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미국 약국 개업 42년 이야기
American Pharmacy 42Years (1982-2024)
1. 부뿐꿈을 안고 시작한 미국생활
1975년 12월15일, 제 3 순위 전문직 약사 이민으로 미국생활을 시작했지만 약사로 취업하기엔 언어와 전문지식이 턱 없이 모자랐다. 한 개인약국에 들려 보조약사로 일 할수 있는지 알아보는데 주인 약사는 “Chloral Hydrate” 와 “Premarin” 정을 아느냐고 물어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처음것은 수면제 였고 다음 것은 여성호르몬제 인 것을 당시에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후에 안 일이었지만 7년동안 한국에서 개인약국을 운영한 경험은 거의 OTC (비 처방약)와 비타민, 건강 보조제 등 이었으며 전문약은 병원이나 검사실과 연결이 안되는 한국의 의료제도에서 취급 할 수 있는 약들이 아니었다. 말하지면, 약물을 잘 알지 못하면서 비 전문약을 7년동안 다루고 약사로써 미국에 이주한 기이한 전문인이었다. 공부를 해서 약사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우선 언제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는 타자기를 구입해 아파드 입구쪽에 놓고 들고 날때마다 타자기를 보면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게 했다.
당시에 L.A. 시립대학에 오전시간 수강 신청을 하고 오후에는 직장을 구해 일하는 계획을 세웠다. 많은 이민초기의 한인들은 일을 시작해 저축해서 개인사업을 일구고 경제적 자립을 찿는 순서가 대부분이어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쉽지않은 결정이었다. 이민을 떠나오던 날 서울 약사회관에서 만난, 이미 미국에 가 있는 한 한국약사의 아버님을 만난 것은 이민생활의 순조로운 계기가 되었고 돌아보면 이 일이 미국생활을 유리하게 이끈 신의 한수가 되었다.
로스앤젤리스에 도착해 여장을 풀고 연락한 약사 K씨는 이미 한 제약회사의 생산부 한인 직원들의 책임자가 되어있었다. 미국에 도착한 지 몇일후 나는 K씨의 소개로 그가 다니는 제약회사에 인터뷰도없이 취직이되어 생산부에서 일을 시작했다. 당시 보수는 시간당 $2.50으로 기억되며 아파트 한달 랜트비가 $90.00인 것을 보면 하루 $20.00의 보수는 제법 큰 돈이었다. 오후반 직장에는 다른 한인 약사들도 상당수 일하고 있었고 월남인 약사들도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미국약사가 되기 위한 길을 찾고 있었기에 정보를 얻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100여명쯤 일하는 제약회사는 주로 비타민 정제를 만들었는데 원자제부, 정제부, 코팅부, 검사실부 등의 부서에서 간단한 작업의 과정설명을 들은후 곧 바로 일을 시작했다. 파란 눈의 유럽인, 남미인, 흑인, 동남 아시아인 등 인종이 다른 직원들과 함께 일하는 일이 처음 신기했지만 곧 친숙 해 지고 미국에서의 이민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너무 신기한 일은 일 시작 2주후 받은 주급으로 나를 회사에 소개한 K씨 부부에게 저녁을 대접했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부인은 초등학교 4학년까지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다 타도시로 전학한 동급생이었다. 20년도 넘은 어릴적 얼굴을 기억한 그녀의 인식으로 나는 세상의 인연을 다시한번 돌아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전에는 시립학교에서 영어, 수학, 생리학 등 기초학문을 읶히고 점심을 먹으면서 30마일거리의 회사에 출근하면 오후 3시부터 밤11시까지 공장일을 하고 돌아와 자는 하루 일과가 계속되었다. 결혼과 함께 딸이 태어나면서 공부와 일이 쉽지 않았지만 이런 생활이 2년이상 지속되었다. 제약회사에서 친구들과 함께 얻은 정보로 미국의 50여개 약학대학에 편지를 보내 편입해 줄 것을 요청했다. 시립대학에서 의 기초공부는 학교와의 대화에 유리한 입장이었고 대학에서 원하는 서류를 보내 편입을 기다리는 일이 일과가 되었다.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1978년 여름, 미국 중부도시 네브라스카주 “오마하” 에 위치한 “크레이튼 “약대에서 2년 편입 허가 소식을 전해와 미국약사로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2. 공부를 위해 찾은 중부도시
미국의 동부와 서부의 광활한 땅에 철길을 연결하고 철도 산업의 번영에 기여한 중부도시 Omaha, Nebraska에는 주립약대와 사립약대 두곳이 있는데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사립약대 Creighton University 는 80번 후리웨이가 지나가는 다운타운 Old City에 위치해 있다. Dodgers St.는 이 고장의 중심 길이며 학교인근 저렴한 아파트를 얻었는데 옆으로 후리웨이가 나오기 때문에 밤낮으로 소음이 컸지만 점차 만성이 되어 나중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약한 영어실력에 학과시간을 지키는 일이었다. 병원약국에서 같이 일하고 있던 동급생들이 갑자기 없어졌는데 통계학 특강이 다른 빌딩에서 있었던 것을 모르고 있다 결강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일로 약간 겁에 질렸고 이후 수년간 꿈에서 조차 이 장면이 보여 악몽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다행한 일은 junior Year 1년 내내 Module Study 공부방법이었다. 심장, 호홉기, 안과, 신장, 피부, 등 파트별 생리, 병리, 약물 등을 공부하는데 강의가 없고 관련 비디오, 서적을 도서관에서 보면서 공부하는 방법이었다. 각 과목마다 시험에 패스하면 다음 파트로 넘어가는 공부는 신선했고 이 자료들은 이후 약국을 하면서 약사협회에서 면허시험 준비반 강의에 큰 도움이 되기도했다.
시간이 가면서 학교공부도 별 것 아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데는 길이 열린다. 도서관에서 집으로, 집에서 도서관을 왔다갔다 하면서 시간은 흘러갔다. 나는 한국에서 약국을 하면서 인체생리에 대해 많은 의문점이 있었는데 공부를 하면서 이런 의문들이 풀리니 재미가 있고 더 깊히 알고 싶은 마음에 열심을 다 했다. 1년의 긴장된 공부가 끝난후 우연히 모집정원에 한명이 오지 않게되어 결원이 되는 정보를 친구를 통해 듣고 학교와 협의해 시카고에서 일하고 있는 동문 친구를 학교에 편입 시키는데 성공했다. 미국의 입학제도 중 사립대학의 학생모집 제량에 놀랍고 믿음이 좋은 친구가 원서도 내지않고 대학에 편입해 공부하는 기적적인 일도 경험했다.
