주일을 보낸다는 독일인부부가 이상하리 만큼 나는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었다. 아니 유로(Euro)의 품은 어디나 미국인에게는 불편한 곳이라 느꼈다.
지중해로부터 터키 관문 쿠사다시항
7일째 금요일, 오전은 전용 백사장과 수영장에서 보내고 오후 5시 배편으로 1시간 정도 이동해서 아름다운 도시 터키 Kusadasi항에 도착했다. 10년 만에 다시 찾는 이곳이 감회가 깊었지만 젊은 청년이 기록장도 없이 나와 비자를 주는데 20달러나 20유로 아무것이나 OK라는데 친근감을 느꼈다. 비정상이 친근해 지는 점은 바보 같아야 친구가 많은 것과 비교 되는 점인가. Castle관광에서 나온 안내인의 차로 해안 바다와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Kurma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방 베란다에 나오니 이제 한여름 긴 태양의 그림자가 빨간 불기둥이 되어 끝없는 바다위로 뉘엿뉘엿 저물어간다. 아래층의 잘 정돈된 식당 테이블과 수영장의 하얀색 십자기둥 사이에도 빨간 햇살이 걸쳐있다. 저녁식사는 예상하지 않은 무료 부페였다. 바다 위에 떠있는 느낌을 주는 식당 테라스에 앉아있는 것 만으로도 행복한데 맛있는 식사가 무료라니, 나는 그리스 셀러드를 만들어 터키 셀러드라 부르며 먹었다. 식사 후 수영장 옆에서 춤과 노래가 벌어지는데 나는 한국대표로 춤과 노래를 불러 최우수 상으로 와인 한 병과 Certificate를 받았다. 이후 나는 행사 때마다, 약간 비싼 물건을 살 때마다 Certificate를 받았는데 이는 가짜가 많은 터키에 인정해주는 유일한 방법이 이길 이라는 것을 나중 알았다. 나는 터키로부터 끼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 받은 셈이다.
8일째 토요일, 호텔에서 아침식사 후 그룹관광에 끼어 30분쯤 이동해 Ephesus관광에 나섰다. 아침 크루스 손님이 많이 내려서 우리는 Ephesus를 오후에 보기로 하고 Artemis신전과 성모마리아 집을 먼저 보기로 했다. Artemis신전은 다 부서지고 기둥만 하나 남았는데 기원전 500년부터 지어진 이 신전은 화재와 전쟁으로 여러 번 부서지고 또 지어졌다고 한다. 이 고대 7대 불가사이의 하나로 알려진 이 신전에서 나온 여신상은 시내 박물관에 잘 보관되어 있다. 신전의 모습을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주민이 유창한 영어로 자신은 이곳에서 10년간 발굴작업을 하는 사람인데 당시의 진짜 동전을 발굴해 몇 개 가지고 있으니 사라고 한다. 영어를 잘하면 가이드하면 될 것을 그렇게 사람을 호객해서 가짜 동전 몇 개를 팔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신전주위의 사도 요한 교회와 아야술록성 그리고 박물관까지 보고 점심식사를 했다. 식당 앞 상점에는 한글로 된 관광책자가 있어 몇 권을 샀다. 특히 소아시아 성지 순례가이드는 현지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식사 후 제법 큰 산을 돌아 중턱에 위치한 성모마리아 집을 관람했다. 1890년 독일 수녀의 꿈을 통해 암시된 지점에서 찾아낸 이 집은 그 후 여러 가지 정황과 기록의 비교로 확실히 성모 마리아가 사도 요한과 함께 피신해 살았던 장소로 입증되었다고 한다. 산을 내려오니 드디어 에베수스의 구시가지 입구가 나온다. 일행은 차에서 내려 2-3Km는 족히 되는 무너진 시가지를 걸으며 우리는 모두 과거로 돌아갔다. 이 도시는 기원전 6세기경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번창했던 도시였으나 여러 차례의 지진과 해안의 육지형성으로 도시는 근처 셀축으로 옮겨지고 모든 구조물들은 황폐해진 곳이다. 거대한 극장과 함께 목욕탕, 병원, 상가 등의 많은 건축물중 셀서스 도서관 건물은 형체가 그래도 잘 보존되어 이 나라 화폐에도 도안된 유명한 건물이 되었다. 건물기둥 사이에는 지혜, 지식, 우정, 이해를 상징하는 네 개의 여신상이 서있다. 이 건물은 사도 바울이 예베소에 거하면서 두란노 서원에서 매일 강론했다는 성경에 나오는 건물이다. 이 예베소 일대는 7대 소아시아 교회가 있고 사도 바울의 고향과 전도지가 있으며 요한의 전승지, 성모 마리아의 전승지가 있어 기독교 신앙의 순례지로 세계의 기독교인들은 매일 수없이 참배하는 곳이지만 실제로 터키는 이슬람 국가이므로 이곳을 관광의 목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듯했다. 2시간이상을 더위 속에 계속 걸어 출구에 다 달으니 다리가 몹시 아프고 피곤했다. 기다리는 버스로 30분 거리의 Kurma호텔로 돌아왔다.
