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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왕국과 나일강 문화의 이집트

고대왕국과 나일강 문화의 이집트(Egypt)세계(11/09/2007)

5000년 역사와 신비를 간직한 나라 이집트는 중동지방이지만 아프리카에 속해 있고 아랍국가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100명도 넘는 왕이 기원전 3000년부터 순차적인 계보를 가진 것도 불가사이인데 엄청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모세영화에 나오는 그 파라오(Pharao, 왕들을 칭함)들은 어떤 생각을 가졌으며 상형문자의 비밀은 어떻게 풀렸
을 까 하는 끝없는 호기심은 여행을 준비하는 한달 동안 내내 그치질 않았다.

1. 7대 불가사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Giza지역)
이집트는 사막이라 한여름은 섭씨40도가 넘는다고 가을을 택해 10월 22일 월요일 아침7시에 출발한 델타여객기는 5시간의 뉴욕까지, 그리고 10시간의 지루한 여행 끝에 화요일 아침 11시 카이로 공항에 도착했다. 예정대로 투어 메네져 George의 안내로 카이로 시내를 거쳐 기자(Giza)지역 MenaHouse Oberoi호텔에 투숙해 자유시간을 가졌다. 카이로는 인구 2천5백 만 명의 대도시로 시내는 매연과 함께 차선을 지키지 않는 차들로 복잡하고 길가에 세워진 왕의 석상과 함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는 아랍어가 그림처럼, 무슨 암호처럼 신기하게 눈에 들어온다. 카이로에서 서쪽으로 13Km떨어진 기자지역은 4500년 전 고대 이집트 4왕조시대에 만든 피라미드가 있는 지역이다. 호텔은 옛날 왕궁을 복원시켜 만든 고급으로 방안에서 피라밑이 안개(매연?)에 희미하게 보였다. 1불에 5.6 LE(이집트파운드)의 환율로 환전하고 수영도 하며 내일을 위해 일찍 수면을 취했다.

다음날 이만(Iman)이라는 아랍복장의 여자 Guide와 Sama라는 운전수의 안내로 기자지역 1일 관광에 나섰다. 먼저 한40분 남쪽으로 달려 멤피스로 향하는데 누추한 시골길에 말과 당나귀, 마차들이 도로에 같이 다니는 것이 이채롭다. 아침부터 머리가 아프고, 소화가 안 되는 것이 매연 때문인지, 음식 때문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주위를 다른 곳에 집중하기 위해 아랍글자의 알파벳을 배우기로 하고 이만을 설득했다. 30자 정도의 글자는 올챙이 움직이는 것처럼 어려운데 발음 또한 목 안쪽에서 올려내는 소리로 몹시 어렵다. 멤피스는 한때 고대왕국의 수도였다는데 지금은 한가한 시골이 되 버렸고 그나마 박물관에 누워있는 람세스 2세 석상이 옛 영화를 말해 주는듯싶다. 길이가 15m나 되는데 다리의 일부가 훼손되어 있는 모습을 2층 화랑에서 관람한다. 광장에는 1912년에 발견된 10m높이의 스핑크스가 단정한 얼굴로 관광객을 맞이한다. 3000년 전 수도가 이렇게 폐허가 됐고 1900년대에 그 유적들이 발견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첨성대는 그때부터 그 자리인듯한데..

이집트는 국토가 우리나라의 4-5배쯤 되는 크기로 전 국토가 대부분 사막이고 4700Km의 나일강 부근에 밀집해 살고 있다. 아프리카 빅토리아 폭포에서 시작된 강원은 이디오피아와 수단을 거쳐 이집트에 생명의 농경 수를 공급하며 카이로 북쪽 지중해로 빠진다. 나일강 전체의 길이는 6700Km로 아마존 강과 우위를 다툰다. 지중해에 접한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 까지는 농업용 관개가 잘되 농산물이 풍족하고 기후도 좋지만 카이로 아래로 룩소, 에드푸, 아스완 등의 도시는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의 기후와 열악한 환경으로 많은 인구가 살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 지역에 산재한 역사의 유물들이 모래에 묻혀있어 1900년부터 시작된 고 성능 기계에 의한 발굴작업이 여러 나라에 의해 경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아이러니 한일은 왕들이 죽으면 파헤치지 않기 위해 가짜 무덤을 만들어 숨기에 급급했고 이제는 많은 국가 돈을 들여 파헤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만은 무덤 속에 금은 보화가 있으니까 감추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의 목적은 당연하다는 이야기다. 이만(Guide)도 이제 그만 세금을 국민복지에 쓰고 선진국 불러 유물 찾는 일을 중지했으면 싶다고 한다.