“오마하” 도시는 조용하고 보수적인 도시며 봄, 가을이 짧고 여름, 겨울이 길다. 꽃이 피는가 하면 한 여름이 시작되고 낙엽이 지는가 하면 추운 겨울이 시작된다. 여름은 많은 습도와 함께 무더위가 계속되며 겨울은 눈싸라기의 폭풍과 함께 차거운 겨울이 길게 지나간다. 겨을이 되면 자동차의 타이어도 겨울용으로 갈아 주어야 하고 1년에 한 두번은 토네이도 (회오리 바람) 의 위험을 피해 지하실로 숨어야 할 때도 있다. 산과 바다가 없는 도시지만 강물에서 낚시하고 봄, 가을 에 피는 꽃의 아름다운 오마하의 생활을 잊을 수가 없다. 공부하는 동안 도와준 한인들의 많은 손길도 역시 잊을 수가 없다.
3. 다시 돌아온 Los Angeles
사실, 2년전 로스앤젤리스를 떠나 공부하기위해 오마하로 갈때 나는 이 도시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미국은 현대화되고 깨끗하고 낭만이 넘치는 나라로 생각하고 왔는데 L.A. 는 그러한 나의 기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거리의 낙서라든가 남미에서 온 소수민족들은 미국의 권위를 배우려는 의식이 없고 합법적인 정부보조나 바라고 있는 주인의식 결여가 싫었다. 나는 전문인이 되어 당당하게 주류사회로 진출 할 것이다 라고 생각 했었다. 그런 생각으로 주류에 남은 전문인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현실적인 꿈같은 생각이었다는 것을 공부하며 깨달았다. 실력이 있다고 주류가 되는 것은 아니었고 주류에 합류하는 일 만이 성공적인 길이 아님도 깨달았다. 적지만 내가 만족할 수 있고 내 능력이 필요하는 곳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Los Angeles 는 나를 필요로 할 것이다 라는 생각이 앞섰다. 2년의 편입 공부를 마치고 대학졸업은 영광이었다. 1980년 6월 ,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로스앤젤리스로 돌아 왔다. 광주사태로 한인타운은 좀 어수선 했지만 관여하지 않았다.
Brea에 집을 구하고 약사 인턴자리를 얻은 후 면허시험 준비와 전문직 일을 수행할 준비에 들어갔다. 신분증 (운전면허) 보다는 소셜번호가 선명한 학생증이 자랑스러웠고 보는 이도 학생증을 더 신뢰하는 듯 보였다. 2년전 공장일을 전전하든 내가 아닌 전혀 평범치 않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1980년 12월 약사면허 시험에 합격해 미국 정식 약사자격을 얻었다. 실로 미국이민 5년만에 전문인 자격을 얻고 관광명소로 유명한 할리우드의 한 약국에서 일을 시작했다.
약국일을 시작하면서 마약성 약물 처방이 가짜가 많고 진짜 처방이라도 환자의 오, 남용에 해로울 수 있는 처방을 골라 거절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당시 한국에서는 많은 실력을 갖추지 못한채 약을 팔 수 있는 권한이 많았지만 미국은 공부를 많이 하고도 약을 조제할 때 제약이 많은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일 하면서 약사의 의사결정이 환자에게 중요한 투약과정이 되는 의료제도를 이해하게 되었다.
약사들에게는 일반 약사법이 있고 환자를 도와야하는 긋 사마리탄법이 있다. 만일 호홉기 환자가 가져온 처방 흡입약을 의사가 연결이 안된다고 거절하여 환자가 위급하게 되면 일반법은 지켰지만 긋 사마리탄 법을 위반한 것이다. 약사의 처방결정은 법을 떠나 환자의 생명을 좌,우 할 수 있다. 의사의 처방이라도 환자의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처방은 조제해서는 안된다. 미국에서 약사의 조제권은 전적으로 약사의 분별력에 있다.
4. 겁없이 open한 자영 비지니스 “Jays Drug”
Hollywood 에서 2년동안 소매약국 경험을 얻었다. 미국약국은 처방전 위주의 약국이 아니며 비 처방약이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약국을 찾아온 고객이 비 처방약울 사기위해 약사와 싱담하는 일이 많다. 다양한 인종이 영어라는 한 언어로 자신들의 개인적인 사생활에 관한 상담까지도 가능한 약사의 직업이 신비하게 느껴질때도 있다. 한국에서의 약국경험과 미국의 의료제도를 연결해 개인약국을 운영하고 싶은 생각이 서서히 움트기 시작했다.
1982년 12월, 한인타운의 북쪽 베버리 블버드에 4년리스의 비교적 저렴한 계약으로 약국을 오픈했다. 상호는 “Jays Drug” 이름자를 딴 상호에 한글 상호는 “제일약국”으로 한국에서 7년간 사용했던 이름으로 정했다. 처음 약국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광고를 해도 한산했고 일과후나 휴일 광고지 전단을 주위 주택가에 돌리는 일이 반복 되었다. 외국인들은 큰 체인 약국에 가서 약을 구매하려 하고 한인들이 언어문제로 조금씩 고객이 되어 주었다.
약국을 개업하고 얼마큼 지나서 당뇨병 “자가 혈당 측정기” 가 소개되었다. “Tracer” 라고 하는 이름으로 처음 나온 혈당측정기에 손가락의 피 한방울을 적시면서 혈중 당 수치를 알아내는 일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발전이었다. 당뇨병 환자들에게 “자가 혈당기” 소개와 함께 판매를 시작했는데 문제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혈당이 얼마여야 되며 높으면 왜 높은지, 조절하는 방법은 무었인지 교육이 필요함을 느꼈다. 혈당기 구입은 많은 질문을 불러왔고 영어가 부족한 한인 환자들에게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당뇨인 명부를 만들고 8 페이지 뉴스레터를 정기적으로 발행해 우송했다.
당뇨병은 예방이 중요하고 조기 발견이 일생동안 혈당조절하는데 좋은 조건을 가져오므로 이를 홍보하는 일도 중요했다. 교회, 단체 등의 소그룹 초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신문 잡지 등의 칼럼을 통해서도 건강한 한인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미국에 살지만 영어가 미숙한 외국인들이 생각보다 많다. 특히 나이들어 이민 올 경우 그 정도는 심하다. 보험회사, 정부기관에서 오는 편지를 이해해 주고 필요한 경우 답장까지 써 주는 일은 매우 즐거은 일이 되었다. 약국과 관련 없는 이런 일들은 돕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5. 4년 만에 영업장소 한인타운 인근으로 이전
처음 약국을 시작한 자리는 한인타운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의 집세가 비교적 저렴한 지역이었다. 4년의 계약이 끝나고 한인타운과 좀더 가까운 8가 거리로 이전했다. 한인 고객이 더 많아졌고 당뇨교육으로 인한 인지도가 생겨 먼거리의 손님도 많이 확보하게 되었다. 미국으로의 전문직 3순위 이민자는 의사, 약사, 간호사 들인데 1970년 부터 쿼터가 생겨 많은 한인 약사들이 이민길에 올랐다. 간호사들은 일찍부터 협회를 만들어 보수교육을 시작하고 면허획득과 직업알선에 큰 도움을 주었다. 본인처럼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면허를 얻어 한인타운에 약국을 개업한 개업약사들은 약사의 권익을 위하고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약사협회를 만들었다.