9일째 6월 17일 일요일, 짐을 다 챙겨 2시간 거리의 Pamukkale관광에 나섰다. 석회수 온천물이 녹아 하얀색으로 멀리 보면 하얀 성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온천지대다. 뉴욕에서 온 부부와 함께 영어가 신통치 않고 성격이 급하게 보이는 가이드가 동행되었다. 2시간 거리라는데 운전수도 지역을 잘 모르고 가이드도 경험이 적은지 온천근처 식당까지 4시간이 넘게 걸렸다. 식사 후 온천장에 도착해 크레오파트라 수영장까지 안내하고서 2시간 후 데리러 오겠다고 한다. 온천 후 박물관도 봐야 하고 고대무덤, 그리고 구시가지 Ruin까지 보려면 어림없는 시간이다. 아무런 지역 설명도 못하고 안내가 그 모양이냐고 불평하니 2시간 반 후에 오겠다고 한다. 아무래도 오늘 가이드는 틀렸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것도 운수니까. 수영장은 옛 고성터에 온천 물을 우회시켜 모든 질병이 낫는 신비한 물이라는 소문에 대만원이었다. 온천욕을 끝낸 후 다른 곳 가볼 엄두도 못 내고 버스로 돌아왔다. 이 도시가 기원전 생긴 도시지만 지진으로 무너지고 그 후 다시 번성하다 언제 다시 시들했는지 물어보니 대답도 잘못하고 두 번 질문하니 술 먹었냐고 묻는다. 오늘 가이드는 정말 신통한 사람이다. Pamukkale 뻐스역에서 나는 가이드와 헤어져야 했다. 팁을 달라고 정식으로 요구해 20불을 주고 나는 가이드가 끊어준 버스표로 갑바도기아라고 하는 동굴도시로 10시간의 밤 버스 여행을 해야 한다. 그러나 알고 보니 나를 태운 만원버스는 데니즐리까지만 가고 그곳에서 다시 갈아타야 하는 것을 버스 속에서 알았다. 데니즐리 버스 정류소엔 영어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밤 9시 버스가 있다는 것을 알기엔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가이드가 자세한 설명을 하거나 15분쯤 달려서 아주 데니즐리에서 버스를 태웠으면 좋았을 텐데 미숙한 가이드 덕택에 하마터면 미아가 될뻔했다. 버스엔 안내 아저씨가 주스와 과자도 주고 편히 갈수 있도록 배려해서 안심했다. 내일 가이드는 어떤 사람이 나타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동굴도시와 지하도시가 있는 갑바도기아
10일째, 월요일, 밤새 달려온 버스를 새벽녁에 한번 더 갈아타고 6시30분에 Goreme시에 내렸다. 그러나 마중 나와야 할 안내원이 보이지 않았다. 정해진 Museum호텔에 전화하니 내이름의 예약이 없다고 한다. 나는 Kussadasi Castle 관광에 전화해서 이곳 Agre관광이 나를 안내한다는 사실을 알아 전화하니 안내원이 버스 대합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만나 임시 숙소에 가서 간단히 씻고 아침을 대충 먹고 9시 관광에 합류했다. 투어 가이드는 영어가 출중한 Ali라는 젊은 청년인데 아주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이 들어 보이는 Osman이라는 운전수도 한국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친구, 갑시다, 등의 한국말을 적시에 사용하곤 한다. 이 지역은 기암석 들과 돌산이 깎여 지고 그사이로 동굴 주거지가 형성돼 독특한 도시가 형성되었다. 기원전부터 형성된 화산재와 풍광에 약한 지반이 빗물에 오랜 세월 씻기어 침식된 지질 층에 주거지가 형성되어 어떻게 보면 위험한 주거형태라 많은 지역이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사용하지 못하는 지역도 많았다. 괴레메 야외 박물관, 동굴교회, 버섯모양의 돌기둥들 형형색색의 다른 지형들이 제각기의 모습을 자랑하는 세계문화 유산을 하루 종일 둘러 보았다. 관광이 끝나고 Agre관광의 대표인듯한 기한(kihan)은 나를 Museum 호텔이 아닌 Yurak호텔에 안내해 주어 당황케 한다. 