그룹은 남쪽으로 더 운전해가서 사카라라는 도시의 조세르왕 피라미드를 관람했다. 60여m 높이의 작고 오래된 계단식 피라미드가 멀리 보이고 사막 군데군데 파헤쳐지는 왕 굴들의 모습이 공사장 터처럼 복잡하게 눈에 들어온다. 옛날 파라오들은 왜 피라미드를 만들었을까 는 또 다른 의문이다. 무덤이면서 그 안에 관의 흔적은 없다. 그러면 영생으로 가는 장제 기념 건조물 이다는 설도 있다. 이집트에 와서 이틀 동안 의문시되는 문제들이 하나도 풀리지 않아 아예 해답을 얻으려 안 하는 일이 편 할 것 같다. 아직도 계속 아픈 두통과 소화불량의 원인까지도.. 우리는 다시 오던 길을 돌아 기자지역 이집트의 자존심 쿠프왕의 대형 피라미드로 갔다. 카이로 시가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한 높이가 무려 146m, 가로 세로 230m의 정사각형 위에 2톤짜리 무게의 돌을 230만개를 쌓아 올린 참으로 놀랄만한 구조물이다. 10만 명의 인원이 20년 동안 매년 3개월씩 일해 만들었다 하니 놀랍고 이는 노역이 아니고 나일 강물이 범람 시 일을 주기 위해 직업창출로 만들었다고도 한다. 그 옆에는 아들 왕과 손자 왕의 상대적으로 적은 피라미드가 2개 더 있고 아주 작은 피라미드 6개와 어울러 총9개의 피라미드가 주위의 낙타 군과 어울려 멋진 조화를 이룬다. 나는 관광객과 어울려 쿠푸왕의 피라미드 속으로 들어갔다. 아주 좁은 통로 안에 방 두 개가 있고 작은 환기 통이 있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공기가 탁하다. 아마도 하루 300명 제한의 관광객이 좁은 공간에 밀집 돼서 인 것 같다.

그룹은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피라미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스핑크스로 갔다. 사람의 얼굴에 사자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는 20m높이에 57m의 길이로 얼굴은 아랍인과 영국인에 의해 크게 훼손된 째 무언의 시위를 하는 듯 앉아있다. 고 왕조 시대 때 유물이니 4500년이 넘는 세월을 9개의 피라미드를 지키는 수문장처럼 육중하게 서있다. 주위에 움직이는 것은 낙타들이다. 낙타는 탈 때는 혼자 타지만 내릴 때는 낙타가 앉아 주지 않으면 내릴 수 없다. 이런 약점을 이용해 사진도 찍어주고 팁을 자꾸 요구하는 호리꾼들을 스핑크스는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다. 저녁식사 후엔 스핑크스 앞에서 역사를 조명하는 Sound and Light 쇼가 있어서 옷을 두텁게 입고 참석했다. 커다란 스피커소리와 현란한 불빛의 조화는 긴 세월을 집약이라도 하려는 듯 멀리 또는 가깝게 반짝이며 밤하늘로 번져갔다.