개업약국 수가 늘어나니 자연 약품 공동구매의 기회를 갖게되며 제약사, 약품 도매상들은 좋은 오퍼를 제안해 회원들의 이익증대에 도움을 주었다. 1980년 부터 미국의 대학에 졸업을 안했어도 외국약대 졸업자에 대한 동등자격을 인정하는 시험을 거쳐 미국약사가 되는 길이 열렸다. 약사협회에서는 약사이민을 왔지만 약사로써의 길을 걷지 얺는 비약사들을 위한 면허 시험 준비반을 토, 일 저녁 시간을 이용해 만들었다. 과목을 선정하고 시험 정보를 뫃으면서 시작한 강의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강의는 미국약대를 졸업한 관심있는 개업약사들이 주로 맡았는데 강의를 통해 면허를 얻은 약사들의 개업으로 약사협회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가까운 거리의 수강생이 많았지만 5시간 거리의 지방 거주자, 타주에서도 찾아와 보수교욱 강의는 수년간 지속되었다. 남미에서 약대를 졸업한 약사도 우리말 사용이 가능하면 등록 할수 있었는데 우리말 사용이 어려워 등록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었다. 1980년부터 1992년까지 계속된 강의로 수백명의 이수자를 배출했다. 면허시험에는 합격했지만 영어가 약한 것이 문제가 되어 내중에 Spoken English Test과목이 추가되어 영어가 어느정도 준비되지 않으면 면허받는데 어려운 경우도 생겼다. 250년 역사의 미국도 완전한 전문인 자격조건이 준비되지 않은채 이민을 받아 우리의 요구로 급히 만들어진 법에 따라 미국의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도 약사가 되는 길을 얻어 스스로의 권위를 수직 상승시킨 역사적인 일이었다.
자가 혈당기구 판매가 자리를 잡아갈 무렵 이웃나라 멕시코는 약국에 아직 저렴한 혈압기 마져 없는 것을 알고 멕시코에 당뇨교육을 할 목적으로 스패니쉬 공부를 시작했다. 언어는 언어마다 특징이 있고 저마다 장점이 있는것을 알았다. L.A.에서 남쪽으로 2시간 반을 달리면 멕시코 국경이다. 장벽을 넘으면 전혀 다른 세계의 멕시코 소도시들이 있다. 약국에 들려보면 당시 혈압약 하나 변변히 갖추고 있지 못하고 당뇨병 약이라고는 약초를 말린 생약제를 물에 다려 마시는 정도였다. 혈당기를 선 보이며 당뇨교육을 해 보라고 권하며 수차례 방문했다. 사실 혈당기 판매에 대한 법적 절차도 문제였지만 쉬운 당뇨병 교육이 당장 이익을 수반하지 못하므로 업소의 반응은 냉냉하기만 했다. 그들이 정규 약사가 아닌점도 문제였다.
6. 한순간에 날아간 my 비지니스- April. 1992 L.A. Riot (1992.04.29)
미국사회의 흑백갈등은 수세기에 걸처 내려오는 홍역 같은 존재다. 흑인 범죄자는 경찰에 반항하고 경찰은 흑인 용의자를 강하게 진압하면서 인권침해의 소지를 낫는다. “로드니 킹” 흑인을 구타 한 경찰에 무죄 판결이 나오면서 흑인 사회는 폭동을 일으켰고 그 불똥이 한인타운까지 미치는 일이 벌어졌다. 일주일 여간의 난동으로 58명이 사망하고 2000여명의 부상자를 배출하고 수많은 소규모 비지니스가 화재로 소실 되었다. 1800여명의 한인 피해자 속에 제일약국 업소도 전소되어 재가루로 변했다. 더욱 참담한 것은 화재보험을 갱신하는 중이어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약국경영 10년만에 갑자기 무직자가 되었다.
할 일도 없고 갈곳도 없어졌다. “산타모니카 비치” 가에 앉아 바다건너 두고온 고향도 생각해 보았다. 가장 휼륭하다는 법치국가 미국에서 가장 난폭한 무법의 시대를 보면서 혼란에 빠졌다. 맨먼져 피해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힌 회사는 B.O.A. 은행이었다. 4만불을 저 금리로 빌려 몬태리 팍 지역의 한 일본인 약사가 운영한던 약국 (Grandview Pharmacy) 을 인수했다. 주택가에 위치한 약국은 제법 오래된 약국이었는데 근처에 의사들이 없어 별로 바쁘지 않고 단골 고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약국이었다.
곧 정부가 움직여 재난청(FIMA) 으로 부터 10만불의 저금리 융자가 허가되어 한인타운에서 새로운 약국장소를 찾아야 했다. 약국장소는 번화한 올림픽 길을 택했고 한 피부과 병원건물 뒷쪽에 자그마한 장소가 눈에 띄었다. 약국허가 최소면적 240 SF 이어야 하는데 10 SF 가 모자랐다. 약정국 직원은 벽 둘레의 보이지 않는 면적 6인치를 가산해 허락을 해 주었다.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적은 약국이 되었을 것이다. 준비기간 2개월을 거쳐 불에 타 없어진 “Jays Drug” 는 다시 태어났다. 당뇨병 교육을 통해 인지도를 올려 놓았기 때문에 고객들은 곧 찾아왔고 2개월 후 건물 앞쪽에 자리가 나서 예정대로 한인타운 올림픽가 큰 길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7. 한인타운 중심부 올림픽가에 “Jays Drug” 재 개업
폭동으로 사라진 약국이 어찌하다가 6개월 뒤 2개의 약국으로 태어나 한인타운과 몬테이팍 지역을 오가며 사업을 다시 시작 할때의 나이가 45세였다. 이미 10년동안 4 번의 이전으로 약국을 오픈했고 당뇨병 교육으로 환자와 약국이 공생하는 방법도 터득했다. J일보사 강의실을 빌려 점심포함 무료 ”1일 당뇨병 세미나” 100명을 모집했다. 세미나는 성공적이었고 끝나는 시간에 혈당기 회사 미국인 직원의 당뇨관리의 중요성과 제품소개를 통역하고 행사를 마침으로 지역사회에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미국회사에서는 Jays Drug의 존재가치를 올리는 시발점이 되었다.
당뇨병을 처음 알았을때 환자는 당황하고 걱정하지만 적절한 정보를 제시간에 얻지못하면 당뇨관리를 소홀히 할 수 있다. 처음에 크게 증상이 오는 일도 아니며 자랑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3개월마다 8페이지의 뉴스레타를 발행해 가정으로 우송하고 1박2일 세미나를 1년에 4번 개최해 영양사를 동반한 식사의 이해를 도왔다. 10년동안 30차례이상의 세미나를 통해 당뇨병 교육약국으로의 위상이 갖추어지고 혈당검사기와 시험지, 관련제품들의 매상이 증가되었다. 검사기 회사는 광고 판촉비로 매년 약국의 교육활동을 도왔다. 2000 년 1월에는 웹 사이트를 손수 만들어 올리고 신기해 했다. www.idea21.org 는 7가지의 딩뇨수칙을 만들어 올리고 기본 Q&A 는 수년동안 질의문답에 응했다. 이후 www.jaydug.com 과 병행해 진문인의 도움을 받으며 운영되고 있다.