그런 이유도 설명도 없이 비슷하니까 그냥 자라는 식이다. 이 호텔은 동굴호텔인데(Museum 호텔도 사진에 보면 동굴호텔) 약간은 위험했지만 동굴 반대편 새 건축물에 위치한 방을 배정 받아 안심했다. 나중 안일이지만 신통치 않은 자기 숙소를 경영하면서 원만하면 이숙소로 보내고 아침식사가 빵 두 쪽, 찐 달걀 1개. 도마도 두 쪽으로 끝낸다. 자기회사 투어 일행은 모두 여기서 점심 식사를 제공했다 물론 신통찮게, 이 동네에서는 잘 나가는 젊고 유망한 사람인데 영어 못하는 한국 개인 여행객들이 많이 이용 당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시골에서 어이없는 일을 만났지만 그(Museum Hotel) 호텔도 정말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참기로 했다. 이 일로 나는 믿지 못할 이곳에 Certificate 받지 못할 짓 하는 사람은 모두 기한(치한?)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호텔에서 나와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시내로 나가는데 차량통행이 금지되고 도보는 허용되는 길로 나가니 집채만한 바위가 언덕에서 떨어져 길을 막고 있는 게 아닌가. 4 개월 전에 사고로 사상자가 발생했다니 위험한 도시다. 인류의 자연유산이 이렇게 위험하다니? 이런 생각에 이 도시의 운명도 멀지 않게 느껴진다. 전망 좋은 식당옥상에 오르니 무너진 산이 눈에 바로 들어온다. 대충 식사를 마치고 시내구경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가로등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길이다. 오늘 이 지역 전기가 고장이라고 한다. 설마 오늘은 동굴이 무너지지 않겠지, 기한 때문에 여러 가지 안 할 고생까지 한다고 느꼈다.
11일째, 화요일 오늘은 새벽 일찍 열기구(Ballon)를 타고 괴레메 계곡을 올라 해돋이를 구경하는 날이다. 10개가 넘는 열기구들이 제각각 5-15명씩 태우고 1000m 정도 올라가는 대형 풍선이다. 푸로판 가스로 열을 가하면 오르는 이 열기구는 바람이 불면 뜨지 못하고 쉽게 내리고 싶은 곳에 내릴 수 없는 단점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가격도 $250.00이라 비싼 편인데 특수한 경험이라서 1시간 동안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넓은 계곡의 기암괴석이 한눈에 들어오고 넓은 지역을 사진 찍고 망원경을 보는데 1시간은 부족했다. 아침 식사 후 단체그룹과 함께 다시 계곡을 2시간 정도 하이킹하고 오후에는 지하도시를 관람했다. 좁은 지하에 수천 명이 숨어 지낼 수 있는 도시를 형성하고 사용한 것은 불가사의한 일처럼 보였다. 일본과 한국에서 온 신혼부부들, 개인여행자들 많은 사람들과 같이 2일간의 관광을 끝으로 헤어진다. 지구상 곳곳에서 다른 형태로 살아가는 이들도 우리들의 삶처럼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면서. 저녁 식사를 위해 다시 시내로 나가다가 호객하는 10세쯤 되 보이는 아이를 따라가니 40대의 식당 주인이 나와 자기 식당으로 가자고 한다. 전망 좋고 개업한지 얼마 안되 엄마솜씨를 낸다고 하여 따라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Ismael 이라는 주인에게 메뉴에 없는 음식을 설명해 만들어 주는 맞춤요리를 먹고 와인도 덤으로 따라주었다. 착하게 보이는 식당주인은 어떻게 식당을 잘 할 수 있을지 골몰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식당도 언덕난간에 위치해 있어서 언제 또 무슨 일이 날지 모르는 지역에 속해 내심 답답한 마음이 앞섰다.