2. 크레오파트라의 숨결이 있는 지중해의 고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10월 25일 목요일, 아침 새벽 이슬람 회당 스피카에서 나는 기도소리에 잠이 깼다. 아랍인은 1일5회 기도하며 술과 돼지 고기를 먹지 않고 남성은 원피스 같은 갈라비아라는 옷을 입고 여성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며 온몸을 발까지 가린다. 남성은 적절한 이유에 의해 4명의 부인과 중혼 할 수 있으나 여성에게 4명의 남성이란 상상할 수 조차 없다. 까만 옷으로 눈만 내놓고 다 가린 여성은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 얕은 컬러의 색으로 된 수건과 옷을 많이 선호하는 젊은 여성이나 학생들이 많이 보인다. 오늘은 카이로에서 북쪽으로 3시간 거리의 알렉산드리아 시를 방문하는 날이다. 아침 8시 운전사 Sama의 안내로 잘 정돈된 고속도로를 달렸다. 끝없는 사막 지대도 보이며 파란 사탕수수와 과일나무들로 우거진 농가도 많이 보인다. 알렉산드리아 박물관 앞에서 약속된 여성가이드 Niven을 만나 우선 이 도시 역사부터 유물을 통해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크레오 파트라 7세의 사진과 알렉산더 대왕의 얼굴석상이 빛난다. 그러나 이분들의 흔적이 이 도시에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지않다. 로마 원형극장과 폼페이 기둥, 귀족계급의 무덤이 있는 카타콤베를 거쳐 최근 개관한 도서관을 차례로 방문했다. 시간이 남아 해변가를 한 바퀴 돌고 어느 해산물 식당에 들렸다. 식당엔 메뉴가 없고 대신 살아있는 해물을 직접 눈으로 골라 기름으로 튀겨주는 우리에겐 낯선 판매방식이다. 적당히 주문 했으나 음식이 남아 싸 들고 호텔로 돌아와서 늦게 까지 맥주안주 감으로 사용해야 했다. 다음날은 1/2 day관광으로 민속촌(The Pharaonic Village)을 보는 날 이다. 역시 Iman과 Sama의 안내로 이집트의 고대와 중세 현대가 사진이나 조형물 그리고 당시를 재현한 모형으로 이해하기 쉽게 만든 마을이다. 크레오 파트라의 박물관,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어릴 적 나일강 이야기부터 현대 낫셀, 사다트 대통령까지 비교적 상세히 소개한 출중한 역사 박물관이다. 돌아 오는 길에 파피루스 박물관에 들렸다. 나일 강가에 무수히 자라는 파피루스 나무를 잘라 겹치게 놓은 후 돌로 눌러 만든 종이 위에 고대 그림을 그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방법의 종이그림이다. 그림들은 대게 고대 신화나 왕들의 생활을 표현해 그려졌던 그림들을 복사한 것인데 종이가 기념되어 몇 장 사고 일찍 숙소로 들어와 쉬었다.

3.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아브심블(Abu Simbel)
10월 27일 토요일, 새벽 3시에 모든 짐을 다 들고 공항으로 이동한 이유는 오늘 아스완 공항에 내렸다가 다시 40분 비행거리의 아브심블(Abu Simbel)을 오전 내에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나일강은 해마다 범람해 주변 농경지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대신 근처 주택에 대한 피해가 막심해 1단1장의 문제가 항상 제기 되어왔다. 이를 걱정한 정부는 1970에 소련의 외자를 얻어 아스완 남쪽 12Km지점에 높이 110m, 길이 360m의 하이댐을 건설하므로 강의 범람은 없어지고 전장 500Km의 인공호수(나세르호수)가 생겨났다. 물론 농경지가 더 이상 옥토가 될 수 없음도 각오한 결정 일 것이다. 그러나 댐 건설을 계획하다 보니 10여 개 이상의 고대유적이 물에 잠기게 된 것을 유네스코를 비롯한 세계 문화유산 보존에 호소하여 51개국의 $36 milliond의 성금을 모아 이 유적들을 근처 높은 지역으로 옳기는 일을 해야 했다. 이중 가장 큰 람세스 2세의 아브심블 성터의 이전이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1964년부터 4년 동안 2-7톤 무게의 1036개의 조각으로 분해하여 원래 장소에서 60m위로 고스란히 옮기는데 성공했다. 댐을 만들기 전 물의 높이를 예상해 옮기기도 어렵겠지만 1년에 두 번 신전 안의 석상을 10분쯤 비친다는 햇살까지 맞추어 놓은 것은 건축 신기술의 개가라 아니 할 수 없다. 아니 3500년 전 건축물을 현대기술로 동강내 다시 꼭 맞추어 논 이 신전을 보기 위해 옵션 $500의 거금을 투자해야 했다. 왜냐면 아브심블은 지리적으로 아스완 남쪽 300Km에 위치해 버스로는 5시간 이상을 사막을 운전해야 하고 나일강 아브심블 크루스로는 2-3일 걸리기 때문에 항공편 이용이 제일 빠르다.