알바라도와 올림픽 거리의 4층 사무실에 당뇨교육소를 차리고 주말 세미나를 계획한 것은 많은 내과의들이 환자를 보내고 약국의 판매와 관계없이 순수한 교육의 목적이 있었다. 즉 다른 약국의 고객들도 부담없이 교육의 기회를 갖고 외국인 환자에게까지 교육 할 기회를 였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항상 무료로 운영하는 세미나는 경비조달이 되지 않았고 약국을 누구에게 맏길 수도 없어 5년 운영후 약국 토요 세미나로 바꿨다. 미국에서 Merck는 전문약 제조회사로 이름이 나 있다. 젊는 흑인 여성 출장원이 Merck사 직원 교육에 소매약국을 대표해 강의를 요청해 200여명의 직원교육에 약국성장에 대한 강의를 해 축하 받은 일도 환자들에 대한 열정이 있어 가능했다.
미국에서 당뇨검사 시험지는 OTC제품이다. 그러므로 판매세를 붙여팔고 판매세는 판매세 납부처에 따로 정산해 낸다. 그러나 같은 제품이라도 처방으로 주정부 보험커버(Medicaid) 가 되면 판매세는 붙지 않는다. 처방약은 판매세가 없기 때문이다. 의사처방에 의한 당뇨시험지 판매량이 많은데 판매세는 적게 내는게 이상해서인지 주정부 판매세 감사를 받았다. 의사의 처방이 있어도 당뇨시험지는 판매세를 내야 한다는 주정부 입장에 억울 했지만 그에 응해 1년분의 당뇨시험지 처방량의 판매세를 부과받아서 지불했다. 이후 캘리포니아주 모든 약국에서 처방에 의한 시험지 지불에 주정부보험은 시험지가격과 판매세를 명기해서 지불하고 받은 판매세는 따로 세무국에 보고하도록 약국들에 요청했다. 연방법에 처방약은 비과세인데 억지로 판매세를 적용시키는 일이 “Jays Drug”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이는 그후 약 5년간 계속되다가 이것이 연방법 위반인 것을 알았는지 슬그머니 없어졌다. 당뇨시험지 판매 증가가 가져온 에피소드의 하나가 되었다.
당뇨병교육에 많은 열정을 보인 샌디에고지역 Dr. Edelman은 본인이 당뇨인으로서 매년 큰 집회 ( 1일 세미나) 를 열어 많은 당뇨인의 건강에 크게 공헌했다. 한인사회에 당뇨병교육 약사로 알려지니 크고 작은 집회모임에 초정되어 당뇨병의 예방과 조절방법을 소개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교회행사에도 적극 참여해 해외 선교지를 방문히는 기회도 많아져 중국, 유럽, 남미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한인동포 들에게 당뇨병 교육을 통해 선교사, 목회자들도 교육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을 드리는 기회를 가졌다. 지역 약국들도 방문해 당뇨병의 교육방법과 생활습관을 환자들에게 알리기를 권고했다. 제3국에는 신 개발된 약들도 없고 혈당검사기의 보급이 늦어 안타까운 생각도 많았다.
당뇨병교육으로 약국이 호황을 맞을때 한인 약사회 회장 일을 보게 되었다. 나는 당뇨병 교육을 미국에서 일하는 많은 한인약사들에게 알리고 싶은 생각에 1차 “해외 한인 약사 심포지움”을 계획했다. 한인교포가 비교적 많은 로스앤젤리스, 뉴욕, 시카고, 시아틀 순서로 뫃은 약사가족 70명이 1996년 8월 카나다 밴쿠버에 뫃였다. 약사이민 25년만에 재미한인 약사들이 한자리에 뫃여 4박5일동안 즐거운 기간을 가졌다. 물론 당뇨병 교육이 환자의 건강을 지키고 약국의 이익증대와 위상을 올리는 일이라고 역설했다. 다음 해는 하와이, 3차는 시카고, 뉴욕 순으로 한국에서도 큰 반응을 보여 참여하고 전문지식과 친목을 나누는 귀한 시간들이 되었다. 이 모임은 년례행사로 지속되어 이후 30여년 동안 지속되었다.
약국이 잘 되는 상황에서 약국이 더욱 각광을 받을 대박이 터진 것은 단연 “바이아그라” 탄생이다. 젊음을 찾아준다는 꿈의 명약 “바이아” 는 “다이아” 처럼 모두들 약을 사기위해 약국에 줄을 섰다. 물론 처방이 있어야 사기때문에 의사들도 좋긴 마찬가지다. 타국의 친지들이 미국에서 어떻게든 구해 보내주면 칭찬을 받는다. 선물, 뇌물, 어찌하든 약국의 권위는 높아져갔다. 블루 다이아몬드가 한창 주가를 올릴무렵 이 “바이아” 를 처방없이 판매한 것이 발견되어 곤욕을 치루게 되었다. 1개월 영업정지로 영업장을 쉬고 과테말라 스페니쉬 학교로 본의아닌 유학을 떠났다. 블루 다이아몬드 (비아그라)는 모처럼 나에게 휴식을 가져다주고 잘못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2000년대 초 조지 부시 행정부때 부터 시작된 메디케어 약보험 제도는 정부에서 주관을 했어야 했다. 병원입원, 의료, 검사 모두 정부에서 직접 관리를 하는데 약보험을 체인약국회사가 주관하도록 허가한데서 약보험 제도는 중병을 앓게 되었다. 약국체인이 보험사를 갖는것은 이해상충 때문에 안되는 일을 부시 행정부는 허가했다. 보험사는 제약사와 부조리한 관계를 형성 할 수있고 약값은 상승한다. 의사는 보험사의 영향력 안에서 처방을 제한 받을수 있고 제약사는 의사와 보험사, 공히 친해야 상생할 수있는 길이 열린다. 정부, 보험사, 제약사,의사 들의 얼키고 설킨 이 보험제도하에 병이드는 쪽은 약국이다. 정부와 약국사이에서 중간책(Middle Man) 이라고 소개되는 보험사는 월권행위로 약국의 업무에 과도하게 간섭해 영업 이익이 내리막 길을 걷게된다. 주민의 약국인 개인약국은 운영이 어려워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아지고 체인약국은 도난이 심해져 문을 닫으니 약국을 이용하는 환자들이 불편해 지고 있다.