12일째 수요일, 12시 40분 비행기로 이스탐블로 이동하는 날이다. Kussadasi호텔에서 경품으로 받은 와인을 아직도 못 먹었는데 비행기에 가지고 갈수도 없어 가까운 이스마엘 식당에 찾아가 선물로 주고 인테넷 영업이 궁굼 하다고 해서 많이 설명해 주고 함께 단골약국에도 들려 이야기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카이세리 공항까지는 1시간 정도의 먼 거리를 버스로 달려 비행기로 갈아타고 2시간 후에 이번 여행의 마지막 기착지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2천년 역사의 이스탐블
이스탐블은 북쪽의 흑해와 남쪽의 마르마라 해가 연결되는 보스포러스 해협에 1Km의 다리가 연결되어 아시아와 유럽 또는 기독교와 이슬람, 동양문화와 서양문화가 만나는 실크로드의 종착지 이기도 하다. 도시인구가 전체 터키의 15%를 차지하는 항상 바쁘고 희망찬 도시다. 평생을 여기서 산다는 친절한 안내인의 공항픽업으로 우리는 해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모스크 교회건물의 신비한 모습을 보면서 신도시에 위치한 5성급 마르마라 호텔(The Marmara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 앞은 탁심(Taksim)광장이라는 매우 분주한 로타리 인데 호텔이름처럼 첫날의 도시분위기는 “더 말을 마라” 다. 가만히 보면 탁심이나 갑바도기아에서 우리를 속인 여행사의 친구이름 기한 등의 단어들이 우리말과 잘 어울리는 것을 보면 몽고 땅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이들 민족과 동쪽으로 이동한 한민족은 원래 같은 민족이란 말에 수궁이 간다. 식사의 이름도 고기를 작은 꼬챙이에 구어 낸 메뉴이름이 “케밥” 이다. 또한 600년 전 건축가 “시난”이란 사람은 이스탐불의 교회, 병원, 학교 등의 300여 개의 건축물을 지어 지금 유명한 관광 건축물은 모두 그의 솜씨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80세에 에디르네의 셀리미예 자미(모스크)을 지었고 100세까지 살다 죽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 호텔을 나와 탁심 광장에서 남쪽으로 1Km나 되는 이스틱크랄(Istikral) 거리가 이 도시에서 는 명동거리다. 어깨를 부딛칠 정도의 많은 사람과 끝없이 펼쳐진 상가, 엿처럼 늘어지는 이 동네 아이스크림상점이 즐비하다. 지도를 보며 해산물 식당을 찾아가니 지도의 그 집은 없어지고 자기집이 최고란다. 또 기한 같은 친구 아닌가 의심하면서도 더 걷기가 싫어 의자에 앉았다. 이곳은 생선을 눈으로 보여주고 가리키면 그냥 구워주는 식사가 이채로웠다. 새우에 버터를 넣어 데운 요리를 생각하며 아 이 사람들은 유목민 출신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 치스, 말린 고기 등에 익숙하지 생선요리는 약한가 보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버터로 읶힌 새우요리 때문에 약간 배가 아파 늘어나는 아이스크림 맛을 보고 싶은데 참고 호텔로 돌아왔다.