아스완 공항에 잠시 쉬었다가 바로 출발한 비행기는 40분 정도의 비행 끝에 아브심블 공항에 도착했다. 수단과의 국경이 40Km 박에 안돼서 그런지 숨막힐 정도의 더위와 함께 사방이 온통 사막 지대다. 공항 버스를 타고 10분쯤 달려 성터 입구에서 관람 표를 사고 인공 산을 돌아서니 넓은 인공호수를 바라보고 서있는 거대한 람세스 2세의 석상4개가 한눈에 들어온다. 과연 새벽을 깨우며 달려온 가치가 있다. 아브심블은 람세스의 야심작이며 피라미드와 함께 이집트의 자존심이며 심볼(?)이 되기에 충분하다. 높이 20여m의 석상 사이로 난 입구에 들어서니 더 많은 석상과 벽화들이 가득하다. 람세스2세는 1257BC에 이 성전을 만들었는데 67년 제위에 부인만 42명 자녀가 170여명이나 되며 여러 곳에 자신의 석상을 만들었다. 아브심블에는 람세스 자신의 신전과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 나파테리(Nafertari)왕후를 위한 신전이 그 옆에 자리하고 있다. 92세 까지 장수한 그는 부인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 부인의 두 딸까지 아내로 삼은 좀 이상한 족보를 만들어 냈다. 특이한 것은 부인과 딸, 등 여자들의 석상은 그의 발아래 아주 적게 만든 것을 보면 여자들에게 크게 크레딧을 안 준 것 같다. 그래서 남자만 결혼을 4사람까지 할 수 있는 권력(?)을 준지도 모르겠다. 간단한 기념촬영 후 공항으로 돌아와 아스완에서 내려 4일간의 나일강 크루스 를 위해 Moon Godness호에 여장을 풀었다.

4. 누비안 문화와 나일강 크루스(Aswan지역)
아스완은 룩소에서 나일강을 따라 남쪽으로 200Km 떨어져 있으며 인구 20만 명의 작은 도시로 카이로에 비해 아주 조용하고 매연이 없어 살기 좋은 도시로 이름이 나있다 그러나 사하라 사막의 중심도시이기에 사방이 사막이고 비가 내리지 않아 척박한 땅이다. 단지 나일강 가에 평화스럽게 유유히 떠있는 Feluca(돗단배)만이 그 명성을 대신해 준다. 100여명이 오늘부터 4일간 한 식구가 되어 룩소까지 크루스 여행이 시작된다. 승객들의 국적도 다양하여 갑자기 국제선이 되었다. 오후 1시에 배 안에서 점심을 하고 오후관광으로 Feluca승선을 위해 20여명씩 나누어 작은 배에 탔다. 욧트를 연상케 하는 이 배는 모터가 없고 단지 바람을 이용해 운행하는데 바람에 역행 할 때는 지그재그로 아무 문제없이 갈수 있는 것이 신기했다. 1시간쯤 아스완 시내의 강변을 돌아보는데 배를 운전하는 사공들은 한결같이 얼굴이 검다. 이 지역은 누비아 민족이 과거 지배했고 이들은 문자가 없는 자기들의 언어로 살아 왔다고 한다. 이들 마을은 벽을 노랗게 칠해 살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는데 하이댐 공사로 인해 많은 주민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 되었다고 한다. 크고 작은 Feluca선박은 옛날 무역의 주 운반 수단이었고 왕권에 의한 Obelisk(돌기둥)같은 무거운 물건들도 이 배를 이용해 이집트 전역으로 옮겨졌다. 이런 배가 이집트 전역에 12000척이나 되며 가끔 허가 없이 운행도해 안전사고도 빈발한다고 한다. 한 여행기에는 이런 작은 배로 3박4일 취침하며 나일강 크루스를 했다고 써있다. 자면서 밤하늘 별을 볼 수 있다고 써 있지만 과거가 아닌 지금엔 위험할 뿐이다. 나일강 크루스가 호화 여객선이라고 표기 되어 있지만 선상의 수영장 모습과 달리 식사나 레이저는 크게 기대할 수 없고 몹시 낙후되어 있다. 배로 돌아온 승객들은 저녁 식사를 하고 밤에 민속춤 공연이 있다고 했지만 피곤해 일찍 수면을 취했다.