미국의 250년 역사에 지난 10년이 가장 부패한 시대가 되었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문제가 아니고 부패세력과 이를 대항해 미국의 가치를 찾으려는 세력간의 보이지 않는 전쟁이 오랜동안 계속되었다. 언론을 이용해 국민들을 속이고 반대의견을 내는 그룹은 비판받는 이분법으로 국민들의 생각은 나누어 졌다. 부부의 생각이 다르고 부모 형제 자매간의 정치적인 생각이 달라 사회는 불안하고 미국의 가치와 자유가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럴즈음 등장한 부자 경제인 “트럼프” 는 대통령 선거에 도전해 당선되어 고쳐 보려다 재선에 실패하고 온갖 고초를 격는다. 그래도 정의를 외치는 소수의 사람들과 재도전해 기적같이 3선에 성공한다. 임기 4년동안 정치적 부패가 잘 고쳐질지는 미지수지만 모든 부조리를 알아버린 국민들의 성원으로 미국은 다시 부활 할 것으로 믿는다.
8. 당뇨병 교육위해 “Lantana Pharmacy” 개업
미국에서 50여년동안 12번째 이사를 하게 된 집은 로스앤젤리스에서 서북쪽으로 52마일 떨어진 벤투라 카운티 “Camarillo” 다. 인구 6만6천명의 소도시는 백인분포를 보이며 바다가 가까워 년중 온화한 기온을 유지한다. 딸기밭이 끝없이 보이며 낮은 언덕의 집들은 바다쪽으로 전망이 매우좋다. 이 소도시를 퇴직후 살곳으로 선택한 이유는 여기가 미국지도의 서남부에 위치하여 내가 떠나온 고향의 정을 느낄 수 있고 (한국의 군산위치), 쉬면서 평생 동경했던 미국사회의 당뇨병 교육에 힘을 펴 보자는 생각에서 였다. 이민생활 50년이 가까워 오지만 교포사회에서 생활했기에 이곳으로 옮겨 온 날부터 미국에 새로 이민을 온 기분을 느꼈다. 타운 하우스 160가구에는 동양인이 적고 한국인은 없다.
적당한 가격의 업소를 계약하고 약국허가를 기다렸다. 이 모든일은 Jays Drug가 아직은 수입을 잘 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주민분포는 백인이 주류를 이루지만 의사들은 여러인종이 다양하게 분야별로 일하고 있는모습이 보였다. 주류사회기 때문에 개인약국이 적고 체인약국이 도처에 위치해 있다. 나는 의사들에게 소개장을 보내고 무료 당뇨병교육을 실시하니 환자들을 보내 줄 것을 간청했다. 도시가 경관이 깨끗하고 얌전해 시청에서는 간판이나 깃발등의 선전물을 잘 보이게 다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상업용 빌딩에도 안쪽에 작은 안내판에 적은 글씨의 상호를 기입하는 것이 자기소개의 전부다. 우편을 이용한 영업안내가 가장 많은데 경비가 많이들고 래디오, 신문광고료도 한인타운에 비교가 되지 않게 비싸다.
약 30여 업소가 뫃여있는 샤핑몰인데도 별로 새 업소에 대한 호기심 마져도 주지 않았다. 그림 동호인 협회의 도움으로 1차 그림 전시회를 개최 했어도 몇사람의 발길밖에 지나쳐 주지 않았다. 미국사람들은 조용하고 극히 개인주의다. 가족간에만 소통하고 혼자는 혼자 외롭게 지낸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크게 떠들지 않는다. 이웃에 친절하지만 매우 제한적이다. 한국약국에서는 가족이 다 고객으로 올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병원이 가까운 의사오피스 빌딩에 오래 운영해온 약국이 운영을 중단하고 문을 닫았다. 의사 오피스 빌딩이므로 그곳으로 약국을 이전하기로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은 의료제도의 불평 등으로 이미 약국운영이 어려워지고 있는데 Jays Drug 사정만 생각하고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의사 오피스 빌딩으로 약국을 옮간 후에는 처방 환자들이 제법 방문해서 심심하지 않을 정도 였고 미국인들의 생활, 생각을 조금씩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의료제도 였다. 체인약국이 보험사의 주인이므로 조금씩 체인약국에 유리한 보험 조건이 되어 고객들은 빠져 나갔다. 종업원도 없으니 인건비가 나가지 않아 당뇨병교육에 전념하고 문을 닫고 휴가를 가도 미안하지가 않았다. 쉬는 시간에 그림도 그리며 장부정리도 하고 지역의 한인 주민들과도 친근하게 지냈다. “Jays Drug” 에서 보험사의 부당한 대우로 2개의 보험이 5년간 취소 되었는데 다행이 이 약국에서 조제해 공급해서 2 번째 약국으로의 가치는 충분히 보상되었다.
Lantana 약국에 있는 3일 동안은 시간이 많아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림을 그려 시골 도시의 도나스점, 세탁소, 미장원 등에 그림을 걸게 해주면 좋아했다. 한인이 운영하는 한 세탁소에 그림을 걸어 주려 갔는데 주인은 미술전공 화가였다. 화가이면서 그림에 손을 놓은지 몇년이 된다고 한다. 바쁘게 움작이는 세탁소 일을 보다보면 1년, 5년, 10년이 금방 지나간다. 나는 약국을 운영하며 부담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조건이 한층 좋은 편이다. 약국이 위치한 의사 오피스에는 한인 의사도 몆분 있는데 옆방의 한인 치과의사 (한국말 못함) 와 자주 만날 뿐 수년동안 다른 의사와는 소통이 없었다. 역시 한인의 정이 좋고 한인타운에서 서로 돕고 사업하는 일이 미국인 지역사회에서 사업하는 일 보다 훨씬 쉽다고 생각되었다.
Lantana 약국은 7년정도 운영했는데 아주 운이 좋게도 모든 보험을 다 받을 수 있는 이점이 있어서 한 외국인 약사가 구입을 원해 팔고 그 이름은 바꿔져서 다른도시로 옮겨갔다. 매상이 거의 없는 약국을 팔 수 있는 이유는 모든 보험을 다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매상이 많은 약국은 보험사가 조제 기록을 조사해 이유를 붙여 별금이나 해당 보험의 허가가 취소되니 보험사의 횡포에 약국경영이 어려워 진다. 약국마다 이런 연유로 많은 손실을 기록하고 환자를 위한 약의 전문인이기 보다는 어떻하면 보험사 한데 돈을 뺏기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약사행정도 매우 느리고 성의없이 처리하므로 불이익은 영업자 몫이다. 물론 전자 시대라 이 메일로 처리하는 일이 많아 연장자들이 따라가기 어려운 문제도 있지만 약국오픈 신청이 거의 1년 기다려야 한다는 문제는 심각히게 잘못된 것이다. 의료제도는 고쳐져야 한다. 나는 이의 수정을 위해 관계 기관에 많은 청원서를 수년간 보냈지만 로비에 막혀 의료제도는 더 나빠져만 갔다.