13일째 6월 21일 목요일, 천년 역사의 도시 이스탐불 관광 첫날이다. 신도시 탁심 광장에 우뚝 선 말마라(Marmara)호텔에서 구 도시 관광의 핵심지를 가려면 아타 트르크(터키 공화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을 기념하는)라는 중심거리를 지나게 되는데 이 거리 한 부분에 길게 걸쳐있는 높이 20m의 수도교를 지나게 된다, 4세기에 물을 확보하기 위해 2층으로 된 수 Km의 교량처럼 된 구조물이 지금도 도시 중심부에 있는 것이 이채롭다. 이와 비슷한 수도교 다리는 스페인 세고비아에도 있다. 여러 호텔에서 픽업된 관광객들과 크루스 여행객들을 잠시 정리하여 우리일행은 그 중 한 그룹이 되어 먼저 히포드롬 옛날 경기장터에 갔다. 박물관과 여러 상가와 민가가 섞여져 지금은 이곳이 경기장이란 분위기가 아니지만 3세기 초에 건설되어 3만 명의 관중이 마차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경기장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또 여러 번의 반란군들의 시위가 있던 곳이고 또 그들이 잡혀 처형된 역사적인 장소다. 10년 전 이곳을 방문 시엔 가이드의 영어도 잘 알아들을 수 없고 집시들이 관광객들을 많이 괴롭혔는데 지금은 모든 것이 깨끗해지고 안전해진 느낌이다. 이곳에는 3개의 조형물이 있는데 한 개는 이스탐불에서 가장 오래된 핑크색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오벨리스크다. BC 15세기에 만들어져 이집트에 있었던 기념비를 AD 390년에 비잔틴 황제가 옮겨와 이곳에 세운 거의 3500년이나 되는 조형물이다. 무게는 300톤이며 원래는 32m의 기념비가 옮길 때 파손으로 20m의 길이가 되었다. 아래 받침대 부분에는 히포드럼에서 있었던 전차경기, 무희들의 춤, 사신과 만나는 황제의 모습 등이 묘사되어있다. 또 한 개의 조형물은 두 번째로 오래된 기념비로 BC 479년에 그리스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 세워졌던 뱀 기둥을 326년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에서 이곳에 옮겨와 세웠다. 3마리의 뱀이 올라가는 모습의 이 기둥은 원래 머리 위에 황금 트로피가 있었으나 오트만 시대 때 부서져 그 중 한 개는 이스탐불의 고고학 박물관에 다른 한 개는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마지막 기념비는 10세기에 콘스탄틴 7세에 의해 세워진 32M의 기념비인데 1894년 지진으로 부서진 것을 최근에 복원 시킨 것이라 한다.
그룹은 바로 뒤에 위치한 소피아 박물관으로 갔다. 서기 360년에 세워진 이 성당은 화재로 무너졌다가 537년에 다시 재건 되었다. 이 성당은 바티칸 베드로 성당보다 작지만 그 보다 1000년 전에 세워진 건물이다. 오스만 정복으로 인해 성당의 모든 그림이 회 칠해져 있다가 근대 공화국 정부의 정착으로 모자이크의 회 칠을 벗기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모스렘 벽화는 사람의 형상을 그리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 얼굴, 성모 마리아의 모습 등이 숨겨져 있다가 벗겨내니 퇴색된 그림들이 되 버렸다. 그래도 모슬램 국가에서 경비를 들여 이를 복원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다. 