10월 28일 일요일, 운행하지 않는 크루스 침실까지도 시내의 새벽기도 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아스완 시내 관광이 있고 오후 1시쯤 룩소를 향해 첫 항해가 시작 된다고 한다. 아침을 마친 후 단체관광으로 먼저 하이댐으로 갔다. 나일강에는 이미 2-3개의 댐이 있는데 이 하이댐 공사로 인해 큰 호수가 형성됐고 이 댐은 크기로 세계에서 3번째 안에 든다고 한다. 바다 같이 넓은 낫셀호수의 강바람을 만끽한 후 근처 호수가에서 작은 배에 나눠 타고 Pila Temple(이시스성터)로 이동했다. 이시스는 생사를 주관하는 오시리스신의 부인인데 동생에 의해 죽임 당한 남편을 다시 살려낸 신화를 간직한 성터다. 필라 섬에 위치한 이시스 성터 역시 하이댐 공사로 물에 잠길 수 밖에 없는 것을 150m 근처 작은 섬으로 옮기는데 성공한 케이스다. 다시 버스에 옮겨 타고 시내로 돌아와 화강암으로 된 미완성 방첨탑(Unfinished Obelisk)이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집트의 고대인들은 돌 다루는 솜씨가 대단하고 무거운 돌을 전력의 힘 없이 어떻게 만들고 운반 했는지 의문이다. 거의 모든 돌 조형물이 이 지역에서 만들고 옮겨 갔다고 하는데 이 Obelisk가 이집트에는 수 없이 많고 파리 콩코드 광장, 로마 바틱칸, 이스탐블, 등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다. 기존 돌 기둥 중 가장 큰 것을 만들다가 끝내지 못한 것이 이 지역 돌산 가운데 누워 있는데 크기가 4.2m X 41.7m에 무게가 1267톤이나 된다. 핫셉수트여왕을 위해 세워지려던 이 방첩 탑은 만들다가 틈이 갈라져 실패해 버려 두었는데 만일 성공했다면 세계제일 큰 Obelisk가 됨이 확실하다. 배에 돌아와 점심을 하고 잇는데 배가 출발한다. 척박한 땅이지만 떠난다니 아쉽다. 사막의 폭염 속에도 아련히 피어있는 이름 모를 길가 꽃들도 떠오르고 이슬람 모자에 까만 누비아인이 운전하는 Feluca배 속에서 영어도 모르면서 부업으로 한 푼이라도 벌어보려고 내놓는 수공예품 들을 보여주던 손길들도 그립다. 제발 이제 땅속을 뒤지는 일은 그만하고 이들의 생존을 위해 정부가 무언가 잘 해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아스완에서 오후 1시쯤 출발한 배는 오후 4시 OkomBo에 도착해 성터를 구경하고 계속 항해해서 Edfu에 기항한 후 29일 아침 마차을 타고 Edfu Temple을 관람했다. 성터는 한결같이 기둥이나 벽들만 남아 있고 내부 소장품은 거의 없다. 오후 내 항해하여 Esna에서 적은 댐 때문에 만들어진 갑문을 통과하는 멋진 전경도 보며 밤에 룩소에 도착했다. 선내의 활동은 거의 없고 주로 책을 읽고 신기한 아랍어 알파벧을 계속 익혀 내 이름과 상대방 이름을 쓸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러나 여전히 갈겨쓴 그들의 글을 이해 하는데 까지는 어림도 없다. 식사가 충실치 못하다고 불평하는 몇몇 여행객들의 푸념이 있었지만 편안한 여행을 예측했던 것은 처음부터 잘못이고 신기한 그들의 역사 위에 우리의 존재가치를 느껴 보는 것만으로도 이 나라 여행의 가치는 충분하다.

5. 크르낙 신전과 왕의 무덤 골짜기(Luxor)
10월 30일 월요일, 룩소는 옛날 테베(Tebe)라 부르는 한때 고 왕국 수도였기 때문에 한국의 경주처럼 유명하고 시내엔 광광객의 물결로 혼잡을 이룬다. 이집트의 3대 수입원인 오일판매, 스에스 운하통행료, 관광사업인 것을 봐도 관광은 이집트의 큰 수입원이다. 1997년 반정부 파에 의한 관광객 테러 이후 많은 경찰이 광광지와 관광객을 보호하고 있어 무장경찰이 심지어 크루스배에 까지 안전을 위해 올라와 있다. 배에서는 인터넷을 사용은 물론 TV마저 신통치 않아 외부연락이 두절 되어 버린다. 룩소는 옛날 수도 테베라는 이름으로 부유층이 살았던 역사적인 도시다. 아침 일찍 1일 그룹관광에 나서 먼저 나일강 동쪽 죽은 자들의(Villeage of King) 계곡으로 향했다. 먼저 찾은 곳은 이집트의 여왕 중 가장 오래 왕위를 유지하고 치적이 많은 하셉슈트(Hatsepsut)여왕의 사원이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의 민둥산아래 현대식 건물처럼 시야에 들어온다. 사원 안에는 파라오 들의 석상과 벽화가 우리를 맞지만 역시 소장품들은 하나도 없어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하셉슈트여왕은 본래 투트모스 1세 왕의 딸이었는데 이복동생의 왕위계승으로 그의 왕비가 된다. 그러나 왕이 일찍 죽자 그의 아들이자 조카일수도 있는 투트모스 3세의 어린 나이임을 앞세워 수렴청정을 하다가 밀어내고 왕이 된다. 다시 투트모스 3세가 왕권을 되찾을 때까지 오랜 제위 기간 중 향료를 저렴하게 공급하여 서민들도 미이라를 만들 수 있게 하고 이웃나라와의 교역을 활발히 해 평민들의 생활에 많은 치적을 쌓은 왕이다.