9. 입주업소 제 개발계획에 다시 옆 건물로 이전- 평생 9번째 약국 오픈
약국이 폭동으로 전소하고 올림픽가로 이전해서 부터 27년간 운영했다. 처음 약국이 두 곳이 되어 운영하다가 몬테리팍 약국은 7년후 매각하고 ‘jays Drug” 에 치중했다. 같은 건물에는 피부과, 치과, 내과가 있어 약국운영이 순조로웠고 당뇨병 교육으로 약국의 가치가 올라갔지만 과거 당뇨병 교육으로 인한 검사지 판매로 인한 이익창출이 보험사의 당뇨검사지 커버로 예전의 약국수입을 기대 할 수 없게 되었다. 로스앤젤리스는 여기저기 재개발로 공사판의 도시가 되면서 약국이 속한 빌딩이 재개발로 헐리게 되었다. 약국은 길건너 백화점자리가 작은 점포로 나눠 세를 놓는 장소로 옮겼다. 의사는 없지만 파킹장이 넓고 큰길에서 쉽게 들어 올 수 있어서 좋았다.
사회는 점차 어려워지고 도시범죄는 기승을 부려 첫 2년동안 3번의 좀도둑이 다녀갔다. 마약성 감기약 한병 훔치기위해 벽을 뚫고 문을 부수면 수리하는데 많은 경비가 든다. 35년간 도둑을 맞지 않았는데 단기간에 그들은 여러번 성공했다. 결국 앞문을 영구 봉쇄하고 뒷문으로 오라는 문구를 붙였다. 약품의 유통에도 어려움이 많고 구입 가격도 일정하지 않아 잘못 주문하면 크게 손해을 볼 수 있다. 어느 약들은 전화를 하면 감해주고 그냥 주문하면 비싸게 구입하게 되는 불공정한 유통거래가 아무렇지도 않게 오랫동안 진행되고있다. 도매상은 같은 제네릭약이 회사마다 10배 차이가 나게 나열되어 있고 (비싼 약은 누가 사는지 ?) 같은 회사약도 가격이 자주 바뀐다. 어느 약은 제시한 가격과 전화를 해서 알려주면 할인되는 가격을 같이 리스트에 올려 놓고 있다. 이 곳이 미국인지 의심스럽다.
사회가 혼탁하니 도덕감정이 둔해지고 돈이 면저라는 생각에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과거에는 약이 안전하지 않거나 효과가 없다고 판정되면 의료국에서는 판매허가를 취소했다. 그러나 지금은 로비시대다. 수년전 한 신약이 허가를 기다릴때 한 약물연구소 팀이 조사한 바로는 약물효과가 기준에 이르지 못하고 부작용이 적지않아 더 신중하게 허가 해 줄 것을 의료부에 건의했다. 그러나 의료부는 추가 검사자료를 제출하라는 조건부 허가를 내주었다. 약은 고가로 책정이 되었고 광고와 함께 의사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약물연구소는 최악의 허가결정이라고 의료청을 비난하는 설명서를 인터냇에 띠워 읽은일이 있다.
처방이 나오기 시작하고 약물의 작용기전을 보니 별로 좋은 약이 아니었다. 나는 23개 의사 오피스에 관련 문헌을 첨부하고 처방을 자제 해 줄 것을 건의했다. 그 중 한 의사가 좋은 약인데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반론을 제기해 왔다. 나는 더 많은 부언 설명을 해 다시 보냈는데 그 후 연락은 없었다. 하지만 그 의사분은 내게 좋은 감정을 갖지는 않은듯 했다. 22명의 의사분이 연락이 없음은 나와 생각에 동의했거나 괸계하지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의사가 약을 처방할때 그 약을 모르면서 출장원의 말에 의존해 처방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약이 별로 인 것을 알면서 처방하면 더욱 안된다.
의료인은 다른 전문과 다르다. 생명을 다루기 때문에 진정성이 있어야하고 항상 공부해야 하며 자만해서는 안된다. 세상이 어려울때 진정한 사람과 비 정직한 사람이 구별된다. 돈에 집착하면 비굴해지고 불법에 가까이 할 수 있고 결국 본인과 사회를 병들게 한다. 당뇨병은 조기 발견과 합당한 지식과 훈련으로 일생을 건강하게 보낼 수 있다. 의료인은 적법한 방법으로 환자에게 조언을 해야 하고 환자는 이를 잘 준수해야 한다.
토요일 당뇨세미나를 계속하면서 2개의 약국을 운영하는 중 2020년 봄부터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했다. 마스크를 써야하고 안전거리유지 등의 제약으로 많은 비지니스가 영업을 중지하고 백신이 나올때까지 매우 위험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약국은 영업의 이익보다도 코로나 환자들의 출입으로 매우 위험한 장소가 되었다. 딩뇨병교육은 물론 중지되고 하루 하루 신중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오랜 단골 손님들도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운명을 달리하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정부공인은 되지 않았지만 코로나 치료제로 알려진 마라리아약을 못 구해 생명을 달리하는 분도 계셨다. 의사도 코로나약 처방을 쉽게 주는 의사와 공인되지 않해서 주지않는 의사들로 나눠 약국에서의 역활이 매우 민감해지는 때였다. 아, 기억하기도 싫은 코로나 시대 2년여의 시간이 내가 약국을 운영 할 때 지나간 일이 역사가 되었다.
10. 의료제도 불합리를 후배 약사들에게 물려 주어야 하는가 ?
정치적 부패는 약국에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에 많은 개인약국 운영자들에게 어려움을 주었다. 근본적인 잘못은 18년전 부시 정부가 처음 메디케어 약보험을 시작할 때 체인약국에 허락한 일이 이미 혼란의 시작이 되었다. 이해의 상충으로 안되는 일을 로비로 시작되었다. 보험사는 약국에 검열을 강화해 조그만 실수 까지도 벌금, 보험취소로 자신들의 특권을 과하게 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같은 종류의 약회사들에게 로비하고 로비에 응하지 않으면 커버에서 빠지게하는 등의 불법적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약값은 상대적으로 올라 정부의 지출이 더 많아 짐은 분명하다.
혈압약, 코레스테롤약. 당뇨약은 복용중단으로 인해 더 많은 병적 장애를 가져올 수 있다는 논리아래 약국에서 환자가 약을 계속 사용하는지를 추적해 복용을 권유하게 하고 보험사는 중단하는 환자의 데이터를 찾아 약국에 벌금식 금액을 보험 지불금에서 공제하는 비 민주적인 일이 10년이상 계속되고 있다. 아무도 말릴 수 없고 이해도 안되는 이 제도를 중지 시키지 못하는 보험사의 특권을 이해 할 수 없다. 한 번은 한 보험사의 검열에 별 잘못이 없는데도 몇가지 문제 삼아 7천불을 지불 해야할 금액에서 공제했다. 너무 일방적이며 중재 할 곳도 없는 행정이 매우 원망 스러워 그 일은 부당하다는 편지를 매 주일 쉬지 않고 보냈다. 10주 일쯤 지난후 검열 문서를 다시 보내라는 연락에 문서를 다시 보내 7천불을 다시 찾은 경험이 있다.