핑크색 무늬의 건물은 주변의 꽃과 분수대와 어울려 매우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는데 캐도릭 문화와 이슬람 문화에 따라 운명을 달리했던 기구한 삶이 담겨진 건물이다. 우리는 가까이 있는 브루 모스크로 옮겨 1616년 술탄 아흐멧1세에 의해 지어진 이슬람 교회건물을 둘러봤다. 이슬람 교회를 터키어로 자미라 하는데 건물 코너에 첨탑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건물 주변으로 모자이크 박물관, 양탄자박물관, 터키와 이슬람 미술관, 술탄의 영묘, 목욕문화의 하맘 등의 볼만한 건물들이 많으나 한정된 시간에 다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우리 일행은 바닫가 근처의 어느 식당에 들려 점심을(케밥, 또는 생선구이) 먹고 오후 관광을 준비했다. 도시는 종교적인 이유로 머리에 수건을 쓴 여자들은 20%쯤 되 보이며 거리는 하루 5회의 기도시간에 교회에서 확성기로 울려 퍼지는 기도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사우디에서 온 두 부부는 부인이 더운 여름인데도 온몸을 눈만 빼고 까만 옷으로 가려 매우 불편하게 보였다. 오후 관광은 술래마니에 자미 라는 모스크를 관람했다. 신발을 밖에 벗고 들어간 모스크는 한쪽에서 기도하는 분들도 많아 조용히 설명을 들어야 했다. 미마르 시난 이라는 건축가에 의해 1557년 완공된 이 모스크는 7대 술탄의 시대로 오스만 왕조에 최장기간의 46년 제국의 황금시대를 이루었을 때 지은 것이라 한다. 4개의 첨탑이 우람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 모스크는 시난이 69세 나이에 완공했는데 이는 그의 습작이라 평하고 그 후 100세까지 300여 건물에 30여 개의 큰 모스크를 완성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터키에는 카펫(양탄자)이 유명하다. 쿠다사스에서는 양탄자 만드는 학교에도 갔었는데 관광중에 가끔 카펫상에 들러 사과 차를 대접 받으며 카펫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좋은 것이라면서 15000불 짜리 까지 있는 것을 보았지만 카펫이 우리문화가 아닌 이상 내게는 많은 흥미를 갖게 하지 못했다. 우리는 근처에 잇는 그랜드 바잘의 쇼핑 상점을 구경했다. 4400여 개의 엄청난 실내 쇼핑가에는 금은 보석, 장식품, 토산품, 양탄자, 도자기등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물건도 많고 반 이상 깎는 분위기가 연출 되었다. 실크로드의 마지막 장소라 부르기에 충분했다. 여기서 시간을 보낸 뒤 마지막 관광지 토카프궁전으로 향했다. 대포의 문이란 뜻의 Tokap궁전은 1467년 완공된 술탄 왕국의 정치 중심 역할을 한 건물이다. 문과 문 사이가 상당이 긴 이 궁전을 만나려면 제1, 제2 정원을 지나야 된다. 수많은 방들은 왕의 접견실, 침소, 회의실, 보물관, 식당의 조리실, 여인들의 하렘방등 셀 수 없이 많아 다 볼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아픈 다리를 쉬려고 건물 뒤 편으로 돌아 가니 보스포러스 해협과 다리가 시원한 바람과 함께 한눈에 들어온다. 약속된 시간이 다 되어 그룹버스 타는 곳으로 나와 일행과 함께 구시가에서 갈라타교를 넘어 신시가지로 넘어와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식사를 한식으로 하기 위해 식당을 찾아보니 5-6개의 한국식당 중 신시가지에 가야식당이 있다. 전화하고 5분쯤 걸어 가서 오랜만에 한국음식을 맛 보았다.