그룹은 다시 버스로 돌아와 20분쯤 이동한 후 내리니 여기가 왕들의 무덤이 있는 골짜기라 한다. 여기 저기 파헤친 무덤의 입구가 있고 강력한 태양 빛이 땅에 반사되었다가 얼굴을 때린다. 아 왕들의 수난시대가 온 것인가, 죽어서도 조용하게 쉴 수 없고 수 없는 방문자들의 발걸음으로 소란한 내세를 보내야 하는 운명이다. 왕들의 무덤은 하나하나 번호가 주어져 현재 KV 62번까지 발견 되었고 지금도 계속 발굴 중이다. 한번의 입장권으로 3개의 무덤을 볼 수 있으니 유명한 왕의 입구에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다. 무덤 안은 신들의 그림과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벽화들이 색깔도 아름답게 그려져 있고 석관도 육중하게 있는데 그 안에 미이라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고대인들은 20개 이상의 신들을 만들고 섬겼는데 예를 들면 태양신, 수호신, 독수리신, 소의 여신 등이며 재생부활의 신인 오시리스 신은 부인인 이시스신을 가지고 있고 그 사이에 아들 호루스신도 있다. 신들도 결혼하고 자식을 갖는다고 생각했는지 이해가 약간 안 된다. 호루스신의 마크는 이집트 항공사의 심볼이며 기내에 비치된 책자의 제목도 호루스다. 이들은 미이라를 만들어 땅에 묻고 신들의 심판을 거쳐 영생한다고 생각했는데 영생할 때 심장만 필요하고 다른 장기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지 미이라를 만들 때 심장 외의 다른 장기는 모두 빼버린다. 그리고 영생 시 필요한 곡식, 취사도구, 옷가지, 장식물, 마차 등등을 함께 넣어 매장한다. 이들이 죽으면 오시리스신을 비롯한 42가지 신의 심판을 거쳐야 하는데 이때 심장의 무게와 깃털의 무게를 저울로 달아 마음을 비워 심장의 무게가 깃털보다 가벼우면 영생하고 무거우면 맹수에게 잡혀 먹힌다고 하는 신화가 유명한데 이 그림은 카펫이나 벽화 또는 파필루스 특수 종이에 그려져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었다. 4000년 전 사람들의 생각을 지금 이해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다가 문득 지금부터 4000년 뒤의 후손들이 우리의 지금 믿는 신과 생각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영겁의 세월 속에 우리의 존재는 생각조차 바로 할 수 없는 미물임을 어찌 부정 하겠는가.

1922년 11월 4일 하워드 카터씨에 의해 발견된 19세의 어린 나이로 죽은 투탕카멘왕의 묘에는 1100Kg 이나 되는 순금으로 된 관을 비롯해 1000여 점이 넘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투탕카멘왕의 골든 마스크(Golden Mask)는 유물중의 대표적인 사진이 되어 여행책자나 선물점, 식당 등의 광고에 많이 등장한다. 이집트의 많은 성터나 박물관에도 소장품보다도 돌 석상, 돌 비석, 벽화 등 크고 무거운 것들 뿐이며 도굴된 많은 소장품들은 사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지의 유명 박물관으로 흩어진 것이 분명한데 카터씨의 이 묘 발굴로 이집트의 체면이 좀 유지 되었을 것 같다. 우리는 근처 여왕과 일찍 죽은 왕자, 공주들의 무덤도 관람하고 점심식사를 위해 배로 돌아왔다. 오후에는 나일강 서쪽에 있는 룩소 시내 카르낙 신전과 룩소 신전을 관람했다. 룩소가 옛날 수도 테베였을 당시 왕만이 태양신 아몬과 대화 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고 아몬신을 위한 거대한 신전을 지었는데 이집트에서 제일 큰 신전이 되었다. 높이 23m의 거대한 돌기둥이 100개도 넘게 도열해 있고 천정은 사라지고 없지만 방도 수없이 많다. 몇 개의 신전이 더 있지만 해가 지므로 배로 돌아왔다. 4박5일의 마지막 밤이고 저녁식사다. 나일강 크루스 Certificate도 주고 크루스에 대한 설문지를 써 달라고 한다. 뉴욕에서 온 부부는 설문지에 무슨 이름 쓰는 난이 있느냐고 쓰지 않겠단다. 나는 내용과 안내, 써비스 다 Exellent 라고 쓰고 식사는 중 이하라고 썼다. 크루스가 미덥지 않아 호화 크루스로 Update해서 돈을 더 낸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된 앙갚픔 이라 할까, 아니다 다음의 여행객을 위해서 자극을 주기 위함이다. 선박주인에게 전달되었으면 좋으련만..