당뇨병 교육을 하기 때문에 당뇨병 검사 시험지가 보험에 의해 환자에게 처방되어 조제하는 일이 많다. 보험사는 10여개가 넘는 브랜드와 협상을 해서 각 보험사 마다 일정 브랜드만 커버되게 하는 것은 그 브랜드와 보험사간의 결탁이 있을 수 있다. 각 브랜드는 경쟁적으로 저렴해야 되고 환자는 원하는 브랜드를 마음대로 살수 있으면 되는데 선택된 브랜드는 가격이 오르고 환자는 보험사에서 주는 브랜드만 구입할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지정된 브랜드를 보험사는 원가 이하로 약국에 지불힌다. 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보험사의 주인인 체인약국으로 환자를 유도하는 것인지 오랜동안 당뇨시험지 비지니스는 메디케어 보험의 미스테리가 되고 있다.
아무튼 Jays Drug는 당뇨병 시험지 처리에 문제가 생겨 두 보험사로 부터 퇴출을 당했디. 약국 두개를 운영하기 때문에 다른 쪽에서 청구할 수 있어 환자를 보내지 않아도 되지만 번거로운 일이다. 나는 이 보험사의 운영방법이 부당하니 고쳐야 한다는 편지를 관계당국에 많이 보냈다. 정부의 내각, 국회 상,하원, 도지사, 각 주의 약사협회.. 아마도 주 약사협회는 내 편지가 지겹지만 자기들도 어찌 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까지 한가지도 고쳐진 것은 없고 더욱 나빠지고 있다.
5년전 Jays Drug는 이전을 했기 때문에 모든 면허는 주소첸지를 했는데 주 정부 메디칼이 첸지가 되지않아 곤욕을 격었다. 처음 종이로 신청서와 600불의 신청금을 보넸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가 시간이 흐른후 문의하니 인테넷으로 다시 신청하라고 해서 신청금과 함께 다시 보냈다. 기다리다 연락해 보니 잘 진행되고 있다고 기다리라고 한다. 새로운 메디칼이 나오기 전이니 전주소의 메디칼 번호로 약 보험비를 청구하니 수표는 전주소로 오기 때문에 공사중인 빈터의 주소가 되어 되 돌아가기도 해 고생을 많이했다. 이전 한지 4년반이 됬는데 두번째 주소 첸지 신청서가 취소 되었다. 황당하게도 그 이유는 20년전 약사법규 위반사항을 기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재고를 신청했지만 거절 당하고 얼마 있다가 과거 이사전 사용하던 허가마져 취소시켜 청구를 못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변호사를 통해 세번째, 주소첸지가 아닌 새 약국으로의 신청서를 냈다. 물론 신청비도 세번째로 지불했다. 주정부 공무원들의 만성적인 나태에서 오는 일이지만 실제 약국운영에는 치명적이 될 수 있다. 전화 통화도 잘 되지않고 불평편지에 대한 반응도 없다. 인테넷으로 원하는 서류를 제출하는데 약을 아는 약사에게 세금이나 법적인 자신들이 원하는 서류가 도착 할때까지 기다리는 공무원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 다행히 세번째 신청한 메디칼 허가가 신청 6개월만에 나왔다. 변호사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주소이전 메디칼 시스팀을 경험했다.
두개의 보험이 당뇨병 시험지 청구 부적절로 5년 중지 처분을 받고 5년이 지나갔다. 그중 한개는 재 청구 서류로 간단하게 열어주었다. 다른 한개는 제 청구 서류를 다 제출하고 신청금 500불도 지불 했는데 대답이 없다. 알아보니 1500불이라 해서 1000불을 다시 지불했는데도 아직 오픈되지 않고 있다. 전화도 없고 인터넷 문의만 가능하다. 불경기로 많은 비지니스가 어려운데 도우려는 공무원도, 보험사도 없다. 다음 정부에서 일론 머스크가 만드려는 정부 보조기구 가 이런 일을 도우려는 곳이 아닌가 싶다. Political Corruption (정부의 부패) 이 제발 여기서 그치고 다음 정부는 약국과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부가 되길 빌어본다.
11. 다시 태어나도 약사가 되겠다.
My Pharmacy Profession
I officially retired from my pharmacy Jays Drug in Los Angeles area in 40 years anniversary day of Dec 31.2022. However, I am working in the same pharmacy non-officially as it is until any reason making me not be able to work. I have managed my pharmacy 7 years in Korea before I immigrated to U.S.A in 1975. I established Jays Drug 2 years after I graduated from the School of Pharmacy Creighton University in Omaha, Nebraska. Soon after I opened a new independent pharmacy, the first diabetes self-monitoring kit “Tracer II” was on the market around summer in 1982. I introduced this new self-monitoring kit to my patient. However, some patients have not understood how diabetes works on their bodies.
Diabetes is a chronic disease that leads to life long, and patients must learn lifetime how to control it for life. I circulated a newsletter to patients with diabetes and started to educate in class after hours. I hold an overnight seminar every three months on the weekend. I asked a dietician to join in seminar and demonstrate meal plan and monitoring skill. It was a perfect positive result for many uncontrolled diabetic patients. It lasts overnight seminar for more than 30 times in 10 years period.
I was going to sharing my experience to Korean American Pharmacy in Network North America, so thereafter, have held first symposium in Vancouver, Canada in 1990. It keeps continuing to have held 2nd symposium in Hawaii, Chicago, Washington DC etc. It has last more than 10 years continue overseas Korean American Pharmacy Symposium. Jays Drug have had burn down to ground in Los Angeles Riot 1992, however, it could not stop these activities. Jay Drug re-established itself in a different area after two months of preparing.
Education seminars provide meal plans, exercise, use medication, complication care, and monitoring skills etc. A patient with diabetes does not have enough for one time seminar. They keep in contact with the pharmacy and pharmacy become caregivers anytime they need information about their diabetic question. I am very happy to share the information with people with diabetes. I also learn from patients in different case by case.
Jays Drug have had received Co-Adv Fund $5000-$6000 annually from “C” DM Monitor Kit Company because Jays Drug Strip sales are increase yearly and this fund make possible all seminar expense.
Through the caregiver activity, pharmacy has a good reputation for the community. All employees are ready to help and happy to serve our patients. Because many patients are sick and uncomfortable, sometimes their symptoms are painful, the pharmacy is ready to help them in any circumstance. The pharmacists are very close to the patient who becomes a caregiver and commonly communicate with them. The Pharmacist is the best position to resolve simple issues for the patient and I am proud to be in this position.
I want to be a pharmacist even if I born again. Let’s be proud of us!!
나의 이야기: (My Story : Please follow down to English)
1958년 내가 11살 될 무렵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서울구경을 했다.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 서울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뻐스를 한시간쯤 타고나가 기차로 갈아 타고 하루종일 달려 밤이 이슥해서야 서울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네온싸인 반짝이는 야경도 대단했지만 고궁의 궁궐들과 인파로 붐비는 도시생활이 내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였고 나의 시야를 넓혀 주기에 충분했다.