14일째, 금요일, 오늘은 자유관광 하는 날이다. 날씨는 화창하고 관광버스를 기다리거나 시간에 구해 받을 필요 없이 자유스런 시간들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단연 보스포러스 해협이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낭만이 있고 절경이 있고 환희와 한탄의 사연이 있다. 기독교와 이스람, 비잔틴과 오스만 제국이 대결을 펼치면서 인류역사의 흐름을 결정하던 역사의 현장이다. 알렉산더 대왕도 여기를 건너 대 평원을 정복한 승리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비잔틴왕국은 오스만의 거친 세력에 무릅을 끓어야 했던 영욕의 현장이다. 도도히 흐르는 조용한 강물에 낚싯대를 내린 강태공의 한가로운 여유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흑해에서 지중해로 흐르는 자연스런 물살과 함께 그 아래로는 염분을 가득 먹은 지중해의 무거운 물살은 흑해로 또 강력한 힘을 가지고 역류하는 역동의 해류가 있는 현장이다. 먼저 호텔근처에 있는 항구 카바타쉬 항으로 나와 20분 도선거리의 카드코이 항으로 건너갔다. 도선비는 1$이 안 되는 요금에 출퇴근하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카드코이 항구는 아시아의 철도가 시작되는 하이다르 파샤역이 있는 항구다. 유럽으로 가는 기차역의 시작은 구시가지 끝에 위치한 시르케지 역이다. 이 두역 사이를 기차가 연결 한다면 아시아와 유럽이 기차로 연결되겠지만 이는 현대문명으로도 시도되지 않은 일이라 1km의 가깝게 보이는 거리를 배로 연결해야만 한다. 항구에는 아크 투르만이 학생들과 이야기하는 동상이 서있고 그 아래에는 어린 여학생들이 담배를 태우며 담소하고 있다. 아크 투르만은 학생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모습이며 근대 공화국 창시자로 종교와 정치를 분리한 위대한 지도자로 지금도 존경을 받고 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머리에 수건을 두르는 일을 금지했고 이런 이유로 터키는 이슬람 국가 중 머리에 수건을 쓴 여성들이 인접나라에 비해 적다고 한다. 시간 맞추어 나오는 모스크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담배만 계속 피워대는 청년들도 많았다. 종교보다 현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국가 기강 속에 깊이 파고든 종교적 이념을 국가의 발전을 위해 과감히 버릴 수 있었던 아타 트루크의 어려운 결정이 오늘의 터키발전의 원인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항구 바로 위에 위치한 하이다르 파샤역을 구경하고 조그만 미니버스로 북쪽으로 이동해 위스크다르 지역을 거쳐 보스포러스 대교아래 베일레르베이 궁전에 도착했다. 1865년 여름별장으로 지어진 이 궁전은 바닫가에 위치해 경관이 아름답고 호화롭다. 오스만 바로크 양식의 실내장식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금장식의 산데리아는 몹씨 우아하게 빛나고 고풍스럽다. 천천히 흐르는 강물위로 육중한 다리가 걸려있고 수 백대의 차량행렬이 개미들의 이동처럼 보인다., 멀리 유럽 쪽엔 비슷한 돌마바흐 궁전이 보인다. 1856년 파리 베르사이유를 본떠 만든 이 궁전도 화려한 모습은 이곳과 비슷하다고 한다.
시장기가 느껴질 무렵 궁전을 나와 근처 바닷가 식당에 앉았다. 육중한 보스포러스 대교는 여전히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차량행렬을 무겁게 받치고 있고 멀리 북쪽으로는 제2의 다리 파티대교가 보인다. 남쪽으로는 구시가지 술탄 아흐멧지구의 모스크 첨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생선요리를 시키니 첫날저녁처럼 생선 한 마리를 구워가지고 나온다. 주위경치에 눌려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게 식사가 끝났다. 생각 같아선 다리를 이용해 육로로 돌아가고 싶지만 트래픽이 많을 것 같아 위스크다르항으로 이동해 구시가지 에 인접한 시르케지 항으로 가는 배를 탔다. 마지막 샤핑을 위해 유명한 그랜드바잘을 한번 더 가보자는 심산이다. 갈라타교가 보이고 시르케지 역의 기차들이 출발하는 이 지점이 이스탐불에서 제일 붐비는 곳이다. 구시가와 신시가지가 나뉘고, 아시아와 유럽이 나뉘며 육로와 해로가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하 상가에서 조카 선물과 싼 시계를 샀는데 이것도 아시아에서(중국) 실크로드의 길을 따라왔는지 예쁘고 시간도 잘 맞을 것 같다. 그랜드바잘에 다시 가 샤핑 하며 터키의 공예품들을 감상하고 전차로 호텔에 돌아왔다. 식당에 가면 또 구워진 생선을 먹어야 할 것 같아 한국식당에 다시 찾아 갔다. 낯선 곳에서의 한국음식은 고국의 정을 흠뻑 느끼게 한다.
천년 역사의 도시는 2일 관광으로는 어림도 없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 도시, 역사의 영욕을 한 몸에 안고 묵묵히 오늘까지 왔고 앞으로도 새 역사를 위해 변화를 거부하지 않으려는 이 도시를 세세히 보기 위해 꼭 또 한번 찾으리라 다짐하며 아쉬운 작별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7/29/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