10월 31일, 화요일 배에서 내려 같이 여행한 승객들과 인사한 후 근처 호텔에 짐을 맡기고 오후 4시까지 자유시간을 가져야 된다. 카이로로 돌아가는 비행기편이 저녁 7시기 때문이다.
이곳 지정 메네저 아델(Adel)에게 부탁해 두 개의 박물관 관람, 호텔에서의 식사, 하루의 교통을 포함해 65불을 지불했다. 아델은 이슬람으로 부인이 둘이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물 담배를 하루 5-6번 피워야 한다고 한다. 하루에 5번씩 기도 하는 사람이 양쪽 부인에게 거짓말을 해야 할 때 양심이 가책 받지 않느냐니깐 그렇다고 하면서 웃는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룻소 박물관엔 금으로 된 신들의 조형물, 벽화 등이 옛날 수도답지 않게 조금 전시되어 있다. 미이라 박물관엔 당시 사용되던 향료, 미이라 만드는 방법 등이 상세하게 전시되어 있고 실제 껌껌한 방에 누워있는 미이라의 모습엔 으시시한 느낌마저 들었다. 오늘이 바로 할로인 데이가 아닌가, 누워있는 미이라가 지금 벌떡 일어난다면.. 아, 고대인들은 왜 시체 가지고 현대인을 놀라케 하는가. 오후 7시 비행기가 연발해 카이로에 도착하니 9시가 넘었다. 마중 나온 Geroge가 호텔로 가는 길에 Pizza Hut 에서 수프리움(Suprium)을 사준다. 그래 당신이 최고다.

6. 역사 속에 발돋움하는 회색 빛 대도시 카이로(Cairo)
11월 1일 목요일, 어제 밤 늦게 들어온 숙소는 Merriett 호텔로 별5개 방이 1000개가 넘는 고급호텔이다. 아침에 만난 이만과 Sama에게 연습했던 아랍어로 이름과 몇 개 단어를 거침없이 써 보이니 놀래며 박수를 친다. 그래 직장 없어지면 여기와 아랍어 선생 하겠다고 했다. 이만은 내일 금요일이 이슬람 휴일이니 교통사정 때문에 오늘은 쉬고 내일 관광하겠냐고 묻는다. 금요일은 이스람 휴일, 토요일은 유대인 안식일, 일요일은 케도릭과 그리스도교 휴일, 이문제도 3000년 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트래픽을 피해 먼저 가장 오래된 콥트교(그리스도교) 교회를 찾았다. 예수님 가족이 어릴 적 잠시 피난해 와 이기도 했다는 성경에 근거해 4세기경에 지어진 교회인데 아주 낡았지만 지금도 사용 중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오래된 교회도 근처에 있어 카이로의 구시가에 3종교의 오래된 교회가 같이 있는 셈이다. 우리는 카이로 시가와 멀리 피라미드까지도 한눈에 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무하마드 알리 이슬람 사원을 찾았다. 거대한 첨탑이 위용을 자랑하는 1857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카이로의 랜드마크다. 내부를 둘러보고 오스만왕조의 융성했던 시대를 상기해봤다.