1969년 내가 22살 되던해 나는 한국 약사면허를 얻었고 곧 약국영업을 시작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약품 도매상에 보낸 편지 한장 덕분에 그 도매상에서 4개월간 경험을 쌓고 곧 바로 그 도매상의 도움을 얻어 큰 자본없이 아버지가 운영하던 선물가게 자리에 영업을 시작하니 렌트비도 내지않고 사업은 잘 될 수밖에 없었다. 광주에 집을 마련하고 7년을 운영하다가 미국 이민을 떠났다.
1980년 내가 33살 되던 해 나는 미국 약사면허를 얻었고 2년 동안 약국경험을 한뒤 개인약국을 시작했다. 미국에 이민온지 5년만에 약사면허를 얻은 것은 운이 좋은 편이다. 미국대학에 편입해 2년동안 공부한 경험이 미국생활을 지탱해 주는 기초가 되었다. 발전하는 한인타운에서 한인들을 상대로 약국을 운영하는것은 보람된 일이 되었다. 특히 당뇨병 교육에 힘을 쓰고 약국의 이미지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렸다.
1991년 내가 44살 되던 해 나는 약국을 운영하면서 미국 대학에 가지 못한 한인 약사들의 면허시험 보수교육을 약사회를 통해 봉사했다. 주말 크라스를 만들어 동역자 약사들과 함께 수 백명의 한인 약사들이 면허를 얻어 미국에 전문인으로 일 할 수 있게 도왔다. 1992년에는 L.A 한인사회에 흑인 폭동으로 약국이 전소 되었지만 운좋게도 6개월 후엔 약국 2개를 운영하는 기적같은 일도 있었다. 미국의 한인 개업약사 심포지움을 마련해 3년간 주관하고 그후 20여년 년례 행사로 열려 친목과 여행, 보수교육을 도왔다.
2002년 내가 55살 되던 해에는 처방약을 처방없이 팔아 1개월 영업정지를 당해 남미 과테말라에 스페니쉬 공부를 위한 유학(?)을 가기도 했다. 당뇨병 교육을 1박2일 코스교육을 마련해 1년에 4회 10년간 운영해서 많은 당뇨인들의 건강을 지키며 약국영업에도 많은 흑자를 가져왔다. 폭동으로 약국이 전소된후 올림픽 주요 거리로 이전해 27년동안 한곳에서 영업하는 동안 한인사회의 건강 동반자가 되었다.
2013년 내가 66살이 되던 해 거주지를 벤투라 카운티로 옮기고 제2의 약국을 만들어 미국사회 당뇨교육의 목표를 계획했다. 한인사회 당뇨교육을 미국사회에 심어 보려는 노력은 의료제도의 불합리와 곧 도래한 편데믹으로 큰 기대와 달리 큰 발전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며 은퇴 준비와 한인타운의 약국을 돕는 역활을 충분히 하고있다. 이제 제2의 약국은 에스크로 중이며 한인타운의 약국도 개업 40주년을 넘기고 있다.
2024년 내가 77살이 되는 해 나는 퇴직을 준비하고 있다. 생각같아서는 할 수있는 한, 일을 계속하고 싶으나 불합리한 의료제도는 더 이상 계속 할 수있는 에너지를 발산 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56년 만에 한국의 지리산 천왕봉을 다시 다녀와서 지리산 자락에 몸을 쉬며 그림을 그리고 주변도시에 정기적인 당뇨교육으로 봉사할 계획이 있다. 나는 내 자신보다 이웃을 돕는 일을 먼져 생각했고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 공의로운 일을 하기위해 노력했다. 큰 무리없이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린다. (11.15.2023)
(My Story)
The year of 1958, I was 11 years old, I visited “Seoul” capital city holding with father’s hand. In early morning we left home ride a bus an hour and transfer to train run whole day till mid night to get there. Light view in big city was a shock to me right after arrived in Seoul. We visited Kingdom house and busy market with so many people moving around in city life. It was very exiting tour because I was grown up in very small country town.
1969, I was 22 years old, I got a Pharmacist License and opened my own business. It was starting my first social life. A letter to send one Pharmaceutical wholesale Company making me a chance to get experience to practice Pharmacy about 6 month and they help me to open pharmacy business in my home which was my father run gift shop half of space in our home. No rent needed to be paid, all clients were well known home town people, business had established well and easy. I bought big house in Kwangju where I studied in College and left to U.S.A for Immigration.
1980, I was 33 years old, I got Pharmacist License in US. After I got 2 yrs experience in pharmacy business and opened my own Pharmacy. I was Lucky I got License in just 5 years since entering USA. Study 2 years in college became basic foundation in American life. I was very happy running business in Korean town and the town were gown continue year after year. I love to help especially educate Diabetes patients. The pharmacy reputation also got great and the business income do so.
1991, I was 44 years old, I become main member Board License Exam preparing class to whom non US License Korean pharmacist provide by Korean Pharmacist Association. So many Korean pharmacists got a US License through this opportunity and it last 10 years. In 1992, my pharmacy business burn down to ground in Los Angeles Riot. However, I became two pharmacies owner after 6 month later. It was miracle since I would not have any insurance for damaged business. I established Korean Pharmacist Symposium in US and hold first meeting in Vancouver Canada connection friendship, exchange business information, diabetes education skill etc. I continue mainly hold Hawaii, and Chicago meeting annually and give the pattern to Association, they keep hold this meeting annually in 20 years.
2002, I was 55 years old, my pharmacy had 1 month close disciplinary action because selling medicine without prescription. I abroad studied in South America for Spanish study a month. After I returned I started the overnight diabetes seminar for patient. I circulated newsletter and hold this seminar 4 times a year for almost 10 years. I invite license dietitian and Dr’s exchange all information for controlling diabetes. It brought a very efficient outcome. I keep open my pharmacy in main Korean town Olympic street for 27 years and grown together same as Korean town.
2013, I was 66 years old, I moved my home to Ventura County. I open small pharmacy preparing diabetes seminar in English for non Korean community. First, I expect many outcomes however, because of irregularity of healthcare system in US and starting Pandemic will lose opportunity of the plan as expected. The business were slow so that I spend time for painting artwork and this pharmacy will assist to main Korean town pharmacy in different reason. Now, 2nd pharmacy in escrow to sell and Korea town pharmacy also managed over 40 years.
2024, I will be 77 years old, I consider retirement in this coming year. I want to work more as much, however, healthcare system don’t give me much energy and its very woeful inadequate system. I visited Korea last month and hiked the summit of Jiri Mt. 1 night 2 days. I love revisit the top of mountain in 56 years. I realized that my stay were there in next step with spending time painting artwork, hiking and educate in diabetes patient in a chance in there if it is possible.
I always consider my neighbor first to help and follow God guide me fair and rightness. I thank to God guide me till now without any big difficulties. (11.15.2023)