오후계획인 박물관 관람을 점심 전에 끝내고 자유시간을 줄려고 이만은 길을 재촉한다. 좁은 골목에 없는 것이 없는 샤핑 지역으로 이동해 선물 몇 가지를 사고 카이로 국립 박물관으로 갔다. 100여 개가 넘는 방에 많은 전시물이 언제 다 볼 수 있을지 모르게 많다. 이만은 A Million 이라고 표현 했지만 책에는 10만점은 된다고 나와있고 한가지 물건에 10분씩 소요해 본다면 9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여행 책에 보면 이집트 안내인은 액센트 없는 영어를 구사한다고 해서 가이드들은 다 영어를 모국어처럼 잘한다는 말로 이해했다. 그러나 현지에서 처음 만난 George를 비롯해 이만, Sama, 그리고 다른 안내인들도 거의 한결같이 낱은 톤의 진짜 엑센트 없이 중얼중얼 발음함으로 귀를 쫑긋이 기울이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할 때가 많았다. 이집트인의 스페니쉬 가이드, 중국인 가이드들의 큰소리의 설명과는 대조적이었다. 박물관의 진수는 역시 1922년 발견한 투탕카멘의 묘에서 나온 황금 마스크를 비롯해 그가 사용했고 사후 만들어진 진귀한 보물들이 2층 전시관을 가득 메우고 관람객들도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오후 2시쯤 박물관을 나와 크레오 파트라 호텔 2층에 있다는 한국식당이 멀지 않으면 내가 점심을 사겠다고 찾아 달라고 했다. 한참 여기 저기 전화를 하더니 못 찾겠다고 그냥 호텔로 데려다 주었다. 호텔에서 안내에게 물으니 바로 국립박물관 앞에 크레오 파트라 호텔이 있단다. 아 불싸! 이만의 실수, 10파운드(에집트화폐)를 달라는 택시로 다시 국립 박물관 앞의 크레오 파트라 호텔을 여러 번 물어 찾아 2층으로 올라가니 구룡식당이 나온다. 밖은 간판이 없고 호텔도 허름해 찾기가 어렵다. 식사는 아주 좋았고 그 동안 식사의 문제가 약간 해소 되었다. 돌아 오는 길의 택시는 20파운드를 달라고 한다. 택시들은 거의 모두 낡았고 미터기가 없다. 그저 흥정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데 다음날 한번 더 가는 길의 운전수는 7파운드를 불렀다. 같은 길에 3번의 택시요금이 다 달랐다. 아마 마지막 운전수만 하루 5번의 기도를 충실히 드리는 분인지도 모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만은 호텔위치를 알았는데 별2개의 호텔이라 음식이 안 좋을 것 같아 안
갔다고 한다. 내실을 기하지 않고 외부 보이는 것에 의존해야 하는 사회의식이 보인다.

11월 2일 금요일, 내일 새벽출발에 오늘 하루 자유 날이다. 휴일(이슬람)이라 시내는 한가하고 매연으로 시내구경은 싫고 교외에 나일강 댐으로 피크닉을 갈까 하면서 알아보니 같은 Merriett 호텔에서 운영하는 40분쯤 떨어진 교외에 Mirage City Golf에 오후 2시 자리가 있단다. 할인그린피 $60, 크럽렌트,카트 포함 $40 바로 예약했다. 이집트에 와서 가장 크게 소비한 돈이다. 오전 수영하고 골프장에 도착하니 사막 가운데 훌륭한 리조트를 건설해 놓았다. 사막의 기적 라스베가스를 여기서도 건설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땅속을 파 헤치는 일을 중지 한다면 말이다. 파라오의 후예들과 같이 오후 시간을 보내니 16홀째 어두워 진다. 화려한 골프장의 얼굴처럼 이집트 전 지역도 밝은 얼굴이 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비는 마음으로 5000년 역사의 풍성한 역사와 인정의 나라 이집트를 다음날 아침 떠나왔다. 다음에 한번 더 온다면 시나이 반도의 모세가 10계명을 받은 시내산, 스쿠버 다이빙의 메카 홍해의 미항인 사름엘 세이호, 검은 모래와 힌 모래가 교차하는 서쪽 사하라사막 오아시스쪽을 꼭 여행하고 싶다.
(11/09/2007)

에집트역사 간략:
3000 BC 메데스왕 이집트 통일
2500 BC 고왕국 쿠프왕(피라미드)
2000 BC 중왕국 Tebe수도(Luxor Temple)
1565 BC 신왕국 투트모스 1세 제18왕조시작
1500 BC 신왕국 핫셉수트여왕(20년제위)
1350 BC 신왕국 투탕카멘 소년왕(9년제위)
1275 BC 신왕국 람세스 2세왕(67년제위)
330 BC 알렉산더 대왕 이집트정복
30 BC 크레오 파트라 7세자결
40 AD 산마르크 콥트교회(신교) 설립
313 AD 그리스도교 공인
451 AD 콥트교 이단결정
642 AD 아랍군 이집트 정복
1517 AD 오스만 왕조
1801 AD 무아마드 알리 왕조
1869 AD 스에즈 운하 개통
1914 AD 영국 보호령
1922 AD 영국에서 독립
1952 AD 이집트혁명(장교단),알렉산더왕 이후 2300년 만에
                이집트인에 의한 국가가 세워짐, 나세르중령 주도
1953 AD 공화국시작 1대 무하마드 나기브 대통령
1956 AD 2대 나세르 대통령(스워즈운하 국유화)
1970 AD 3대 사다트 대통령(문호개방,노벨평화상,암살)
1981 AD 4대 무바라크 대통령
1997 AD 룩소에서 관광객 테러사건발생(수명희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